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싱어송라이터 배영경 인터뷰-2

[위클리서울=우정호 기자] 

<1부에서 이어집니다.>

싱어송라이터’. 적어도 국내에서 이 단어는 ‘어쿠스틱 기타 반주에 목소리를 감미롭게 올린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포크’라는 장르와 맞물려 사실상 특정한 장르를 지칭하는 단어로 변모하고 있는 이 음악의 특성상, 기타는 목소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반주의 기능이 우선시된다. 록밴드 기타리스트들이 내뿜는 화려한 기타 테크닉이나 유니크한 기타 톤이 이 장르에서 중요하지는 않다. 

배영경 2집 ‘푸른 너’에서 역시 화려한 기타 테크닉이나 곡을 뚫을 정도의 기타 솔로 플레이를 들을 수는 없다. 비록, 배영경이 대부분의 음악 인생을 록 밴드 기타리스트로 살아왔을지라도.

싱어송라이터 배영경 ⓒ위클리서울/ 배영경 제공

기타리스트 배영경

“곡의 전체 완성도에 초점을 맞추면 기타 솔로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요. 2집 앨범 통틀어 5번 트랙 ‘언젠가 나에게 사랑이 온다면’과 8번 트랙 ‘우리’ 두 곡에 기타 솔로라고 할 만한 부분이 있겠네요. 그나마도 5번 트랙은 곡 자체가 컨트리라 장르적 특성을 나타내게 하려는 의도로 짧게 들어갔죠. 요즘 식 기타라기보단 ‘버디 가이’나 ‘비비 킹’ 같은 뮤지션의 느낌을 생각했고. 8번 트랙에서도 기타의 존재감을 드러낸다기보다는 공간을 채울 목적으로, 스트링으로 대체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사실상 기타 솔로가 아닌 거죠.”

“내가 기타 치는 사람이라고 티 낼 이유 같은 건 없고, 딱 들어갈 것만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푸른 너’에서 갑자기 ‘스티비 레이 본’ 처럼 화려하게 친다고 생각하면 너무 이상하잖아요. 이제는 사운드를 구성함에 있어서 넣는 것보다 빼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글스’ 조차도 사운드를 쪼개서 분석해 보면 녹음 과정에서 그렇게 많은 트랙을 쌓지는 않았어요.”

배영경은 ‘싱어송라이터’라는 단어가 가진 흔한 이미지를 한참 초월한 세련된 송라이팅 능력을 가졌다. 그의 음악 세계는 어디서부터 시작해, 얼마나 넓은 레인지에 걸쳐 있는 걸까.

“어려서부터 중학교 때까지는 피아노를 좀 오래 쳤어요. 어머니는 ‘음악이 그렇게 좋으면 예고 입시를 준비해 봐라’ 하실 정도였어요. 중학교 1학년쯤 ‘올 포 원’이나 ‘보이즈 투 멘’ 같은 알앤비 그룹들을 듣게 됐는데, 노래가 너무 세련된 거예요. 해외 음악에 관심 갖고 뮤지션들 찾아 듣기 시작했죠. 가요와는 또 다른 세상이었으니까. 그러면서 ‘비틀즈’ 찾아 듣고, 기타 사운드가 중심인 90년대 팝을 들으면서 ‘본 조비’를 접하고 막연히 기타가 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도어즈’를 듣고 나서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 마음이 움직였죠.”

“중3 겨울에 기회가 왔어요. 아버지가 건설회사에서 일하고 계셨는데, 회사 모임에서 앞에 나가 노래 부르면 기타를 사주신다고 하셨어요. 중학교 3학년이면 어디 시켜서 노래하고 그런 게 내키지 않는 나이인데 너무 기타를 가지고 싶어서 해버렸어요. 그러고 나서 처음 아버지가 낙원상가에서 사주신 야마하 기타를 칠 수 있었어요.”

