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송경동 시인-2

[위클리서울=최규재 기자]

<1회에서 이어집니다.>

송경동 시인(2019년 위클리서울과의 인터뷰 모습) ⓒ위클리서울
송경동 시인(2019년 위클리서울과의 인터뷰 모습) ⓒ위클리서울

- 시는 압축적이다. 짧아서 사람들에게 잘 읽혀지지만,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을 법하다. 좀 더 설명적인 산문을 쓸 생각은 없는지.

▲ 산문을 자주 쓴다. 그게 시적인 산문일 수도 있다. 결국 내용의 문제다. 그 안에 인생의 지혜나 중요한 함의를 어떻게 담고 있는가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래도 시인이니 시를 써야하지 않겠는가. 시가 되고 안되고는 ‘중요한 함의’에서 갈린다고 여긴다. 저 같은 경우 전달함에 있어 압축적이고 상징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글이든 되도록 현실을 반영하려 한다. 약간 길어지더라도, 시라는 영역에서 외면당하는 사람들을 반영하고 싶은 생각이다. 지금의 글쓰기란 우리의 시대정신과 맞닿아 있어야 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야기식 시를 많이 쓰려고 한다. 저는 시를 써도 어쩌면 전통적 방식에서 벗어나 시인지 산문인지 헷갈리는 식의 글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지식인 사회에서 주목을 잘 안 하는데 고통이 있는 현장과 관련해서는 산문을 많이 쓰고 있다. 르포성의 산문을 엄청나게 쓰지만, 궁극적으로는 시 형식 산문을 지향한다. 형식을 굳이 따지려 들면, 읽는 이들이 시인지 산문인지 판단하고 규정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전통적 형식을 따지자면 개인적으로는 산문이 좀 더 쓰긴 쉬워 보인다. 시는 짧은 형태 속에서 모든 걸 담아야 하기에 보다 집중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 산문보다는 시가 어렵다. 특히 저 같은 경우 현실 문제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어떤 때는 너무 경직되거나 과격하거나 그러해서 정치적으로 보일 수 있어 조심스럽다. 시라는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문제를 시의 영토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강박증도 있다. 일단은 시인이니 산문보다는 시를 써야 한다. 그런데 시 쓰기가 힘들다. 소재를 다루다 보면 전통적인 시의 영역과 시적 언어적 형태를 정리하는 게 난감하기 때문이다.

 

- 송 시인의 글을 보면 때론 김수영과 닮은 점이 보인다.

▲ 김수영 시인을 워낙 좋아해서 아무래도 닮아 보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제가 김수영 시인에게 배운 건, 배우고자 했던 건 다른 게 아니라 부정의 정신이다. 비판의 정신이다. 기성의 질서와 부정의한 것들에 대해 전복시키려는 정신을 배웠다. 만약 닮아 있다면 김수영 시인 삶의 자세와 자유와 함께 하려는 부분에서 일치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제는 김수영을 한국 시가 넘어야 한다. 김수영 시는 최소한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었다. 김수영 시에 담긴 비판은 진정한 근대를 얻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전근대적인 사고와 그런 사고를 갖고 있는 세력 등에 저항하고 야유를 퍼부었다. 어떤 측면에선 여전히 우리는 김수영 시인의 세계적 시야나 비판적 정신을 못뛰어넘는 것 같다. 물론 중간중간 한국사회는 여러 고개를 넘었다. 김지하 시인을 통해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고, 김남주 시인을 통해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는 분단체제와 제국주의의 그늘을 뛰어넘으려 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게 아직은 미완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노해 시인 등을 통해 노동자 문제가 등장했지만 여전히 미완이다.

 

- 김수영의 작품들, 미학적으로는 어떠하다고 평가하나.

▲ 훌륭하고 월등하다. 그러니 50년이 지나도 김수영이 죽지 않는다. 늘 생생하게 살아있는 시인으로 다가오고 있다. 정치 사상적인 것을 떠나 위대하다. 정치나 사상만 담는다고 해서 훌륭한 시가 나오는 건 아니다. 유려한 시적 표현만 가진다고 해서도 훌륭한 게 아니다. 김수영이 가지고 있던 인간에 대한 이해, 한국사회의 야만적 근대에 대한 표현은 사상과 미학적으로 잘 버무려 있다. 그런 부분에서 많은 시인들이 김수영 시인을 부러워하고 흠모하고 따라하려 한다. 전복적 사유와 언어와 긴장감 넘치는 시적 자유를 만들 수 있게 한 게 무엇인가. 시대를 앞서나가는 꿈과 열망과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갈구하는 목마름 같은 표현들이 미학적 지위를 쟁취하게 한 것 같다. 많은 시인들이 김수영처럼 되고 싶어 할 것이다.

 

- 송 시인의 글을 보면, 박노해와 김수영을 섞어놓은 듯한 인상도 든다. 어떻게 생각하나.

