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봄풍경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4월의 햇빛은 송곳처럼 날카롭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뾰족한 햇빛이 내 살의 어딘가를 뚫고 푹 들어올 것만 같다. 수북하게 쌓인 낙엽은 습기가 한 점도 없이 바늘처럼 예리하게 바싹 말랐고, 그래서 산비탈은 눈처럼, 스키장처럼 미끄럽다. 걷고자 하는데도 걸어지지 않는, 올라가고자 하는데도 올라가지지 않고 자꾸 내려가지는, 그런 산길을 우리는 헐떡거리며 오르고 있었다.

3년만이었다. 해마다 치르는 4월의 연례행사를 지난 2년 동안은 생략하고 있다가 올해는 안 되겠다, 우리끼리만이라도 하자, 하고 나선 길이었다. ‘우리끼리’만이란 남동생 하나와 조카 둘 그리고 나 그렇게 4명이었다. 그놈의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4명이 뭐냐. 서울에서 어디에서 최소한 스무 명은 모였을 것이다. 제물도 고기에 생선에 떡에 과일에 등등 푸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는 과일 세 가지에 소주 한 병이 전부였다.

어렸을 적에는 나의 놀이터이자 생활의 전부였던 곳, 지금은 고인돌 공원이란 이름 아래 보는 것마다 친숙하면서도 낯설어서 어리둥절하고, 가끔은 뜻 모를 한숨도 토해지는 곳, 그 뒷산에 고조와 증조 그리고 조부모님의 뼈가 묻혀 있었다.

사람은 어디서 왔는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왜 왔다가 왜 가는 거지? 등등 그런저런 현학적인 질문이 없을 수 없는 날이었다.

토론은 아니었다. 심심풀이 말장난을 빙자한 놀이도 아니었다. 나 혼자의 가슴에서만 바이러스처럼 번져 나가는 질문이었다. 대학생이 되었지만 그놈의 코로나19 탓에 학교를 간 날이 안 간 날보다 훨씬 적은 어린 조카들의 취향은 그런 현학적인 것이 아니다. 자식들을 한꺼번에 둘이나 대학에 보내야 하는 동생 또한 그런 취미를 가질만한 여유는 없을 것이다. 산비탈을 헉헉대고 오르면서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그래야만 하는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무엇인지 나는 모르면서도 어쩐지 알 것 같고, 그래서 물어보지도 않는다.

어쨌든 그들은 나보다 젊다. 훨씬 젊다. 젊어서 씩씩하고, 숨을 헐떡거리며 좌우사방을 둘러보기보다는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간다. 바싹 마른 낙엽에 미끄러져서 가끔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지만 그 횟수는 나보다 훨씬 적다. 내가 5미터를 채 못 나가서 2미터를 뒤로 미끄러져 나간다면, 그들은 십 미터쯤 나아가서 1미터를 미끄러져 내리는 식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벌써 저만치까지 올라가 버렸다.

 

가난한 묘지에서
가난한 묘지에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내가 그들보다 많이 뒤처진 이유는 미끄러짐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일단 미끄러졌다 하면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식으로 좌우사방을 둘러보기 때문이다. 둘러보노라면 언제나 거기 어딘가에 뭔가가 있다. 두터운 낙엽을 밀고 올라오는 새싹이 나를 유혹하기도 하고, 어느새 피어난 제비꽃이며 까치꽃이 나를 숨 막히게 하는가 하면, 다복솔 같은 으슥한 곳에 열심히 둥지를 틀고 있는 작은 새들의 포롱포롱 소리가 내 시선을 잡아끌기도 한다..

무엇보다 얼음을 뚫고 올라오는 복수초를 연상케 하는 그 연약한 새싹과 꽃들은 뭐랄까, 오랜 시간 넋을 잃고 바라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바라봐주지 않으면 뭔가 큰일이 곧 벌어질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이 있었다. 보고 있노라면 금방 눈물이 나올 것만 같고, 잘잘 흐르는 시내물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내 몸 전체에서 자꾸 들리는 것이었다. 그 느낌이 슬프면서도 좋아서, 어쩐지 좋아서 자꾸 보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점점 깊이 몽환 속으로, 환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을 것이다. 현실이 현실 같지 않고, 내가 나인 것 같지도 않은,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무너진 것 같은, 그런 어느 순간 나는 또 한 번 다리에 힘을 잃고 주저앉았다. 그리고 미끄러져 내려갔다. 이번에는 간단한 미끄러짐이 아니었다. 최소한 5미터쯤은 후퇴해버린 것 같았다.

