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내일의 연인들'/ 정영수, 문학동네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정영수의 '내일의 연인들' ⓒ위클리서울/ 문학동네

이 소설집 표지 사진의 남자는 아무래도 티모시 살라메를 닮은 것 같다, 잠깐 생각하고 넘어간 이후의 어느 날 J가 똑같은 말을 했다. 이 남자 어쩐지 티모시 살라메 같지 않아? J는 나의 추천으로 이 소설집을 도서관에서 막 빌려온 참이었다. 맨 첫 작품 '우리들'만 슬쩍 읽었다고 했다. 나도 똑같이 생각했다고 대답하자 J가 웃었다. 사진 속 두 연인의 헝클어진 머리가 곱슬거렸고, 그들의 맨몸은 방금 잠에서 깨었거나, 앞으로 영영 잠들 것을 안다는 듯이 서로 끌어 안고 있었다. 여자의 어깨뼈가 앙상했다. 한 사진 속에 과거와 미래가 함께 보인다. 지난한 사랑의 과거를 지나, 거의 무너진 모양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두 연인은 어떤 사랑의 미래를 볼까. 이 소설집이 그려내는 사랑의 순간들이 표지에 그대로 담겨 있다. 하나의 장면은 때로 충분히 많은 말을 할 수 있다.

사랑의 유해가 잘 수습되어 있는 소설집이라고 느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만나고 또 헤어지는 사람들의 사랑은 꼭 그 자체로 살아있는 생물 같아서, 스스로 살아가지만 끝내 죽음도 겪는다. 그 순간마다의 중요한 ‘장면’을 정영수의 단편 소설은 차분히 그려냈다. 표지의 색처럼 죽은 생물의 피부색을 띠는 창백한 사랑의 유해 앞에서, 사랑의 유해를 수습해 우리에게 ‘장면’으로 돌려준다. 이토록 스러지는 사랑이 무엇일까? 짧은 장면 속에 중요한 질문이 내비친다. 첫 작품을 읽은 J는, 정영수는 참 팔리지 않는 글을 쓰는구나, 라고 말했다. 나는 무슨 말인가 궁금했다. 정영수 정도면 잘 팔리고 읽히는 축에 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다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J는 요새 빠르게 팔리는 것을 궁금해하고, 사람들을 웃기는 방법을 궁금해한다. 그러니 사랑의 실패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이 소설집이 다른 즐거운 것들에 비해 얼마나 팔리겠는가? 그러나 여전히 이런 유의 이야기를 읽으려는 독자들은 남아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소설을 읽는가? 유쾌하지도 않은데.

 

배우 티모시 살라메의 '타임지' 표지와 '듄' 포스터 ⓒ위클리서울/ 타임지, 워너브라더스

소설을 읽는 이유

직접적인 즐거움과 직관적인 희망을 주는 것도 아닌, 인물들이 실패하고 몰락하는 이야기를 구태여 돈 주고 사서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들’의 주인공처럼.

"삶에 실패하는 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뽑으면 거기에는 처참하게 실패한 인물들이 있었다."(p18.)

이 질문은 이미 오래 반복되었을 텐데, 앞으로도 쭉 이어질 것만 같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이 서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건 어딘지 이상한 면이 있으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실패와 몰락을 찾아 읽곤 한다. 서가는 몰락과 실패와 처참과 눈물을 좋아한다. 서가는 끝없이 이어지고, 그곳을 채울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부족하다. 그것은 어쩌면, 실패한 혹은 실패할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또 다른 실패한 혹은 실패할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위로까지는 너무 거창하니, 심심하지 않게 해준다고 해도 좋다. 삶에 지친 ‘우리들’의 주인공이 삶에 실패한 자들이 나오는 소설을 찾아 읽었던 것은, 삶에 실패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이었다. 옆에 또 다른 슬픔이 있으면 분명 덜 심심하다.

