[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각종부적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참말로 실감나게 가슴을 울리는 요즘이다. 점이니 굿이니 무속이니 풍수니 뭐니 하는 단어가 주요 키워드로 연일 언급되는가 하면, 각종 컨설팅 전문가들은 무속관련 사업에 투자를 하면 금방 돈을 벌 거라는 등의 조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공개적으로 막 하는 세상이 되어간다. 정황이 이렇다 보니 내 머릿속에서 꿈틀꿈틀 일어나는 생각도 많아졌고, 기억을 밀고 나오는 풍경도 엄청 많아졌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으로 이사를 왔을 때였으니 아마 이십여 년쯤 전일 것이다. 나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할머니 한 분이 찾아오셨다. 당신의 손녀딸이 지금 연애를 하고 있는데 남자의 운세가 어쩐지 궁금해 죽겠다고, 좀 봐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당연히 깜짝 놀랐고, 그런 거 볼 줄 모른다고 했더니 할머니 왈 다 알고 왔으니 좀 봐 달라신다.

그날은 간신히 어떻게 그냥 돌려보냈지만 그날부터가 시작이었다. 할머니는 거의 매일 찾아오셨고, 어떤 날은 친구까지 대동하고 쳐들어 와서 나의 과거랄까 전과랄까, 하여튼 알 만한 것은 다 알고 있으니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등의 협박까지 하셨다.

나의 과거를 다 알고 있다는 그 한 마디에 나는 뭐랄까, 역시 하늘의 그물은 촘촘해서 모든 것이 다 걸리게 돼 있구나 하는 뭐 그런 심사였다. 가감 없이 실토를 하자면 내가 한때, 그러니까 서울 특별 시민이었을 당시 사주, 관상, 궁합, 택일 등등 뭐 그런 짓으로 밥벌이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몇 번인가 나를 보았던 어떤 사람이 근처에 살고 있어서 할머니들에게 그런 얘기를 했다는 거였다.

그 시절에 나를 그쪽 방면으로 밀어 넣은 사람은 역사소설로 일가를 이룬 소설가였다. 세상살이 너무 재미없어서 나도 소설이나 써 볼까 하는데 할 수 있을까요? 하고 찾아갔을 때 그분이 대뜸 한 말이 이것이었다.

“소설을 제대로 잘 쓰자면 잡놈이 돼야 한다.”

그때 내 생각으로는, 나야말로 소설가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것 같았다. 12살에 집을 뛰쳐나와서 세상 속을 허우적거리는 동안 얻어터지기도 많이 했고, 짝사랑도 숱하게 해 보았고, 사법고시를 본다고 설쳐댔는가 하면 배신도 당해 보았고, 살인을 꿈꾸기도 했고, 끝내는 죽기에 좋은 곳을 찾아서 죽겠다는 생각으로 이 년 남짓 헤매던 중에 만난 무슨 도사며 법사며 보살이며 무당 등등 각양각색의 ‘무당파’ 인사들로부터 자신의 제자로 들어오라는 권고도 꽤나 받았었으니, 이만하면 자질이 충분하지 않느냐고, 자신이 만만하게 큰소리를 쳤더니 그 소설가 왈, “그런 시건방으로는 잡놈 못 된다.”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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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부적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분이 말하는 잡놈과 내가 생각하는 잡놈의 격이 완전 다르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요컨대 주마간산 격으로 힐끗힐끗 스치기나 해서는 시건방으로 떨어져서 불량한 브로커나 되기 십상이라는 거였다. 하나라도 깊이, 넓게, 제대로 공부하고 알았다 싶으면 그 순간 다 잊어버리고 다른 것을 잡아서 또 깊이, 넓게, 제대로 알아내기를 반복하고 있노라면 어느 시점에서인가 저절로 명실이 상부한 진짜 잡놈이 돼 있게 된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역사에 등장하는 온갖 유명 잡놈의 사례를 얘기하고, 마지막으로 못을 하나 콱 박아주었다.

“네가 진정으로 잡놈이 되고자 한다면 기초부터 튼튼하게 세워야 한다.”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는 말이야 뭐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것이고, 그래서 다른 때 그 말을 들었다면 시시하네, 하고 말았겠지만, 그날은 그 말이 그렇게도 절절하게 나의 심금을 울리던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기초가 부실하면 눈앞에 있는데도 못 보고 지나치기 십상이고, 귀에 들리는 말을 들으면서도 핵심은 놓치고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내가 그때 무슨 말을 들었지? 하고 의아해 하기 마련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제 소설을 쓰기 위해 본격적으로 기초 잡기에 나섰다. 그런데 그 시작이 하필 주역이었다. 지금이야 뭐 각종 문화센터 같은 데서 주역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 같지만, 당시에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등의 선전선동이 막 태동하던 시절이었고, 따라서 주역은커녕 고전 자체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굳이 묻고 물어서 주역 전공자를 찾아갔다.

그러고 보면 나는, 어쩌면 타고난 반역자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익숙하고 편안한 것에서 불편을 느끼는 창작자의 기질을 타고난 거라고 좋게 해석할까? 어느 쪽이 됐건 나는 언제 어느 분야에서나 착한 제자가 되기는 글러먹은 인간이었다. 하나를 배우고 나면 벌써 모든 것을 알았다는 착각에 빠져서 스승 잡아먹기를 취미처럼 반복해 왔으니 도대체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나?

