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이제 막 피어나는 당귀꽃
이제 막 피어나는 당귀꽃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마당에 바람이 살살 불 때 당귀 향은 내 안으로 슬며시 저며 든다. 향이 어찌나 깊은지 내 살을 마치 실제로 벌리고 들어오는 것만 같다. 거기 어디에 당귀가 있다는 의식도 미처 못 하고 있던 나는 깜짝 반가운 마음으로 너 여기 있었구나 하고 코를 큼큼거려 본다. 바람이 없을 때는 지나는 길에 살짝 닿기만 해도 당귀는 자신의 존재를 내 안으로 쑥쑥 밀어 넣는다. 손으로 만지기라도 할라치면 바로 이거야 이거라니까, 환호작약이라도 하듯이 요란하게 자신의 향을 내게 떠안긴다.

6월 들어 바람이 많아졌다. 바람이 많아졌구나 싶은 어느 날부터는 아예 태풍 급으로 성장해 버렸다. 창문을 끊임없이 흔들어대고,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뜨려 놓는 바람이 사흘, 나흘, 닷새, 그러고도 아직 끝날 줄을 모른다. 성질도 예사롭지가 않다. 수상하다. 바람이 불면 시원함을 느끼는 게 당연한 이치이건만, 이 바람은 시원이 아니라 더위와 연동돼 있는 것인지 불면 불수록 내 몸에서는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바람 속에서 흘리는 땀이 나를 불쾌하게 한다. 몸이 통째로 짜증 덩어리가 돼버린 것 같다. 그 바람에 나는 당귀를 어르며 그 향을 음미하는 기쁨으로부터 점차 멀어져 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이냐. 세상이 마침내 뒤집어지는 것이냐?

하긴 이미 뒤집어진 것 같기도 하다. 전기요금이 푹푹 오를 거라는 위협적인 뉴스가 횡행하고, 가스도 오르고, 돈을 써야만 살아갈 수 있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온통 오른다는 얘기만 들리고 임금은 떨어질 거라는 얘기가 슬쩍 끼어들고 있는 세상이란 이게 뭐냐. 뒤집어진 게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느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뒤집어졌다는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는 느낌이다. 일단 주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꽃이요 뿌리로 인식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거의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현대 사회에서 주가조작은 중대범죄로 간주된다. 중대범죄 혐의를 강하게 받고 있는 자가 대통령 부인 자격으로 비행기 트랩을 오르고, 그 걸음걸음을 장관이며 차관 등등 국가의 중요 인사들이 손을 흔들어 배웅하고 있을 때 중대범죄 혐의자는 우아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미소 짓는 그녀의 뒤에서, 혹은 위에서 두 팔 두 다리를 마음껏 휘두르는 방식의 춤을 추고 있는 무당의 모습을 나는 보고 있었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잠이 들어서도 보이는 이것은 뭐냐. 5천 년, 아니 어쩌면 9천여 년 전의 풍경인지도 모른다. 낯설다. 매우 많이, 깊이 낯설다. 그렇다고 아주 생경한 것만도 아니어서, 나는 가끔 고개를 끄덕거리곤 한다. 내가 직접 경험하거나 체험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 나를 그나마 안도하게 한다. 이른바 추체험이라고 하는 것, 그 거대한 미지의 세계 속으로 나는 지금 들어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다방면에 걸친 선생님과 이웃 어른들이 들려준 오래 전 이야기들의 조합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선생님과 이웃 어른들은 그 이야기를 어린 시절 누군가에게서 듣고 배웠을 것이다. 나는 각종 형식의 에세이나 그림 따위 희미한 옛 추억으로 남아 있는 문헌들을 통해 선생님과 이웃 어른들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의 신빙성을 확인한 바 있다.

 