뒤로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고, 그대로 쭈-욱 미끄러지다가 멈추는 순간 나뭇가지들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그게 하늘이란 것을 알면서도 저게 뭐냐, 하는 의문이 강렬하게 꿈틀거렸다. 정말로 그랬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하늘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게 뭐지? 하는 의문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 그대로 정신없이 나뭇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향해 눈을 깜빡거리고 있노라니 문득, 부지불식간에 떠올라 오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고인돌공원
고인돌공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테무진.

왜, 무엇 때문에 그 이름이 떠올라 왔는지는 당연히 나도 모른다. 어쩌면 얼마 전에 읽었던, 칭기스 칸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서 받은 느낌이 강렬하게 아직도 내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탓이었는지도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때 아니게 떠오른 뜬금없는 이름이었다.

한 젊은-이라기보다는 소년 부부가 빽빽한 숲을 통과하고 있다. 신랑을 말을 타고, 신부는 당나귀 등에 얹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가는 여행이었다. 그들은 삼 년 전에 결혼을 했다. 소년은 귀한 물건들을 잔뜩 가지고 신부 집으로 가서 장인 장모에게 그것을 바쳤다. 그리고 삼 년 동안 노동봉사를 한 뒤에서야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갈 수 있다는 전통에 따라 삼 년 동안 열심히 노동을 했다. 그렇게 삼 년 동안의 노동봉사를 마치고 그날 신랑은 신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신부는 신랑을 따라 시집으로 들어가는 나름 행복한 길이었다.

하지만 신랑은 그날 신부와 함께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신부도 물론 시집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당시 몽골에는 결혼과 관련한 두 가지 모순된 전통이 있었다. 남자가 여자 부모에게 혼인지참금을 바치는 것도 모자라서 삼 년 동안 노동봉사를 하는 것이 그 하나요, 납치 또는 약탈이라 부르는 방식의 결혼이 그 둘이었다. 대체로 가진 것이 너무 없거나, 가진 것이 있건 없건 노동봉사 삼 년이 너무 까마득하다고 여기는 남자가 후자의 방식으로 아내를 구했다.

그날 신랑과 신부를 습격한 사내들은 셋이었고, 셋이 모두 같은 어머니를 둔 형제들이었다. 삼형제가 힘을 모아 신랑을 죽이고 신부는 데려가서 형제 중에 가장 맏이의 아내로 삼았다. 이 약탈혼의 결과로서 태어난 사람이 훗날 칭키스 칸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는 테무진 그 사람이었다.

테무진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유래가 또 의미심장하다. 부족 전쟁이 벌어진 어느 날 칭기스 칸의 아버지가 전사 한 명을 죽였는데 그 전사의 이름이 테무진이었다. 테무진을 죽이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아내가 아이를 낳았고, 사내였다. 그래서 전날 자기가 죽인 전사의 이름을 그대로 자기 아들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 네 명의 자식이 더 태어났는데 모두가 테우, 테물, 하는 식으로 초성이 테자인 이름을 붙였다. 왜 굳이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몽골 언어에서 초성이 테인 경우 대체로 창조, 영감, 질주 같은 뜻을 갖는다고 하니 아들의 미래에 대해 강렬한 어떤 예감이 있었을 거라는 추론은 가능해 보인다.

 

봄풍경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아버지의 강렬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테무진, 그는 진실로 자유를 아는 사람이었다. 누가 가르쳐줘서 알게 된 게 아니었다. 죽음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면서 스스로 터득한, 이를테면 자유가 체화된 사람이었다. 훗날 철갑기병으로 유명한 정복자의 수장이 되었지만, 그는 세상에 흔해빠진 정복자들과는 차원이 엄청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릇의 크기 또한 완전히 달랐다.

