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 최승자, 난다, 2021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최승자
나는 꽤 오래전에 최승자의 이름을 알게 되었지만, 그의 책을 읽지 않고서도 이미 그 이름의 기운에 압도되어 있던 것 같다. 그는 처절한 허무로 유명한 시인이었다. 사람들은 최승자를 언급할 때면 대개 죽음과 불안과 공포를 묶어 말했다. 그가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하고 있다는 것도 무슨 풍문처럼 같이 들려왔다. 고통 속에 빠져 거의 질식할 것 같은, 처절한 날 것의 시가 주는 울림 때문에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걸까? 궁금해하면서도 막상 찾아 읽지는 않았다.
아마도 최승자라는 이름의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어딘가 피하고 싶었다. 해골 같은 눈으로, 꼭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눈으로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을 것 같았고 당장 그런 말들은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예전에 발간되었던 최승자의 산문집이 새로 개정되어 나온 것을 보았다. 시보다 말을 먼저 읽어 보자는 마음으로 서점에서 사들고 온 이 책에는 무슨 해골의 얼굴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인간 최승자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었다. 죽음이 촉발한 무거운 마음을 그저 무겁게만 이야기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고, 이따금씩 툭툭 던지는 농담 속에서 삶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최승자의 문장들이 있었다. 역시 사람도 글도 만나봐야 더 알 수 있다.
오래전 이미 출간되었던 이 산문집에는 막 30대를 지난 시인의 1980년대 이야기가 담겼다. 시로 쓰이지 않은, 삶 주변의 작은 이야기들. 죽음을 한참 응시하다가 잠시 빠져나왔을 때 둘러본 그 주변. 그곳에는 삶이 있고 유년이 있고 기억이 있고 소망이 있고 즐거움이 있다. 한참 시를 쓰다가 30대를 지난 1980년 대의 시인이, 지난날을 물끄러미 돌아본다. 농담도 하고, 자신을 알고, 어머니의 죽음에서 죽음이 답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고, 제주도에 살고도 싶어 하고, 좋은 책들도 읽고. 그렇게 한 시절을 돌아보았던 시인의 산문이 30년을 넘는 시간을 지나 다시 돌아왔다. 지난 삶을 돌아보았던 지난 글이 다시 돌아온 것. 개정되며 덧붙여진 글은 많이 없지만, ‘시인의 말’이 덧붙었다.
“오래 묵혀두었던 산문집을 출판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30대 시절 써놓은 대로, 죽지 않고 다시 돌아와 책을 다시 펴낸 시인의 말을 읽으며 나는 이상한 안도감을 느꼈다.
확실한 불행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이 그 마음을 해소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혹은 불안하고 우울한 사람은 어디에서 위안을 얻나. 우리는 보통 위로할 때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그건 너의 생각일 뿐이야. 그러나 이렇게 말해도 전혀 해소 되지 않는 불안이 있다. 때로 어떤 불안은, 내가 불안해하고 우울해하는 '어떤 것'이 나의 착각이나 오해가 아니라 분명히 거기에 있음을 보증받을 때 해소되기도 한다. 누군가 오히려, 그래 네가 불안해하는 것이 정말 불안해 마땅한 것이야, 그것은 진짜야, 너의 착각이 아니야, 할 때 해소된다.
불확실한 행복과 확실한 불행 중에 더 나은 것은 무엇인가? 때로 마음을 한결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이상하게도 '확실한 불행'이다. 긴가민가하게 언제 찾아올지 떠나갈지 알 수 없는 행복보다 전모가 뚜렷한 불행이 덜 불안하기도 하다는 말이다. 비관주의는 때로 편안한 이유다.
불안한 인간에게 가장 확실한 불행은 무엇인가. 죽음이다. 죽음이 과연 불행인가에 대한 논의는 잠시 덮어두자. 인간은 이미 태어나 있는 존재다. 탄생과 죽음이 삶에 가장 거대한 축일 때, 나의 삶에서 가장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재)탄생이 아니라 죽음이다. 그 확실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삶을 굴려나갈 수 있다. 물론 그런 방식으로 굴러 가는 삶이 순탄하기 쉬울 리 없다. 확실함을 얻고 불행을 굴린다. 죽음이 촉발하는 불안과 공포와 우울을 떠안는다. 누군가는 잊고 사는 인간 삶의 중대한 조건 중 하나인 '죽음'을 그 자체로 껴안아 버린 사람. 나는 그런 사람들을 몇몇 보아 왔다.
최승자의 젊은 날들이 바로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청춘과 젊음을 이제 막 뿌리내리는 삶이 어설픈 토양 위에서 흔들리는 시간이라고 한다면 그때만큼 죽음에 이끌리는 때도 없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평생 청춘과 젊음을 보내기도 한다. 또 그중 어떤 이들은 청춘과 젊음을 앓는 방식으로 평생을 살기도 한다. 몇몇 좋은 작가들도 그랬다. 그들은 앓으면서 좋은 글을 써냈고 사람들은 그들이 써놓은 글을 읽고 안에 맺힌 것을 대신 풀었다. 밑줄을 그으며 공감하면서. 그러나 작가 본인에게는 어땠을지. 그렇게 살다가 여러 방식으로 사그러든 작가들 많다. 언제 죽어도 요절일 것 같은 작가들.
90년대를 지나 최승자는 신비주의 공부를 시작하다가, 정신분열증 증세를 앓으며 정신병원을 드나들게 된다. 그때의 정황도 후반부에 조금 나와있다. 그가 더 이상 죽음에서 찾지 않은 어떤 기대를 신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닌지. 삶을 가능케 하는 어떤 신비를 향해 가고 싶었겠으나 병을 얻은 시인의 날들이 안쓰럽다. 2013년에 쓰인 마지막 글의 마지막 문장은, 다시 문학으로 되돌아가고 싶다는 최승자의 말이다. 확실함으로 덩어리진 불행이나 모든 것을 엮어내는 신비가 아니라, 깨지고 남은 것을 주워 담으며 원래의 것을 생각해 보기도 하는 '문학'으로 돌아가기.
'문을 찾을 수 있어 그 앞에서 울 수 있는 자는 아직 행복하여라(기유빅)' - 이 책 p78
최승자가 인용한 기유빅 시의 구절이다. 이 인용 때문에 기유빅을 처음 알았다. 처음에 무슨 청나라 사람인가 했는데 외젠 기유빅이라고 프랑스인이었다. 이름이야 어찌 되었건 저 문장이 계속 잊히지 않는다. 문을 찾았으면 열고 들어가면 그만일 텐데, 누군가가 그 앞에서 울고 있다. 아마도 문을 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인지, 차마 들어갈 수 없는 것인지, 들여보내 주지 않는 것인지는 모른다. 적어도 ‘문’ 앞에서 울고 있다. 어딘가 다른 장소로 통하는 문 앞에서. 그렇게 울고 있는 그는 ‘아직’ 행복하다. 문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문에 기대어 울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렇게 어딘가에 자주 기대어 울고, 없는 문을 만들어서 기대기도 한다. 그 문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문 앞에서 우는 우리는 아직 행복하여라. 그 앞에서 울다가 가끔은 웃다가, 최승자가 계속 살아서 글을 남긴 것처럼 아직 행복한 우리는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