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는 소리
봄이 오는 소리
  • 김일경 기자
  • 승인 2022.04.22 08: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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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시커먼 커피 한 잔을 타서 식탁 의자에 앉았다. 베트남 산 커피의 진한 향기와 함께 스멀스멀 올라오는 수증기가 마치 분출하기 직전의 화산 꼭대기 연기 같다. 나의 고정석인 이 식탁 의자는 식사를 할 때는 물론이고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열심히 지지고 볶고를 반복하다가 지쳤을 때, 모두가 잠든 후에 혼자 조용히 손뜨개를 할 때, 지금처럼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을 열 때도 애용하는 자리이다. 나의 사랑을 독차지 한 이 의자의 바닥면은 내 엉덩이를 박제해 놓은 모양새가 돼버렸다. 언제 어느 때 털썩 앉더라도 이질감 없이 나의 엉덩이와 의자 바닥면이 착 감길 수 있는 마치 웨어러블 같은 물아일체이다.

노트북을 열긴 했지만 막상 글이 써지진 않는다. 도무지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온갖 잡념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저녁은 뭘 해 먹어야 하나, 애들은 언제 올까, 거실창의 커튼을 세탁 해야겠네, 그러다 문득 거실 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볕에 이끌려 일어섰다,

언제부턴가 햇볕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다, 난방비 아끼느라 보일러를 잘 켜지 않는 거실이 더 이상 상그랍지 않았다. 웨어러블 같은 의자에 앉아 바라보는 거실창의 풍경은 고작해야 아파트 옆 동의 건물 벽뿐이지만 벽에 부딪히는 햇볕들은 어느새 느긋해지고 있었다.

봄인가 보다. 햇볕을 따라 몇 발자국을 움직이니 이제는 곧 낙화하기 직전인 봄꽃들이 거실 창 아래에서 아른거리고 있다. 봄이네.

세월이 오는지 가는지, 계절이 바뀌는 지도 모르고 사는 나는 참으로 무감각한 인간이다.

한 달이 가면 습관적으로 달력 한 장을 넘길 뿐 바뀌는 숫자가 던져 주는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두꺼운 외출복 대신 가벼운 겉옷을 걸쳐도 무감각한 이 몸뚱아리는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그 어떤 걱정 근심도 모두 잊게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예쁜 색들의 봄꽃 향연을 보지 못하는 두 눈은 얼굴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역할에만 충실했다. 이것은 자연과 함께 사는 인간으로써 직무를 유기한 셈이다.

네 개의 계절 중에서도 유독 봄에 대한 소회가 남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학창시절의 봄은 긴장의 순간들이었다. 바뀐 교실과 친구들, 더 난해해 질 교과목들 그리고 적응해야 할 새로운 분위기 등은 내성적인 나를 어색하고 난감하게 만들었다. 봄이 왔다는 기대감으로 옷차림을 가벼이 했다가 훅 불어 닥치는 꽃샘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그 순간처럼 말이다. 늘 뒤처지는 성적 때문에 주눅을 달고 살던 시절이라 개나리, 진달래가 눈에 들어 올 리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과연 교정에 개나리 진달래가 있기나 했을까 싶기도 하다.