 씨앗이 억어갈 때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전문용어로 그것을 고고학 또는 문화인류학이라고 한다지 아마? 그렇다. 나는 한때 고고학 또는 문화인류학에 빠져든 적이 있었다. 아니 뭐 거창하게 굳이 ‘학’을 붙일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예술의 기원과 그 흐름을 알고 싶어 하던 중에 무당을 알았고, 무당의 기원을 파 들어가는 과정에서 세계 각국의 동굴 벽화와 암각화 같은 것들을 구경했고, 그것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전문가들의 언어를 따라가다가 만난 것이 그것, 고고학이라든가 문화인류학 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이 내 안에서 뒤죽박죽으로 엉키고 섞여져갔다. 그리하여 나는 가끔 5천 년이나 9천여 년 전의 인간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느끼곤 했다. 죽음이 무엇인 줄 모르는 까닭에 내 옆에 있던 사람이 쓰러진 채로 썩어가고 있을 때, 썩어서 벌레들이 뜯어먹고 있을 때, 나는 영문을 몰라서 슬피 울기나 하고, 울고 또 울다가 벌떡 일어나서 절망적으로 아무렇게나 몸을 마구 흔들어대기도 했다. 그때의 울음이 세월과 함께 변주를 거듭하며 오늘날의 음악이 되어갔고, 그때의 몸부림이 세월 속에서 변태를 거듭하여 오늘날의 춤이 되어갔다. 이런 정도는 뭐 굳이 문화인류학 분야의 설명을 따르지 않더라도, 두세 시간만 생각을 해보면 그랬을 것 같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저 유명한 현대음악 ‘흑인영가’의 기원을 노예들의 비통한 삶에서 찾을 수 있듯이 말이다.

한 달쯤 전이었다. 그날 갑자기 옛 사람 하나가 떠올라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이십 년도 훨씬 전에 만난 인연이었다. 나에게 무속 관련 사업을 공동으로 해보자고 제안했던 사람이었다. 사업이라 봐야 뭐 궁지에 몰렸거나 슬픔에 빠졌거나 혹은 돈을 왕창 벌고 싶어 안달난 사람의 주머니를 교묘한 방식으로 털어먹는 일이었다.

돈에 관한 흥미를 이미 잃고 있었던 그 무렵의 나는 그 제안이 황당하고 웃겨서 거절한다는 말도 없이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기로 해버렸고, 그는 당시만 해도 시골에 흔해빠진 빈 집 한 채를 빌려서 백색 깃발 하나를 걸어놓고 손님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이후 십 년이 채 안 돼서 그는 읍내 가까운 곳에 요란한 규모의 기와집과 일주문을 세우고 대한불교 ‘00宗’이라는 이름의 절 간판을 달았다는 얘기가 들렸다. 그때는 뭐 그런가보다 하고 흘려듣고 말았지만, 사방 도처에서 무당의 옷자락 끄는 소리가 느껴지는 세상이 되고 보니 어쨌든 한 번 만나보자 하는 생각으로 집을 나섰다.

“아이고 이거, 이거, 매촌 거사님?”

요란하게 컹컹 짖어대는 개 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웅전 현판이 붙어 있는 건물 안에서 밖으로 고개를 삐죽 내민 그가 나를 금방 알아보고 뛰쳐나왔다. 나 자신은 까맣게 잊고 있던 매촌이란 고유명사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나는 갑자기 그가 친근해져 버렸다. 매촌이란 유소년 시절 서당에 다닐 때 훈장이 내게 지어준 아호랄까 뭐 이를테면 장식품 같은 것이었다.

“아 또 그러니까, 아까 하던 말이 뭐였지? 아 그렇지. 사람이 법을 무서워해서는 안 된다 이거였지. 법이란 사람의 필요에 의해 사람이 만든 것이란 말이거든. 그러므로 법은 무서워해야 할 게 아니라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거야. 요새는 그 뭐냐 케이라는 거 있잖아. 영어로 k 말이야. 이게 지금 막 유행을 타기 시작한 거란 말이거든.”

 

이 모든 것이 한 뿌리에서
이 모든 것이 한 뿌리에서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의례적인 인사치레를 수다스런 언어로 끝낸 뒤의 그는 자리에 앉는 순간 엄격한 스님의 포즈를 취하기 시작했다. 손님이랄까 신도랄까, 아무튼 화사한 매무새의 여인들을 상대로 그는 아마 소위 법문을 하고 있었던가 보았다. 중년 여인 세 명이 나란히도 아니고 살짝 타원형으로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사뭇 진지했다.

너무나 진지하게 심각한 표정인 것이 내가 끼여 있을 만한 자리는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밖으로 나와서 연못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그녀들이 돌아간 뒤에 뭐가 그렇게도 진지한 것이냐고 슬쩍 한 번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너도 내 말을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는 듯 그놈의 범문을 내게도 들려주기 시작했다.

“이야 참, 세상이 확실히 뒤집어지기는 뒤집어졌구나. 그런 농담을 그렇게도 진지하게 할 수도 있다니.”

몇 마디 듣다 말고 나는 박장대소를 하고 말았다. 그러자 그는 그 무슨 빌어도 못 먹을 반응이냐는 투로 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매촌 거사는 그래서 탈인 거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에 맞는 쪽으로 코드를 바꿀 줄도 알아야지 말이야. 생각해 보라고. 대체 자본주의란 게 뭐야. 어렵지 않아요. 간단해. 돈이면 다 된다. 돈이라면 못 할 게 없다. 이게 포인트란 말이거든.”