이 책의 해설자인 신형철은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소설이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데도, 무언가를 배우게 만든다고. 애초에 가르칠 수 없는, 삶을 슬쩍 알려준다고. 하기야 누가 인생을 가르치겠는가. 정말 한 번 사는데.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얼굴로 분분한데. 그러나 소설은 무너지는 인물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치기도 한다. 다 알지만 애써 모른 채하고 사는, 삶의 구석에 도사리는 버거운 진실들을 내비춘다. 너무 느끼하게 말하지는 말자. 그냥 그게 더 진짜 같다는 것. 박장대소보다 더 진짜 같다는 것. 사는 게 뭐지 싶을 때, 사는 게 이런 거랍니다, 해준다는 것. 독자의 입으로 직접, 사는 게 이런 거구나 직접 말하게 한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되뇌게 만드는 것이 큰 힘을 줄까? 내가 알던 S는 소설을, 특히 '예술'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했다. 현실에도 질력나는 일은 이미 충분하다고, S는 말했다.

 

ⓒ위클리서울/ pixabay.com

소설을 읽을 때는 외롭지 않다

이번 소설집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고 되물었다. 나는 이걸 왜 이렇게 집중해서 읽었지? 다 읽고 나서, “오 사랑인지 인생인지는... 이 소설집의 표지처럼 창백하게 남는구나...” 하며 한숨을 쉬었는데, 그게 좋은 일인가. 최소한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읽으면서 외롭지가 않았다. 꽤 오랜만에 느낀 감각이었다. 무엇인가가 설명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고, 어쩌면 다들 이렇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이어졌고, 그게 두려웠으나 그게 나의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아마도 소설집이 20대 후반 즈음 연애와 결혼 이야기가 주로 다뤄서 혼자 너무 이입했던 결과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랑이 매듭지어지고, 허물어지고, 매듭이 풀리고, 다른 매듭이 겹쳐지고, 하는 과정에 눈을 떼기 힘들었다.

실패했거나, 실패할 연인들의 이야기의 옆이나 앞 혹은 뒤에는 다른 연인 혹은 사람 이야기가 겹쳐 있다. 과거의 연인들, 오늘의 연인들, 내일의 연인들. 오늘의 연인들은 과거의 연인들이 실패한 자리에 누워, 내일의 연인들을 가늠한다. 표제작의 마지막 장면이 영 잊히지 않는다. 어렸을 때 알던 누나의 이혼, 누나가 전 남편과 살던 집이 비워지고, 주인공은 연인과 함께 누나와 전 남편이 누웠던 자리에 똑같이 눕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는 비스듬히 누운 채 아직 잠들지 않았을 지원의 윤곽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그들의 유령들이 아닐까, 생각하면서."(p72.)

소설집이 이 연인들이 왜 만나게 되었는지, 왜 헤어졌는지를 명확히 설명해내려고 하지는 않는다. '사랑의 논리'를 구해내려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의 순간을 건져내려는, 그렇기에 사랑의 죽음마저 덧대어 놓으려는 것 같았다. 독자들은 왜 그 누나가 그렇게 잘해주던 착한 남자를 버리고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지, 왜 이모가 차분하게 안락사를 준비하는지, 어느날 연희가 연락이 되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인지, 조아현이 왜 연락을 끊고 10년 후에 베들레헴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서술자들도 모를 것이다. 모르는 것투성이다. 그런데 원래 다 그렇지 않나. 세상엔 모르는 것투성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이야기할 때에는 자칫 '정직'을 핑계대며 무책임해지기 쉬운데, 정영수의 소설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르는 것'을 안정적이고 차분하게 잘 축조해 놓아, 그 속에서 평안했다. 살아가며 ‘왜’는 알 수 없더라도, ‘어떻게’를 다시 되감으며 지나간 것들을 추려 볼 수 있다고, 소설은 믿는 것 같았다.

책을 읽을 때는 하나도 외롭지 않았고, 책을 덮으니 갑자기 더 외로워졌다. 그래서 나는 다른 책을 빌리러 갔고, 어쩌면 그것이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의 전부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