성인이 되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새로운 계절 맞이는 희망이고 기다림이었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결산을 하는 3월말 법인세 신고를 끝내고 나면 꽃피는 계절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회계 세무 관련 직종의 종사자들에게 3월은 고난의 시간들이다. 출근 시간은 정해져 있어도 퇴근시간은 따로 있지 않았으며 야근을 밥 먹듯 해야 했다. 1년의 경영 성과를 신고하고 보고해야 하는 기업들에게는 절세를 하기 위한 중요한 시기였겠지만 회계 세무 종사자들에게는 가혹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3월을 보내고 나면 며칠간의 꿈같은 휴가와 함께 봄을 느낄 수 있었고 때맞추어 벚꽃들은 만개한다. 화사한 꽃망울은 추운 겨울을 견디어 낸 인고의 시간들을 보상해 주는 듯 아름답게 하늘거렸다. 이 기간 동안 미루어 두었던 겨울 이불을 세탁하고 남들보다 조금 늦은 봄맞이 대청소도 하였으며 아이들과 함께 봄나들이를 즐길 수 있었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매년 맞이하는 신학기는 나의 학창시절과는 달리 늘 새롭고 기다려지기는 봄이었다. 긴 겨울방학을 끝으로 한 학년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학년을 준비하면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은 조금씩 커가고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작년과는 다르게 한층 더 성숙해져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부모로서 큰 기쁨이다. 그래서인지 신학기가 되면 괜한 설렘으로 미장원가서 머리도 하고 괜찮은 옷도 한 벌 사고 그랬다. 학부모 총회에 참석한다는 핑계로 나름대로의 봄맞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던 봄이 언제부턴가 시큰둥해졌다. 봄을 시작으로 한 계절씩 지나고 나면 해가 바뀌고 나이 한 살을 먹고 주름은 또 한층 깊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 봄이 반가울리 없다.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봄이라고 해서 재미날 일도 없다.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새로운 분위기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해 주었던 아이들은 친구들끼리 어울려 봄을 즐기느라 바쁘다. 봄맞이 대청소는 이제 힘이 부친다. 늘 똑같은 일상, 매년 똑같이 반복되는 네 계절의 순환은 새로울 것 없는 그저 그런 세월들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봄볕은 여느 해처럼 너그럽고 따스하다. 계절에 무관심하며 무채색 같은 일상 속에 올해의 봄은 유독 반갑다. 한 2년을 숨죽이고 살아서 그런가 싶다.

사람을 만날 수 없었고 같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웃고 떠드는 일을 함부로 하면 안 되었다.

얼굴의 반을 가린 채 코와 입을 막았고 휴강과 개강을 거듭 반복하며 불안정한 세월을 보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경계하느라 늘 불안했다. 어쩌면 일상을 잃어버린 시간들 때문에 계절의 변화를 무감각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기약 없는 고통을 감내하는 일은 사투를 벌이는 일과도 같았다.

대중들 앞에서 재능과 기량을 뽐내고 사는 공연자들에게 지난 2년 여 세월은 삶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매일매일 갱신되는 누적 확진자 수는 삶을 절망하게 만들었고 평범한 일상의 회복은 기대할 수 없었다.

올해는 좀 나아지려나. 가벼운 바람이 한 차례 불자 꽃비가 내린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을 지라도 화사한 저 꽃비아래 서 있으면 모두 잊어버릴 것 같다. 꽃잎이 약해서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쉽게 낙화하는 탓에 혹자들은 덧없는 인생을 뜻한다지만 파란 하늘 가득 흩날리는 꽃잎들은 이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과 아픔들을 사라지게 해 줄 것 같다.

진도북 동아리 팀에서 연락이 왔다. 예전 그 장소에서 다시 개강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어깨춤에 북을 메고 얼쑤 춤을 추던 때가 2년 전이었는데 북춤이 기억날지 모르겠다.

타 구에서 활동했던 취타대에서도 다시 재개할 움직임이 보인다. 입을 사용하는 악기를 다루는 탓에 제일 먼저 휴강조치가 내려진 단체였다. 다시 태평소를 불 수 있으리란 기대감에 악기를 꺼내어 정비를 해 본다.

비닐 막을 사이에 두고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한 채 뒤돌아서야 했던 엄마에게도 자유롭게 갈 수 있을 것이다. 엄마 손을 잡고 그간에 일어난 일들을 모두 얘기해 주어야겠다.

우리 난타팀 회원들도 마음 놓고 회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공연을 하고 뒤풀이를 하던 예전의 시간들이 그렇게 소중한 줄 몰랐다.

모든 것이 조심스럽지만 설렌다. 무료한 일상 속에 놓쳐버린 봄소식들이 오히려 위로를 해 준다. 괜찮아 질 거라고 그러니 이제는 행복해지라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들이 위로해 주는 것 같다. 봄이 그렇게 오고 있다. <김일경 님은 현재 난타 강사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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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u 2022-04-25 13:35:35
창작의 고통이란 역시 힘든 건가보네요. 하지만 그 덕분에 단어 하나도 허투루 흘려보내고 싶지 않을 만큼 정독을 하게 만드는 문장들이 나오나봅니다. 이번 봄은 지난 2년보다 조금은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공연을 할 수 있는 날이 점점 가까워지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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