“엄마도 워낙 음악을 좋아하시고 산타나의 팬이면서 이글스도 좋아하셨어요. 90년대 중반 이글스가 재결성했고 라이브 실황이 담긴 영상을 봤어요. 그야말로 신세계였죠. 어떻게 사람들이 저렇게 일렉트릭 기타도, 나일론 기타도, 12현 기타도 잘 치고, 코러스도 서로 너무 완벽하게 잘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는 결심했어요. ‘아, 음악 해야겠다’.”

얼마 전 이태원에 있는 어느 LP 바에서 배영경이 선곡한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가 흘러나올 때, 그의 눈이 몸을 말고 창가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아련한 눈빛처럼 바뀌었다. 신청곡을 적으라는 그의 말에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Heroin'을 썼을 때, 그의 동공은 확장됐다.

“대치동에 있는 단대부고를 들어갔는데 ‘각시탈’이라는 학교 밴드부가 전통이 있고 유명했어요. 옆에 오디션 준비하는 애들은 메탈리카 솔로 치고 있는데 나는 중3 겨울에 기타를 치기 시작했으니 막 C 코드, D 코드 잡고 있었어요. 당연히 오디션 볼 실력이 안 돼서 아예 친구랑 새 밴드를 만들어버렸죠.”

“당시 실용음악을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게 아현직업학교(아현산업정보학교)에 처음 생겼어요. 여기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서울 각 지역의 ‘음악 좀 한다’는 애들을 알게 됐어요. ‘청량리 쪽에서 기타 좀 치는 사람이 있다’고 듣고 가서 본 친구는 지금 ‘개미’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집시 기타리스트 박주원이었고, 송파 쪽에서 특이한 식으로 잼을 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가보면 그 밴드가 지금의 ‘넬’이었고. 얼마 지나서 그 친구들이 홍대 ‘프리버드’에서 공연한다길래 막 태동하기 시작한 홍대 인디 씬에 처음 가봤어요. 생각보다 연주 수준들이 높지는 않았고, 조금 실망한 채로 저는 이태원으로 향했어요.”

”이태원에도 클럽들이 있었는데 유명한 록밴드의 카피밴드 공연 위주였어요. ‘저스트 블루스’라는 클럽에서 ‘블루스에 온몸을 사르겠다’ 하면서 거기서 거의 살다시피 했죠. 그러다 저스트 블루스 사장님이 술로 인한 지병으로 돌아가시는 걸 보고 이게 ‘저스트 블루스’구나. 블루스 하는 사람들은 헤어나지 못할 만큼 저기에 완전 빠져서 살아야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마음의 변화가 좀 생겼고 학교라도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 실용음악과 들어가고, 군악대 가고 했죠.“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이 아닌 대중음악. 그중에서도 특히 록 음악 뮤지션의 대부분 레퍼토리는 ”집안의 반대를 뚫고 음악에 매진해 음악적 성공을 이뤘다“거나 “집안의 반대에도 투잡 뛰어가며 열심히 했지만 결국 그만뒀다. 엄마 말 잘 들을 걸 그랬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 배영경에겐 그런 스토리가 등장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반대하셨죠. 학구열이 높은 분이셨고, 순전히 자식 교육을 위해 개포동, 대치동으로 이사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건설회사 플랜트 부문에서 일하셨는데 해외 파견 수당이 높으니까 일부러 자원해서 외국을 다니시면서 강남의 높은 사교육비를 부담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기타 치러 온 서울을 누비고 다니니까 어느 날 아버지가 물으시더라고요. ‘너 공부 안 할 거야?’, ‘저 음악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넌 끝이다’.”

“정확하신 성격의 아버지는 말 그대로 ‘끝’이 뭔지 보여주셨어요. 아버지로부터 오는 지원이 전부 다 끊겼고 그 이후로 학비나 생활비 한번 받은 적이 없어요. 군악대로 입대했을 때 백일휴가를 나왔다 부산으로 복귀해야 하는데 무료로 탈 수 있는 군인 열차를 탈 수 없게 된 상황이었어요. 당시 어머니도 사업하고 계셨지만 그 즈음 해외에 여행을 가셨고, 궁여지책으로 아버지께 연락드렸죠. ‘아버지 차비가 없어서 그러는데 3만 원만 빌려 주시면 안 될까요.’, ‘너 왜 나한테 그러냐?’ 하시는데, ‘아, 맞네요.’하고 끊었죠.”