아마도, 어쩌면, 테무진도 도시에서 성장했다면 그런 크기의 그릇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대체로 규격화된 도시의 풍경은 사람의 상상력을 제약 내지 억압하는 측면이 있지만, 풀과 나무와 작은 계곡들이 얽혀진 깊은 산의 풍경은 사람의 상상력을 극단으로까지 끌어올린다는 느낌이 있다. 하긴 그래서 칭기스 칸 연구의 대가인 인류학자 웨더포드는 아마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칭기스 칸은 정복자이기 이전에 풍경과 풍경을 섞어서 화합하게 하는 연금술사였다고 말이다.

웨더포드에 따르면 칭기스 칸의 몽골군은 유럽인들을 아주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군상들로 보았던 것 같다. 전쟁을 해도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어느 편이 많이 죽느냐 내기를 하는 것 같으니 이게 뭔 바보 같은 짓인가. 그런 경직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니 음악은 장중하고 엄숙하기만 해서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보다는 우울을 주었고, 그림은 사람을 묘사하면서도 사람의 생기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관념 속의 신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람의 언행을 압박했다. 유럽의 그런 경직된 문화를 사정없이 깨트려서 이른바 르네상스 시대를 열게 한 사람이 칭기스 칸이었다.

칭기스 칸은 몽골의 양탄자 문화를 이슬람에 이식시켰고, 이슬람 특유의 문화를 유럽에 옮겼고, 기독교를 중국에 심었으며, 중국의 화약과 나침반과 인쇄술을 유럽에 퍼뜨리는 방식으로 세상에는 다른 것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했다. 이때부터 유럽의 화가들은 죽은 신이 아닌 생동감 넘치는 사람을 그리기 시작했고, 음악가들은 손가락 중심의 연주방식을 벗어나서 활을 적극 도입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칭기스 칸의 등장으로 세계사에 거대한 융합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몽골 사람들에게 신이란 전통적으로 사방을 가득 채운 푸른 하늘뿐이었다. 이 신의 말씀은 바람결에 들려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 말을 붙잡아서 책속에 넣어놓고 다시 꺼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거대한 건물을 지어서 그 안에 가둬놓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고, 그림이나 조각 따위로 묘사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당연히 아니었다. 그런데도 칭기스 칸은 정복지에 널려 있는 그런 종교 시설들을 파괴하거나 금지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곳으로 전파해 주었다. 내 생각이, 내 문화가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다른 사람의 문화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없고서는 절대로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봄풍경
봄풍경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도 자유로운 사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칭기스 칸은 사후 세계까지 관리하고자 하늘 아래 둘도 없이 거대한 무덤을 축조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인간의 한계? 아니면 인간의 특징? 아, 어렵다.

어렵긴 하지만, 뿌듯하기도 하다. 내가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대견하고, 고맙기도 하다. 어려운 문제를 붙잡고 낑낑대는 것,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내가 살아야 할 이유인지도 모른다는, 그런 신통한 생각도 하나 언뜻 지나간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두 배는 더 불안하다. 허벅지와 엉덩이에 힘을 잔뜩 주어야지 안 그러면 그대로 주룩,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휩쓸려 버린다. 결정적인 브레이크 장치라 할 수 있는 발가락에 힘을 몰아주는 순발력도 적시 적소에서 발휘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완전 무사고로 끝까지 내려갈 수 있을까? 아니다.

나는 넘어지고, 미끄러지고, 자꾸 쓰러졌다. 나중에는 아예 여기서 그냥 잠이나 자자, 하고 벌렁 드러누워 버렸다. 누운 채로 가만히 있노라니 어마어마하다. 낙엽이 오랜 세월 층층으로 쌓였다기보다는 차라리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다. 덩어리와 덩어리가 긴밀하게 서로를 받혀주며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이 거대한 낙엽 덩어리에 만일 불이라도 붙는다면, 아찔하다. 소방헬기가 물을 제아무리 퍼부어댄다 해도 불은 꺼지지 않고, 겉에 불만 꺼진 채 안으로 속속 타들어가며 시커먼 연기를 뿜어낼 것이다.

나는 또 어느새, 칭기스 칸은 까맣게 잊은 채로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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