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위클리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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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은 귀양살이 18년, 긴긴 유배기간 동안 참으로 많은 편지를 두 아들에게 보냈습니다. 귀양가던 1801년 말부터 해배되어 돌아온 1818년 가을까지 아들들에게 아버지가 먼저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경우, 기(寄)를 사용해 누구에게 부친다라고 쓰기도 하고, 어떤 경우 시(示)라고 써서 보여준다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했지만, 아들들의 편지에 답장으로 보내는 경우는 ‘답(答) 아무개’라고 표현하여 답장의 편지임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편지의 성격이지만 어떤 경우는 가계(家誡)라고 하여, 누구 누구에게 주는 가훈(家訓) 격인 글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강진의 유배 초기, 날짜가 명기된 짤막한 다산의 한 통 편지는 18년 동안 계속해서 하던 내용이 압축된 글이어서 읽고 또 읽어도 다산이라는 아버지가 두 아들을 생각하는 간절한 뜻이 담겨 있음을 알아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너희들 편지를 받으니 마음이 위로된다. 둘째의 글씨체가 조금 좋아졌고 문리(文理)도 향상되었는데, 나이가 들어가는 덕인지 아니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덕인지 모르겠구나. 부디 자포자기 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서 부지런히 책을 읽는 데 힘쓰거라. 그리고 책의 중요한 내용을 옮겨적거나 책을 짓는 일도 혹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라. 폐족이 되어 글도 못하고 예절에 맞는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보통집안 사람들보다 백 배 열심히 노력해야만 겨우 사람 축에 낄 수 있지 않겠느냐? 내 귀양살이 고생이 몹시 크다만 너희들이 독서에 정진하고 몸가짐을 올바르게 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근심이 없겠다. 큰애는 4월 열흘께 말을 사서 타고 오너라만, 벌써부터 이별할 괴로움이 앞서는구나. (1802년 2월 초이레 : 「答二兒」)

지난해 11월말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시작하고 그 다음해 2월초이니 아들들과 헤어진 지 겨우 3개월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얼마나 보고 싶으면 말을 사서 타고라도 찾아오라고 했겠는가요. 그렇게 찾아오라고 권해놓고도, 만나는 기쁨보다는 헤어지지 않을 수 없는 부자간의 처지를 생각해서, 헤어질 때의 슬픔을 견디기 어려울 것임을 먼저 걱정했으니, 그들의 딱한 처지가 오늘 우리의 가슴에까지 번져서 우리를 슬프게 해줍니다. 이 짤막한 편지에 다산의 바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글씨도 잘 써야 한다, 문리가 트여 글을 보고 글을 짓는 일에 열심히 노력하여 학자가 되어야 한다, 책의 요체를 베끼는 초서(鈔書)와 저서(著書)에 게을리 하지 말아라,, 예의에 맞는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여 폐족이어서 욕먹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일만 열심히 잘 한다면 유배살이 고통 쯤이야 거뜬하게 견딜 수 있다는 간절한 다산의 뜻이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산은 다른 편지에서 폐족이 폐족에서 벗어나는 길이 단 한 가지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독서’ 한가지일 뿐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했습니다. 정학연·학유 두 형제는 아버지의 간절한 바램에 등돌리지 않고 참으로 열심히 독서하고 올바른 행동을 제대로 했습니다. 다산이 세상을 떠난 16년 뒤인 1852년 6월, 마침내 다산 집안은 폐족에서 벗어나 벼슬하는 청족(淸族)의 집안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70세의 정학연에게 임금이 선비들에게 대우해주는 ‘가감역(假監役)’이라는 종9품의 벼슬을 내렸습니다. 폐족에서 벗어나는 기쁨의 순간이 왔습니다. 만나자고 오라고 해놓고도, 만나는 기쁨보다 또다시 헤어질 슬픔에 마음 괴로워하던 다산의 비애는 집안이 청족으로 바뀌면서 한 가닥의 한(恨)을 풀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들에 대한 간절한 아버지의 뜻은 반드시 실현되고 만다는 본보기이기도 합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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