▲ 과분한 얘기다. 저는 그런 분들을 접해 왔기 때문에 조금 섞여 보이는 것 같다. 전 세대가 이뤄낸 것들이 있다. 그것을 딛고 모두의 평화와 평등과 안전을 위해 몸부림 치는 단계가 있었다. 저는 그 단계에 놓여 있을 뿐이다. 박노해 시인의 시들에서도 전 세대의 느낌들이 언뜻언뜻 보인다. 누구든 홀로 설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신사적이든 사회사적이든 더 나아가려고 했던 지점들에서 얻고 배우고 거기서 조금씩 더 나아갈 뿐이다. 만약 제가 그 두 분과 너무 닮아 있다면 두 분을 그저 표절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만약 그렇다면 시인으로서 잘못 살지는 않았나 싶다(웃음).

 

- 대개 예술가들은 선대들과의 차별화를 꾀하려 한다. 새롭기 위해선 창작의 고통이 있을 법한데.

▲ 그런 꿈을 꾸는 건 욕심이다. 저는 동시대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최소한 양심적이고 민주적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로 다행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움이라는 것은 어떤 형식이나 표현이나 기법의 문제가 아니다. 형식이나 표현 등으로 새로움을 진정 획득할 수 없다. 새로움이라는 건 어떤 세계를 발견하고 어떤 세계로 나아갈 때 비로소 차지할 수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상상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표현이나 기법에 어울리는 정치적 옷을 찾게 되는 것이다. 새로움은 그렇게 나오는 것이다. 새로움을 찾으려는 문학예술인들의 경우도 그 새로움이라는 게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와야 하는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박노해의 새로움은 그 전의 시인들의 시에 없었던 노동자 계급에 있었다. 그것을 통해 우리 사회 모순과 고통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박노해 시인이 찾아냈다. 거기서 새로움이 나타났다. 김수영 시인도 마찬가지다. 그 시절 수많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사랑이나 자연에 대해 얘기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김수영을 통해 ‘언론의 자유’를 외쳤다. 4.19혁명 당시에는 살아있는 정신, 비판적 지성으로서 자리가 굳건해졌다. 당시 민중계급에 대한 애정과 평범하지만 밑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그런 것들을 통해 역사인식과 사회인식이 드러난다. 그런데 노동자는 안 나온다. 이후 박노해 시인을 통해 노동자가 시에 정면으로 등장한다. 이렇듯, 새로움은 시대가 흐르면서 훌륭한 시인들로 인해 드러나는 것 같다.

 

- 바이런도 김수영도 참여시인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시 자체가 일상과 정치와 밀착된 참여시여야 한다는 얘기도 있다.

▲ 서정시 따로 있고 참여시 따로 있다는 식으로 구분 나누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 자체를 자꾸 나누려는 의식이나 흐름, 그 이데올로기가 문제다. 사실 나눌 수 없다. 모든 시는 정치와 일상을 표현한다. 그걸 나누려는 게 정치적이다. 시는 순수시거나 서정시여야 한다느니 하는 주장이 고도의 정치적 행위다. 순수시가 뭔가. 순수시를 보면 어떤 진흙탕 같은 흔적이 전혀 안 들어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그 순수시들을 보면 굉장히 정치적인 게 많다. 순수시, 참여시 따로 있다며 분리하는 게 위정자들의 의도다. 현실참여가 다른 게 아니다. 태어나서 교육 받는 문제, 사회로 나오면서 노동권리와 사회복지 등 관련해서 우리는 다 거기에 결부되어 있다.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의식들을 시에서 다 걷어내야 한다? 이런 발상 자체가 정치적이고 나쁜 놈들이 말하는 논리다. 이런 논리를 펼치는 사람들이 기득권과 긴밀하게 관계하고 있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이른바 서정시를 써온 것으로 평가되는 김관식 시인을 오히려 참여시인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있다. 반대로 김수영 시인을 서정시인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 우선 자꾸 나누려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김관식 시인의 경우 소박한 언어로 힘 없거나 약하거나 저물어가는 것들에 대한 마음의 연대를 잘 그려내고 있다. 그러니 그것 만한 참여시가 어디에 있겠는가. 겉으로는 사회적 쟁점에 대해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참여정신이 없다고 단정해선 안 된다. 순수시, 참여시 논쟁은 그래서 의미가 없다. 김관식 시인처럼 가장 작은 존재들에 대해 연민을 표현한 시인도 드물다. 당대 이런 시대정신이 어디 있었겠는가. 김수영 시인이 겉으로는 강하게 썼지만 서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서정과 참여 그러니까 김관식과 김수영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서정 자체가 사물과의 관계와 만남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사상감정이다. 시적 수준은 서정의 깊이 차이에서 나눠질 뿐이다. 모든 시인은 서정시인이고 참여시인이다.

 

- 파블로 네루다를 좋아하는 것으로 안다. 송 시인과 달리 네루다는 서정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네루다의 어떤 점이 좋은가.

▲ 서정적인 시만 있었다면 네루다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 번역되어 있는 시들이 사실 별로 없다. 네루다는 엄청난 저작 활동을 했지만 그 중 번역서들은 흔히 사랑시들이다. 그런 네루다만을 접하니까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김남주 선생 등이 번역해놓은 네루다의 참여시들은 과히 혁명적이다. 네루다는 투철한 민주주의자였고 독재정권에 맞서 긴 망명생활을 했다. 중남미 전체를 통틀어 사랑받는 이유는 수많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시를 써왔기 때문이다. 중남미가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중남미 원주민들의 역사와 삶을 거대한 대서사시로 써내려갔다. <3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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