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와 쉑쉑버거가 어울리지 않는다
모스크바와 쉑쉑버거가 어울리지 않는다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2.04.15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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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모스크바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자전거를 들어주던 남자와 쉑쉑버거

모스크바엔 자전거를 들어주던 남자가 있었다. 나는 그를 세 번쯤 마주쳤는데, 전부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묵묵히 내게 다가와, 끙끙대며 올리는 자전거 뒷바퀴를 사뿐히 들어올려 계단 위에 올려 놓은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고맙습니다, 러시아어로 전한 인사에 첫번째 남자는 가벼운 손사래를 치며 금세 인파에 섞여 사라졌다. 유독 착한 사람을 만난걸까? 무심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두 번째, 세 번째 자전거 남자를 만났다. 그들은 낑낑대는 나에게 다가왔고, 뒷바퀴를 들었으며, 얼굴도 보이지 않고 사라졌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7박 8일 간의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도시의 첫인상은, 그저 무척 커다랬다. 어딘지 ‘유럽스러운’ 건축물들이 꽂혀 있는데, 취향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듯 완전히 같은 규격인 소련식 콘크리트 건물들도 섞여있었다. 양파 껍질같은 러시아 정교회의 지붕도. 무엇보다 건물이 하나 같이 거대했고, 유럽식 건물조차도 그 거대한 크기로 유럽을 초과해버린 것만 같았다. 크기로 사람을 압도하는 도시에서, 방금 막 아시아의 평원을 기차로 지나 유럽으로 나아가는 관문인 듯한 도시에서, 친구와 나는 어딘지 먹먹해졌다. 갑자기 어딘지 모를 곳에 떨어진 기분도 들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붉고 넓은 광장에 서서 사람들을 보았다. 스탈린 분장을 한 남자가 다가와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다. 레닌의 묘소 앞에서 남자는 불쾌할 만큼 크게 웃었다. 찍혀주면 돈을 요구할 것이 뻔했다. 그 넓은 곳에 서있으면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보였고, 한없이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은 싫지도 좋지도 않아서, 이 처음 보는 도시를 조금 더 알아가고자 걸어다니고, 지하철을 타고, 곳곳을 다녔다. 무채색 콘크리트 건물 위에 새롭게 정교회 건물이 솟아나고 있는 듯한 거대한 도시. 굽이치는 강변에서는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 뒤로 세련된 고층 빌딩과 위압적인 소련식 건물이 같이 보였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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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걷다가 무인 공유자전거 대여소를 발견했다. 무언가 타고 싶던 마음이 그 대여소에서 낑낑대게 만들었다. 러시아어를 읽지도 못했고, 러시아 휴대폰 번호도 없던 우리는 구글의 도움을 받아 한 시간을 다 채우고 나서야 자전거를 빌릴 수 있었다. 자전거 잠금이 털썩, 풀리는 그 순간에 우리는 모든 피로를 잊었고, 건물 사이사이를 달렸다. 공원을 지나고, 햇빛을 지나고, 강변을 지나고, 모스크바의 수많은 지하도를 지나고, 그 무거운 자전거를 들어올려주는 몇 명의 남자를 만나고. 그렇게 한참 돌아다니다가 이제 허기가 진 시간, 나는 러시아에서 머문 기간 중 가장 맛있는 것을 먹게 되었다. 다름 아닌 쉑쉑버거. 러시아 한복판에서 미국 햄버거를 먹은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와, 미국은 정말 맛있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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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역사가 한 풍경에

전쟁이 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포격이 이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은 계속 죽어나가고 있다. 심란한 전쟁 뉴스는 대선을 치룬 한국에선 점점 잦아들었지만,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전쟁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만난 그 자전거 남자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나는 그들의 뒷모습만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들이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들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빅맥을 사먹기 위해 맥도날드 앞에 줄 서고 있을까?