그는 엄격하게 진지했다. 바위 같고, 강철 같았다. 내 생각을 들이밀 틈은 아무래도 없어 보여서 그냥 그의 말을 듣고나 있기로 했다. 건성건성 대충 들어보니 아까의 세 여인들은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던 중에 그를 찾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반짝이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그녀들에게 주었다는 얘기였다.

절대로 들키지 않고, 들켰다 해도 강고한 배짱과 세심한 법률상식으로 버티면 들키지 않음과 같은 효과를 내는, 이런 신묘한 사기 기술을 ‘k경제’라는 이름으로 브랜드화해서 널리 보급하는, 다만 옵션으로 반드시 붙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당이라는 것, 그러니까 무당의 감언이설과 섬세한 법률 지식을 접목하는 방식의 경제연구소 같은 것을 차려서 교육 사업을 벌인다면 향후 십 년간은 돈이 스스로 알아서 저절로 그냥 술술 들어올 거라는 그런 조언을 했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도 너무 없는 궤변임이 분명했지만, 뒤집어진 세상에서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바야흐로 잔머리 굴리기의 대마왕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겠구나 하는 생각을 머릿속에 가득 채운 채 돌아오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마당을 어지럽게 서성거리는 참인데 당귀 향이 살살 콧속을 후비고 들어왔다. 당귀, 이 녀석들은 이른 봄 새싹을 내미는 순간부터 향을 뿌리기 시작해서 늦가을 서리가 내릴 때까지 간다. 뿌리를 캐내면 거기에서 또 향이 나는데 비위가 약한 사람은 헛구역질을 해야만 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리고 이 녀석들은 엄청나게 많은 씨앗을 생산해 낸다. 한 송이의 꽃이 피고 시들어 가면 또 한 송이가 피고, 또 피고, 또 피는 방식으로 계속 꽃을 피워낸다. 먼저 핀 꽃송이에서 씨앗이 익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뭐랄까, 좀 징그럽다는 느낌이 있다. 어찌나 많은 씨앗이 한 송이에 붙어 있는지, 한참을 보고 있으면 그 무슨 작은 생명체가 구물거리는 것만 같아서 으,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것은 뭐랄까, 곡물을 파먹어 들어가는 바구미 같기도 하고, 원숭이를 괴롭히는 이 같기도 하고, 벼룩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사기와 거짓에 능한 인간들의 잔머리 굴리기를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만개한 당귀꽃
만개한 당귀꽃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잔머리 굴리기에 능한 사람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징그럽다. 종교 전문가들은 징그러움 유무를 기준으로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구분한다. 인류 전체와 세계 평화를 중심으로 고민하는 기도 집단에서 징그러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고등종교로 분류한다. 반면 자기 자신의 복락만을 중심으로 고민하는 집단의 행태는 징그럽다. 그러므로 하등종교로 본다.

무당과 무당을 찾는 사람은 대체로 개인의 복락에 집중한다. 국가가, 세계가, 우주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내가, 우리가, 우리 집단이 잘먹고 잘살면 만사 오케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분쟁과 무고한 살육이 자연 성행하게 된다. 그래서 일찍이 예수와 석가모니는 그렇게도 열성적으로 무당을 몰아내고자 했던 것일 게다.

무당은 죽음과 불행의 원인을 몰랐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위로의 효능이 있었겠지만, 수천 년 전에 죽은 자의 신분까지도 밝혀내는 현대라는 이름의 사회에서는 한낱 굿거리일 뿐이다. 그런 정도의 선에서 존재하는 게 맞다. 무엇보다 무당은 전체를 보는 눈이 없다. 그들은 부분에 집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당 세력들이 정치를 넘본다면? 대한민국은 당분간 부족국가 시대로 들어가고야 말 것이다.

새로 취임한 대통령 윤석열은 아무리 좋게 보고자 해도 부족장 스타일로 여겨진다. 그는 일단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하다는 인상을 유감없이 보여주어 왔고, 보여주고 있다. 전체를 조망하기보다 부분에 집착하는 인사를 강행하고 있고, 능력이 의문스럽다 해도 내가 아는 사람이니까, 혹은 내가 아는 사람이 천거했으니 잘 할 거라는 믿음으로 충만해 있다.

경고 하나가 생각난다. 정치를 외면한 대가는 가장 저질스런 자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던가. 그러고 보니 그랬던가 보다. 이천사백여 년 전에도 정치는 내가 관심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마음 아파한 사람들이 많았던가 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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