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국제법 전문가’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1

[위클리서울=최규재 기자] 올해 2월 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미사일로 공습하고 지상군을 투입하는 등 전면 침공을 감행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같은 날 우크라이나 내에서 특별 군사작전을 수행할 것이라는 긴급 선포와 함께 개시됐다. 지난해 10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집중시키면서 고조됐던 양국의 위기는 결국 지금과 같은 파국적 상황에 이르렀다.
러시아는 최근까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와 항복을 촉구하고 있다. 러시아의 움직임에 외국이 간섭할 경우 즉각 보복할 것이라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나토) 등에 경고하기도 했다. 나토의 확장성과 이에 따른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및 영토 활용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 ⓒ위클리서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세계 4대 곡물수출국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경우 유럽으로 향하는 천연가스 대부분을 공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양측의 군사충돌이 전 세계적으로 에너지, 곡물 등 원자재 가격 상승을 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이번 전쟁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과 러시아·중국 등 비서방 간의 신냉전으로 비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전범국 독일이 이번 전쟁으로 분쟁 지역에 무기를 수출하지 않기로 한 금기를 깬 것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다. 군사적 중립국인 스웨덴과 핀란드도 우크라이나에 군사장비와 전투식량 등 군사물자를 지원하고 있다. 나토 가입 역시 적극 검토하고 있어 러시아와 유럽국가와의 갈등의 골은 깊어져 가고 있다. 향후 지정학적 갈등이 증폭되면서 3차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목소리마저 나온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누구의 잘못인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국제법에 적용하면 어떤 논리가 나올까.

“외향적으로는 러시아가 2022년 2월 24일 무력으로 우크라이나를 먼저 침공한 것은 UN헌장 제2조 3항 분쟁의 평화적 해결 원칙 위반, 제2조 4항 무력행사 금지조항 위반으로 국제법을 위반했다. 또 전시중 비무장 순수 민간인을 무차별 살해한 것도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1949년 8월 12일 제네바 제4협약을 위반했다. 사용된 무력이 진공 폭탄 및 집속탄이라는 점에서도 국제인도법상 사용 금지된 무력수단이다.”

국제법 전문가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법학전문대학원)의 지적이다. 이 교수는 “민간인 공격 및 금지된 무력수단 사용 둘 다 모두 국제인도법상 전쟁범죄에 해당된다”며 “2022년 3월 2일 영국을 비롯한 38개국 국제형사재판소(ICC)회원국은 우크라이나 사태를 ICC에 회부했다. 검찰단 소추부도 수사 개시 의사를 이미 밝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무력침공을 하게 된 배경도 깊이 고려해야만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쟁을 법적 문제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견해에서다. 이와 관련해서는 1990년 독일통일시 주동독 소련군 철수조건 이면 계약을 들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및 EU 가입으로 러시아 국경 가까이는 근접하지 않기로 했다는 신사협정이 그것이다.

이 교수는 “러시아 입장에서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동일 슬라브 민족인데 러시아의 턱 밑까지 미국 및 카나다를 포함한 서방 군사동맹국 나토가 러시아 국경에 바로 근접해 들어오는 것은 러시아 안보에 결정적 위협으로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며 “더구나 나토는 냉전이 참예할 때 소련과 사회주의 동맹인 Warsaw 조약기구에 대항해 1949년 창립된 지역 집단안전보장 기구”라고 설명했다.

우크라이나의 지나친 친미 외교정책도 문제였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 교수는 “볼로마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 CIA가 의도적으로 키운 정치인이라는 설도 파다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극우 성향의 인사로서 국민적 지지도는 우크라이나 무력충돌전에 30% 이하였다”며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서 러시아와 무력 충돌로 인해 서방의 강한 지지에 기초해서 국민적 지지를 올리려는 정치적 의도도 짙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국제법을 필두로 한반도 문제,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 문제 등에도 관심을 쏟아왔다. 일제 강점기 억울하게 끌려간 징용 대상자들이 제대로 된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자문 역할을 해왔다.