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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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는 러시아에게 다각도의 제재를 가하고 있다. 나는 최근에 뉴스에서 맥도날드가 러시아에서 영업을 잠정 중단하겠다는 소식을 보았다. 러시아 전역 800여개의 점포의 영업을 중단하겠다는 것. 소식을 들은 러시아 사람들이 이제 더는 먹을 수 없을지도 모르는 빅맥을 먹기 위해 긴 줄을 이루었다. 웃돈에 빅맥이 팔리고 있다는 소식도 이어졌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폭락한 루블화가 공중에 흩뿌려지는 사진도 있었다. 익숙하게 생각했던 것은 실은 익숙하지 않았다. 내가 자전거로 모스크바의 거리를 달리며 보았던 수많은 일상들이 지금 어떤 방식으로 서있는지 알 수 없다. 내가 모스크바에서 사먹었던 너무나도 미국적인 햄버거를 떠올린다. 지금으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 햄버거의 맛을.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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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유럽인가? 유럽이 아니라면 아시아인가? 이 애매모호한 질문을 러시아 사람들 스스로도 계속해왔다. 그들은 우선 유럽인이고 싶어했고, 유럽인이라기엔 중심에서 너무 벗어나 있었고, 그 중심 바깥에는 옛 아시아 유목민의 땅들이 펼쳐졌으며, 그들의 역사엔 아시아 민족의 영향 역시 강하게 남아있다. 유럽인지 아시아인지 모를 애매한 정체성을 러시아 사람들은 되새겨 물었다. 그렇게 제국이 되었고, 소련이 생겼다. 미국과 양극 체제를 이루었다. 소련이 패망한 이후로 여러 수렁에 시달리다가 개방된 이후 맥도날드나 쉑쉑버거 같은 서구문화가 들어왔다. 우리에게도 더이상 적국이 아니었고, 여행을 가도 아무렇지 않은 나라가 되었다. 그저 불곰이 보드카 마실 것 같은 나라가 된 것이다. 세계 정세를 따져 분석할 능력은 없지만, 이 전쟁 이후 러시아가 예전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새로운 냉전 시대가 열릴 거라고 내다 본다. 적어도 나는 이제 모스크바가 쉑쉑버거와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알겠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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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내게 러시아는 흥미로운 땅이었다. 그곳을 지나쳤고 지금도 그곳을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의 땅. 스스로 유럽인인지 아시아인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하는 백인들의 땅.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가 기묘하게 혼재하는 땅이다. 어쩌면 그 구분이 생각보다 명확하지 않다는 걸 알려주는 땅이기도 하고. 나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라는 우랄 산맥을 기차로 넘어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고 창밖의 풍경을 지날 때면 그 땅에 살고 있는 생활인들이 타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곳에서 짱구를 닮은 부랴트족 병사와 분홍빛 얼굴의 농부와 영어를 공부하는 대학생과 피부가 하얗게 뜬 군인들을 보았다. 오래전 몽골인들이 들이켜 마셨을 호수를 보았고, 많은 유목 부족들이 살아가고 죽었을 너른 평원을 보았다. 그 모든 풍경을 지나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너무 많은 역사가 한 풍경에 겹쳐 보였다. 거대한 건물들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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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곳 근처에 쉑쉑버거가 생겼다. 거기서 러시아에서 먹은 것과 같은 메뉴를 사먹었다. 러시아에서 한동안 찾아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맛. 그걸 먹으며 러시아를 생각하고, 아시아를 생각하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한다. 어딘지 바뀔 러시아를 생각하고, 내가 만난 그 무심하고 다정한 사람들을 생각한다. 앞으로 세계가 어떻게 나아갈지는 알 수 없다. 무심코 갈 수 있던 곳에 어느 순간 갈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 슬프다. 그곳에 살고 있는, 지금까지 살아 온 사람들 모두 일상의 표정을 계속 지을 수 있기를, 세상 모르는 나는 가만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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