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이스탄불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이스탄불의 손흥민

초등학교 때부터 축구는 내게 난처한 스포츠였다. 특별히 운동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았던 어린 시절의 내게, 공 하나 던져주고 축구나 하고 있으라는 체육 시간은 언제나 고역이었다. 운동을 잘 하는 남자 애들은 매번 공격수를 하고 싶어했고, 운동에 취미가 없는 애들은 멀뚱히 서있는 수비수 역할을 하다가 욕을 먹기 일쑤였다. 지금은 운동을 즐기는 편이 되었지만 여전히 발로 하는 운동은 못 하는 내게, 어린 시절 경험한 축구는 그야말로 실패만을 경험해야하는 스포츠였다. 오프사이드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상대편 골키퍼와 이야기하러 갔다가 운 좋게 바로 앞에 굴러온 공을 골대로 밀어 놓은 게 내가 경험한 유일한 골이다. 나는 주로 땡볕의 벤치에서 멍하게 체육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애였다. 모두의 관심이 축구에 쏠리는 월드컵 시즌을 제외하면 축구에 관심을 쓴 적은 거의 없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남들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축구를 조금이나마 알게된 것은 모조리 손흥민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에 그는 어느 순간 영국 프리미어리그를 휘젓는 공격수가 되어 있었다. 밝게 웃으며 매번 중요한 골을 넣는 그의 모습은 당연히도 멋져 보였고, 내가 축구를 들여다보게 된 유일한 이유가 되었다. 그를 칭송하는 사람들의 무리에서 함께 호들갑을 떨다 보면 기분이 좋았다. 여행을 하다가 축구를 좋아하는 외국인들을 만나면 괜히, ‘두 유 노 손흥민?’ 물으며 대화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국위선양의 감정까지는 아니었지만 아시아인이, 한국인이 그렇게 축구를 잘 해낼 수 있다는 걸 나의 일인 듯 자랑스러워했다. 누군가를 응원하는 마음이 삶에 큰 활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손흥민을 응원하면서 다시 알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내가 이스탄불에서 머물었던 일주일의 마지막 즈음, 손흥민의 경기가 있었다. 유럽의 리그에서 가장 잘 하는 팀들만 모아 경쟁하는 챔피언스 리그에 손흥민의 팀이 결승에 올랐다. 내가 유럽 현지 시간에 맞춰서 진행하는 경기를 보려고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기 때문에, 한국에 있었다면 직접 보았을 리 없는 경기였다. 이스탄불에 있으니 안 보기 힘든 시간에 경기가 열렸다. 밤 9시쯤인가 경기가 시작된다고 했고, 모두의 관심이 이 경기에 쏠려 있었다. 이스탄불의 번화가에 빼곡히 들어찬 펍들에서 축구 경기가 실시간으로 방송되었고, 여름밤의 반팔을 입은 사람들은 신이 나서 밤 거리를 돌아다녔다. 술에 엄격한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국제 도시 같은 이스탄불은 술에 관대했다. 이스탄불의 밤거리는 언제나 북적거리고 활력이 넘쳤다. 아이리쉬 펍에서 사람들이 맥주를 들이켜고 길거리에서 물담배를 하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사람들의 활력 사이로 사기꾼과 호객꾼과 취객들이 적당히 섞여 들었다.

 

ⓒ위클리서울/ 김현수 객원기자

혼자 펍에서 축구를 보기에는 머쓱해서, 오픈 채팅방에서 만난 한국인들 셋과 어느 펍에 들어가서 손흥민의 경기를 보았다. 들썩이는 기분에 나는 월드컵이라도 보는 양 소리를 지르며 축구를 보았다. 그때 만난 사람들의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방금 큰 사기를 당할 뻔했다면서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파키스탄에서 일하는 한국인 형과, 하얀 얼굴로 어딘지 비스듬하게 앉아 있던 대학생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과 나는 여행자들이 나눌 법한 흔한 대화를 나눈 뒤 축구만 열심히 보았다. 축구 유니폼을 챙겨 입은 외국인들 사이에서, 시끄러운 노래가 흘러나오는 이스탄불의 밤을 보냈다. 그날 밤 손흥민의 팀은 승리하지 못했고 나는 혼자 숙소로 돌아와 그때 만났던 사람들을 거의 잊었지만, 그날 밤의 열기와 흥분은 이스탄불에 대한 기억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라마단

손흥민의 경기가 있던 그날 밤도 라마단 기간이었다. 이슬람교에서는 일 년에 한 달, 해가 떠 있을 때는 물을 제외하고는 밥을 먹지 않는 라마단 기간이 있다. 떠들썩한 그날 밤 즈음은 라마단 기간이 끝나는 기간에 걸쳐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비교적 자유분방하게 살아가는 이스탄불에서 라마단을 엄격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많지 않아 보였다. 온갖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국제 도시였기에, 낮에도 사람들은 편하게 먹고 마셔서 여행하면서 라마단이라 불편한 적은 거의 없었다. 다만 당연하게도 라마단을 엄격하게 지키거나, 나름 신경을 쓰는 현지인들도 꽤 많은 모양이었다. 밤마다 밥을 먹으라고 사람들을 깨우고 다니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명목상 라마단 기간에는 해가 떠 있을 때만 밥을 먹지 않으면 되기에, 라마단을 지키는 사람들은 밤에 밥을 먹는다. 해가 진 저녁에도 먹고, 해가 뜨기 전에도 먹는다. 하루에 한 끼만 먹고 한 달 동안 일상 생활을 하기는 당연히 어려울 것이므로, 새벽에도 한 끼를 더 먹는다. 그래서 라마단 기간의 밤에는, 해가 뜨기 전에 어서 밥을 챙겨 먹으라고 북을 쳐서 사람들을 깨우는 북치기들이 돌아다닌다. 이스탄불 밤거리를 메우고 있던 술집에 취객들이 숙소로 돌아간 새벽을 지나, 더 늦은 새벽이 되면 사람들을 깨우는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밤 새워서 술 먹고 첫 차를 타는 사람과 새벽에 일하러 첫 차를 타는 사람들이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것처럼, 밤을 새워 술을 먹은 여행자들과 라마단을 지키는 북치기들은 새벽의 거리에서 마주쳤다. 이스탄불의 밤에는 그 둘의 소리가 섞여 웅웅거렸다. 시끄러운 북소리와 취객들의 고성방가를 들으며 내 몫의 침대에서 향신료 냄새를 맡으면서 잤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내가 이스탄불을 떠나기 직전에 라마단은 끝이 났다. 한달 간의 라마단이 끝나는 저녁에는 큰 축제가 있었다. 번화가에 무대가 세워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고, 다들 나와서 편하게 밥을 먹었다. 이스탄불 하면 생각나는 거대한 블루 모스크에 가면 공짜로 밥을 준다고 해서 슬쩍 가보았지만, 이미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저 신이 난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잔디밭에서 도시락을 먹는 가족들을 구경했다. 어이없게도 나를 스페인 사람으로 착각한 쿠르드인과 카페트 이야기를 하고, 인터넷에서 숱하게 읽어왔던 똑같은 사기 수법을 시도하는 사기꾼들을 두 번 만났다. 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낚시를 하는 사람들과, 나를 붙잡는 호객꾼들을 지나 트램을 타고 돌아올 때에 여전히 사람들은 음식점과 술집에서 시끄럽게 놀고 있었다. 사람들의 열기가, 뜨거운 여름 낮의 열기가 차분하게 잦아드는 이스탄불의 밤을 채웠다. 밝게 웃고 떠드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사이로 이스탄불의 숱한 밤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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