국제법 전문분야 학회활동 기여로서 2001년 대한국제법학회장, 2003년 세계국제법협회(ILA) 한국본부 회장, 한국 국제법 연감(KYIL) 영문 국제법학술지 편집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ILA 던 본부 ‘무력사용 상임 위원회’ 상임위원을 맡고 있고, 또한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2006년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헤이그 소재) 재판관에 피선되었으며 임기는 2024년까지다. 다음은 이장희 한국외대 명예교수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위클리서울/ 이장희 명예교수 제공

- 수년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에서 명예교수(국제법)로 남으며 퇴직했다. 늘 총장 후보였는데 끝내 총장은 맡지 못했다.

▲ 학교 주요 보직, UN 모의총회 지도교수, 외대학보사 주간, 법과대학 학장, 대외 부총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아 한국외국어대 발전에 나름대로 기여했다. 또 대외적으로 한국외대를 홍보하는데 있어 대외활동을 많이 했다.

 

- 학자로서 생활해온 날을 되돌아보자면.

▲ 분단국가의 국제법학자로서 민족적 시대적 역할에 충실하려고 최선을 다해보려고 했다. 우리 민족의 시대적 과제는 일제식민지 잔재 청산과 70년 장기 분단해소이다. 남북한이 역사정의와 평화공존의 기초하에 국제사회 평화와 인권신장 그리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개도국에 대한 개발협력에 기여하는 일이다. 주지하다시피 한민족의 장기 분단은 1945년 얄타체제에서 미국의 대 일본전에 소련 참전 권유 그리고 1947년 미국 트루만 독트린을 통한 냉전체제 대비 외교정책으로 인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기획분단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1943년 카이로선언 및 1945년 포츠담선언은 조선의 자유 독립과 영토회복을 다시 약속했고, 1945년 9월 2일 일본의 항복문서 서명으로 일본은 카이로선언 및 포츠담선언에 법적 구속력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지키지 않고 있다, 미국은 1952년 샌프란시스코체제에서 식민지와 태평양전쟁의 가장 큰 피해국인 조선과 타이완은 무시했다. 그 결과 일본에 식민지 범죄 및 전쟁범죄에 대한 손해배상 및 처벌에 대한 면죄부를 샌프란시스코 평화체제에서 줘버렸다. 그것이 일제식민지 및 태평양 전쟁범죄를 묵인한 1965년 한일협정체제이다. 이 때문에 한일간 역사분쟁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이다. 특히 90년 이후 탈냉전 이후 전범국가인 독일은 통일됐다. 미소에 의한 기획분단 되고 강제 식민지화된 한반도는 분단 아픔과 일제식민지 고통을 아직도 치르고 있다. 이제 국제사회는 한일식민지잔재청산과 한반도 분단 해소에 협조할 도덕적 법적 의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한중갈등 속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더욱 동아시아에서 모든 국가들을 미국의 국제적 패권유지를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또다시 갈라치기 하고 있다.

 

- 평생 국제법과 한반도 문제에 골몰해왔다. 학문적 성과를 자평하자면.

▲ 분단국가로서 한국은 국제규범에 기초한 평화외교를 통해서 분단을 극복하고, 국제사회에 공헌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 한반도 평화통일,한일관계 그리고 한-미관계에 대한 국제법적 현안문제에 대해서 학문적으로나 시민사회 운동차원에서 전문 서적 집필과 언론에 많은 기고를 했다. 둘째로 대학에서 국제법전문가 및 제자 양성을 위해서 많은 신경을 썼다. 셋째, 한국 관련 이슈를 주로 다루는 국제전문 영문학술지 “Korean Yearbook of InterantionalLaw”(KYIL)의 편집위원장을 맡았다. 이 영문 국제학술지를 통해 독도영유권 및 일본군 성노예 문제 등을 정확하게 국제사회에 보급하기를 희망했다. 국제법과 평화외교의 중요성을 국내적으로 대중화하고, 나아가 국제사회에 한국문제에 대해 왜곡을 바로잡고 정확하게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많이 부족했음을 절감한다. 계몽자 역할로 남길 바란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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