반평생을 연구해도 다 깨치지 못한다고 하는 주역 공부를 세상에, 육 개월도 못한 채로 나는 주역 공부 다 끝냈다, 스스로 선언하고 스승을 버렸다. 마음이 바빴던 탓이었다. 마음이 바쁜 나는 주역 공부를 하는 동안 오만 가지 요사한 분야를 알게 되었고, 그 중에 특히 ‘기문둔갑’에 홀려서 그것을 붙잡았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그것도 버렸다. 단전호흡을 거쳐 공중부양에 이른다고 하는 그야말로 요사술이 나를 꾀어냈다고나 할까. 하지만 그것도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부적 한 장으로 악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얘기에 현혹된 나는 이제 부적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오백 권 한정판으로 나온 까닭에 엄청나게 비싼 부적대전을 구입하느라 생활비를 몽땅 쏟아 넣을 정도였으니 말해서 무엇하랴.

 

특정부적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특정부적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생활비가 떨어진 나는 바야흐로 돈벌이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돈벌이라고 해서 무슨 주가조작이라든가 감언이설로 남의 돈을 직접 갈취하는 것은 아니었고, 소풍용 돗자리 한 장을 들고 나가서 바닥에 깔아놓고 사주, 관상, 궁합, 택일, 작명 등등 뭐 그따위 글자를 써놓고 앉아서 손님을 기다리는 그런대로 힘겨운 노동이었다.

처음 나간 곳이 성신여대 앞이었고, 그 다음에 나간 곳이 이화여대 앞이었다. 남학생들은 그쪽 방면으로 관심이 적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선택한 장소였다. 그 벌이가 제법 괜찮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그 뒤로도 돈만 떨어졌다 하면 그 짓을 습관적으로, 관행적으로 아무런 반성도 없이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깜짝 놀라서 아 이런, 이런,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 것이냐, 하는 일종의 성찰에 이르게 된 것은 자칭 법사라고 하는 박수무당을 만나면서였다.

그는 영혼결혼식이나 살풀이 혹은 재수굿 같은 데 불려가서 북이나 꽹과리 혹은 날나리 같은 것을 연주해주고 삯을 받아서 먹고사는 이를테면 그 방면의 전문가이기는 했다. 나는 미처 몰랐지만 그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음을 굳힌 그가 나에게 다가왔고, 그리고 동업을 제안했다. 자기가 관악산 골짜기 어딘가에 깃발을 올릴 계획으로 작업 중인데 신수점 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신수점 정도는 자기도 볼 줄 알기는 하지만 자기는 목소리가 너무 투박하고 비문학적이어서 사람을 홀려내기 어렵다고, 그러니 말을 조리 있게 문학적으로 제법 근사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내가 그날 놀란 것은 사람을 홀려낸다는 그 표현이었다. 홀려낸다는 것은 결국 사기술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때까지 나 자신도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기술로 여학생들의 주머니를 갈취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것을 아마 대오각성이라고 하는 것일 게다. 지금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나는 일도양단, 단칼에 나를 잘라내고 두 번 다시 점술 따위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결혼한 친구나 일가들 중에 누군가 아이를 낳았다고 이름 하나 지어달라는 부탁까지는 차마 거절을 못 하고 지어주기는 했지만, 점을 쳐달라는 얘기에는 장난으로도 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저렇게 몇 년 더 도시를 떠돌다가 중편소설 하나를 써서 지방일간지에 연재를 하고, 그리고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촌놈’의 길로 나섰을 때는, 내가 한때 점쟁이 흉내를 내고 다녔다는 사실조차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어인 할머니가 찾아와서 느닷없는 손녀딸 연애가 잘 될 것인지 여부를 봐 달라고 하니, 나로서는 끔찍한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아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할머니를 끝까지 냉정하게 밀어낼 만한 역량도 나는 갖고 있지 못했다. 만약에 그런 일로 나를 찾아온 사람이 내 또래거나 아랫사람이라면 역시 일도양단으로 끊어낼 수 있었겠지만, 할머니는 아니었다.

 

특정부적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특정부적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때 문득, 구세주처럼 생각난 것이 소설가 이태준이었다. 소설가 이태준의 산문집 ‘무서록’에 점과 관련된 문장 하나가 있는데 그 내용이 이랬다.

“이웃에 한 고마운 분이 있어 우리 집의 신수까지를 보아다 준다. 올해 와서 내 새해 신수는 고기가 개천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격이더라 하였다. 단물에 있다 짠물로 들어가면 곧 죽을 수가 아니냐 하니 그런 것이 아니라 군색한 데서 넓고 풍성한 데로 들어감을 이름이라 한다. 우리는 즐겁게 웃었다. 그런 것을 믿으려서가 아니라 나쁘다는 것보다는 좋다는 것이 역시 좋다.”

좋다는 건 역시 좋다는 이 한 문장에 오래도록 내 마음이 끌렸다. 곰곰 생각해보면 이것은 하나의 진리였다. 좋은 것은 좋다는 말이 진리가 아니라면 무엇이 진리랴.

점술이든 무속이든, 하등종교건 고등종교건 사람에게 기여하는 바가 있다면 아마도 그것일 것이다. 그것이어야 할 것이다. 좋은 것,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 그래서 즐거운 마음으로 희망을 갖고 씩씩하게 살아가도록 해주는 것.

내가 그때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해드린 말도 역시 그와 같았다. 손녀딸이 사랑스러우시죠? 그래서 손녀딸을 안 믿을 수가 없으신 거죠? 계속 믿어도 괜찮다고 생각하시죠? 그런 믿음직한 손녀딸이 선택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좋은 남자일 겁니다. 그러니 할머니는 이제부터 손녀딸에게 연애 잘하라고 용돈이나 가끔 쥐어주세요. 아셨죠?

그때는 그랬지만, 무속과 점술이 세상을 지배하겠다고 나선 요즘 그때의 할머니가 다시 찾아와서 같은 질문을 하신다면 글쎄, 나는 그때와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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