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시와 산책'/ 한정원, 시간의흐름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다은

1. 시와 산책이라니, 어쩐지 고루한가. 왜인지 느릿느릿 걸으며 주변을 돌아보다 감상에 젖어 시 한 수를 읊을 것 같은 불안한 제목일지도 모르겠다. 산책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운 느낌과, 시에서 풍기는 다정함이 그대로 엮여 있는 제목이다. 일상이 내보이는 작은 것들을 따뜻하지만 따분하게 말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하며 삐딱하게 집어든 이 책은 나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천히 하는 그 산책이 맞고, 섬세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그 시가 맞다. 그러나 그 느낌이 이토록 산뜻하게, 무엇보다 부러 부풀리지 않은 채 적힐 때 얼마나 마음에 직접 가닿을 수 있는지 느낄 수 있던 수필이었다. 한쪽은 무턱댄 감성으로, 한쪽은 차가운 냉소로 나누어진 세계에서, 작게 핀 따뜻한 진심은 소중하다.

이 책은 시간의 흐름 출판사에서 만든 '말들의 흐름' 시리즈 중 한 권이다. 한 명의 작가가 두 단어를 제시하면 다음 작가가 하나의 단어를 더 붙인 책을 하나 쓰는 식의 시리즈다. 이를테면, '커피와 담배', '담배와 영화', '영화와 시'. '시와 산책', '산책과 연애'로 이어지는 식. 이런 말놀이를 좋아하기도 하거니와, 참여한 작가진들이 궁금해 읽어보고 싶었다. 유명 소설가와 시인들이 작가진으로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으레 그렇듯, 깜빡하고 잊었다. 왠지 저렇게 시리즈로 있으면 어디 사라지지 않고 잘 있을 것 같아서 손이 덜 가는 걸까. 한 권 읽으면 다른 권도 다 읽고 싶어질까 봐 막상 손이 안 갔던 걸까. 잊고 지냈다. 그러다 우연찮게 시간의 흐름 출판사의 내부 문제가 불거진 과정을 들었다. 자세한 사정은 내부의 일이니 내가 알고 판단하기는 힘들지만, 내게는 이 시리즈를 다시 기억하는 계기였다. 마침 다음에 읽을 책을 고르는 중이라 우선 몇 권 읽어볼 요량으로 시리즈의 책을 살폈다.

내가 다른 책이 아니라 '시와 산책'을 고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정원 작가가 누구인지는 잘 몰랐고, 괜히 들어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살펴보니 사실 아니었는 데다가, 제목이 시리즈의 다른 단어들보다 더 끌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뭔가 이 책부터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작가의 이름 '정원'과 시와 산책이 주는 단어의 느낌이 의심스럽지만 마음에 끌었다. 작가의 이름은 작품의 분위기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까? 큰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 허연의 시집 '불온한 검은 피'는 ‘허-연 불온한 검은 피’ 같고, 백은선 시인의 이름은 내게 the ‘white is the good’ 혹은 ‘white is the line’ 같은 문장을 떠올리게 하고, 왜인지 그런 생각은 나의 독서에 작은 도움을 준다.

 

한정원의  '시와 산책' ⓒ위클리서울/ 시간의흐름

2. 글이 글을 쓴 사람의 성품을 투명하게 비추어준다는 것은 글쓰기에 대한 큰 환상 중의 하나지만, 어떤 성격의 사람만이 어떤 성격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것도 때로는 옳다. 이 글은 억지로 감성적인 체 하지 않고, 억지로 선한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무척 자연스럽게 감성적이고 선하다. 목격한 사물과 인물 들을 무척 세심하고 다정하게 포착해낸다는 의미에서 감성적이고, 세상의 좋은 면을 깊게 응시한다는 점에서 선하다. 작가가 그런 사람이기에 이렇게 쓸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런 성품은 글로 누출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좋은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글이었다. 수필, 이라는 말 아래 작가의 손과 쓰인 글을 한데 붙여 본다. 이 책의 좋은 점은 선한 성품의 누군가를 몰래 알아가는 느낌에 있다.

산책은 우선 어딘가를 걷는 행위다. 어딘가로 가기 위한 목적의 걸음을 산책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테니, 산책은 일단 걷는 것 자체다. 그래도 당연히 산책에는 분명 여러가지 유형이 있다. 자기 고뇌와 생각에 빠져 그저 궁리하는 산책, 비대한 자아를 바깥에 던져 모든 것을 자기 식대로 이해해버리는 무자비한 감성 산책, 내면보다는 바깥 풍경에 정신이 팔려 둘러보는 쇼퍼의 산책 등등. 아주 내면에만 집중하는 산책이 있고, 아주 외면에만 집중하는 산책도 있다. 한정원의 산책은 어디에 있을까. 우선은 감성 산책에 가깝다.

그러나 자아가 비대하지 않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자기애와 자만에 빠져 스스로에게 침잠하지 않는 것. 자신을 부풀리지 않는 것. 자아의 무게를 세상에 부과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생각의 깊이를 보존하는 것. 한정원의 산책은 내면(그날의 생각과 풍경에 대한 반응)과 외면(마주치는 수많은 것들)이 엮이는 바로 그 순간을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바깥의 풍경을 자아로 짓눌러 이해하지 않고, 풍경의 이야기를 관조하듯 스쳐가지도 않는다. 그는 오히려작은 것들을 다시 새롭게 보려고 노력하고, 그날 목격한 자연을 새롭게 이해하고, 어떤 마음을 길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한정원의 산책은 전통적인 서정시와 같았다. 나 바깥의 사물들에 감정적으로 감응하기. 그들의 관계를 때때로 오해하거나 서로 관계를 맺어주고(비유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감각이나 관찰을 길어내기. 그렇게 해서, 보이지 않던 사소한 것들을 말로 품어내기. 전통적 서정시의 감각과 같다. 원래 '시'가 가지고 있는 이런 좋은 특성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때로 꼭 필요한 마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느꼈다.
 

'불이 꺼진 창도, 그 창 너머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면 감은 눈꺼풀처럼 순하게만 보였다." p47

'노인의 몸이 가벼워지는 것은 뼈가 비워지는 탓이겠지만, 점점 더 많은 것들을 단념해서 버려지는 무게도 있을 것이다' p67
 

마음에 남는 문장들이 많은 책이었다. 아마도 수많은 감상들이 한낱 '척'이거나 얕은 '감상성'으로 치부되는 까닭은, 그 진심과 진의가 투명하게 보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이상하게 어디서 보이는지 모를 진심이 곳곳에 느껴져서, 맥락을 자르고 만났다면 부담스러웠을 문장들도 좋아 보였다.

마치 짧은 산책을 반복하는듯 이어지는 글들은 청신하고 담백하고, 결국 사람을 감화시키고마는 진의와 선의로 가득하다. 자기 자신으로 침잠하는 외톨이의 산책도, 바깥 풍경에 눈이 팔린 도시인의 산책도 아닌, 안과 밖을 적절한 균형으로 엮어 이해하는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산책이었다. 내면과 외면이 다정하게 엮이는 한정원의 산책은 꼭 그 자체로 좋은 시와 같다. 작가의 선한 손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의미에서, 꼭 '수필'로 부르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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