“정신이 확 들었어요. 내가 왜 그랬지. 그렇게 정리가 되니까 ‘아, 내가 음악으로 돈을 벌어야 되는구나’ 명확하게 생각이 들었어요. 제대하고 나서 기타 쳐서 돈 벌 수 있는 건 전부 다 했어요. 뽀빠이 이상용 선생님 악단에서 기타 치면서 항구란 항구는 다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걸로 학교 등록금을 다 갚았죠. 그리고 2005년쯤부터 뮤지컬에 백 밴드가 같이하는 포맷이 시작됐거든요. 학교 교수님 제의로 그 일을 시작하면서 공연팀과 3년 동안 전국을 또 돌고,”

배영경은 평생을 음악으로만 돈을 벌었다. 90%가 투잡을 뛰는 인디 뮤지션 같은 길은 아예 그의 인생 옵션에 없었다. 그는 “음악과 관련되지 않은 아르바이트나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죠. 어떻게든 이걸로 살아남았어야 했어요. 결과적으로 아버지의 지원이 끊긴 건 저를 치열하게 만들었어요”라고 했다.

 

싱어송라이터 배영경 ⓒ위클리서울/ 배영경 제공
싱어송라이터 배영경 ⓒ위클리서울/ 배영경 제공

‘들국화’ 재결성 연주, 그리고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수상

“연주자로 활동하면서는 2012년 ‘들국화’ 재결성 할 때 기타 연주로 함께 활동하면서 음악을 대하는 태도를 많이 배웠어요. 어느 날은 제주도의 어떤 한식집에서 공연하게 됐어요. 공연장이 아니라 그야말로 백반집 마당이었어요. 장비도 급조된 거라 드럼은 ‘챙!’하는 심벌 소리가 아니라 ‘책!’하고, 드럼 베이스는 ‘쿵쿵’이 아니라 ‘쿡쿡’하고 없어지는 소리가 났고. 베이스 앰프도 없어서 80년대 피베이 기타 앰프에 물려서 하고. 인권이 형님 목소리만 무슨 노래방 앰프 같은데 연결을 하고. ‘이건 어떻게 공연을 하냐’. 이러고 걱정하면서 준비했죠.”

“그 열악한 상황인데 막상 무대 시작되니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고. 전인권, 주찬권, 최성원 형님은 딴딴하게 뭉쳐있었어요. 세분은 코러스도 진짜 기가 막히게 밸런스가 잡혔고, 사운드가 딱 하나가 돼서 나가더라고요. ‘밴드의 합이라는 게 아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게 무료공연이었는데 어림잡아 백반집 앞에 사람이 300명이 모여서 바글바글 했어요. ‘밴드가 내놓는 메세지라는 게 이런 열악한 공연도 록페스티벌로 만드는 거구나’. 음악을 대하는 시각이 많이 달라지게 됐어요.”

들국화 재결성 공연 이후 배영경은 ‘기인’으로 불리는 뮤지션 전인권과 커리어를 더 이어나갔다.

“전인권 밴드 공연 앞두고 70년대 영국 하드록 밴드 ‘배드 컴퍼니’의 ‘The Way I Choose’라는 곡을 연습했어요. 악기 파트 멤버들이 음원사이트에서 그 곡을 듣고 카피해왔죠. 우리가 연습한 템포가 예를 들어 98bpm이라고 치면, 인권이 형이 ‘이 템포가 아닌데...’ 합주하는 세 시간 내내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드러머한테도 확인해 봤는데 메트로놈 찍어서 땄으니까 우리가 틀리지 않았죠. 합주 끝나고 다 함께 연남동의 어느 음식점에 갔는데 그때까지도 ‘그 템포 아닌데...’ 계속 그러시는 거예요.”

“마침 근처 엘피샵에서 배드 컴퍼니 음반을 사서 바로 틀어봤죠. 인권이 형이 말씀하신 템포가 맞는 거예요. 스트리밍 음원과 엘피 음원의 템포 차이가 정확히 1bm이었는데... 그걸 기가 막히게 차이를 아시는 걸 보고 소름이 돋았어요. 겉으로 보면 유유하실 거 같은데 정말 병적일 정도로 예민하셔요. 마지막으로 요양원에서 나오셨을 즈음이었는데, 술도 안 마시고 노래연습을 엄청 하셨어요. 지방 공연 가면 아침 여섯시부터 일어나서 혼자 목 푸는 연습하시고. 대단한 사람이구나.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었어요. 이 어마어마한 집착이 그를 만든 거구나.”

그럼에도 세션 기타리스트는 ‘내 음악’을 하는 파트가 아니다. 정해진 구성과 악기 파트 간 약속에 따라 정확히 소리를 내는 것이 그들의 존재 가치이자 역할이다. 배영경은 자기의 언어로 말하고 그의 소리를 내고 싶어졌다.

“기타리스트로 살다가 내 음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 나갔어요. 그 경연대회를 삼수를 했죠. 앞선 두 번 다 2차에서 떨어졌는데, 세 번의 경연 대회 참가 동안 각각 다른 곡으로 나갔어요. 저도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출신 뮤지션들 음악에 영향을 받았으니까 첫 번째 두 번째에선 경연에선 그 누군가와 비슷한 음악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세 번째에선 아예 구성을 달리했죠. 어쿠스틱 기타에 나 혼자 부른 노래였고, 입상했어요.”

“삼수를 해서 입상을 한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일련의 과정들이 나를 풍족하게 했어요. 내 얘기를 하는 데 집중하게 한 소중한 시간들이었고. 내 얘기를 하려면 그리기 이전에 내 도화지가 필요한 거고. 밑 그림을 그리거나 색을 칠하는 것도 그다음이잖아요. 이걸 깨닫게 된 게 좋았죠.”

유재하음악경연대회 입상 후 배영경은 대형 연예 기획사에서 다년간 작곡과 프로듀싱을 담당하다 대치동에서 기타 교습소를 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싱어송라이터 '로이킴'이 배영경을 찾아와 기타를 배웠다. 로이킴의 슈퍼스타 K 입상 후에도 그들의 우정이 이어졌다.

2018년, 자양동으로 옮긴 그의 기타 교습소를 두고 배영경은 “기타 교습소가 나에게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상상도 못하게 소중한 공간이에요. 무엇보다 ‘내 음악’을 위한 공간이고.”

한편, ‘가장 보통의 존재’와 같은 단어와는 한 글자도 닿아있지 않은 그는 이번 앨범에 ‘특별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감상을 넣었다고 했다. ‘평범함’을 죄악으로 여기면서도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라고 반어법으로 말하는 오스카 와일드적 화법일까.

“좀 더 어렸을 땐, 내 음악은 되게 특별하고, 내 존재 자체, 내가 표현하는 건 전부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사실, 세상을 살아가는 각자의 행위 자체가 전부 특별한 거고, 이 세상에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근데 나만 혼자 특별한 척하면 이게 맞나?’ 이런 자각들이 이번 앨범에 담겼어요. 그 순간, ‘내가 뭐 그렇게 자꾸 거창하게 표현해야 하나’ 하면서 툭툭 털어낼 수 있었어요. 그걸 완전히 벗겨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 나름대로. 3집에서는 더 털어낸 채로 느낀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겠죠.”

배영경에게서 초연과 초월을 감지했다. 거창하지 않은, 소탈한 언어로 펼쳐 보일 그 세계의 테두리 선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만 그의 ‘특별론’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싱어송라이터’라는 타이틀을 가진 뮤지션 중 ‘썸띵 엘스(Somethin' Else)’니까. 전설적인 로큰롤러 에디 코크란의 곡 제목처럼.

한편, 배영경은 8월 19일 금요일 마포구 서교동 벨로주 홍대에서 첫 단독 공연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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