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이스탄불 떠나기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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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도

진을 만나기 전에 나는 이스탄불 아야소피아 성당 앞 광장 앞을 서성이며 그를 만나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했다. 한 달 전에 진을 비롯한 사람들과 몽골을 여행한 이후 나는 한국으로, 진은 기차를 타고 러시아로 떠났다. 그때 함께 여행한 사람들은 모두 몽골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었지만, 일주일 간 많이 친해져 있었다. 모두들 한국으로 돌아올 때 장기 여행자였던 진만 몽골에 남았다. 나는 한국에 들어와 있다가 터키에서 다시 여행을 시작할 계획이었는데 마침 몽골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고 있던 진과 터키에 머무는 시기가 겹쳤다. 때가 맞으면 만나자, 말을 나누고 헤어지고 나서 정말로 우리는 거의 같은 시기에 터키에 있게 되었고, 만날 약속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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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서 일주일 동안 함께 했던 진을 다시 터키에서 만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는 내게 아는 사람 같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 같기도 했다. 일주일 동안 몽골에서 보낸 시간은 왜인지 몽골 밖에서는 쉽게 허물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한 달이 지나 진을 마주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지 쉽게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무튼 반가운 마음이 들 것만은 분명했으나, 생소하고 어색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막 라마단이 끝나 사람들로 북적이는 저녁의 광장을 발길이 가는 대로 돌아다녔다. 우리는 일곱 시쯤 신시가지의 광장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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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별로 어색할 것도 없을 만남을 생각하며 광장을 걸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그런 일은 흔하기 때문에 별 생각은 없었지만, 돌아보니 어딘가 특이했다. 무언가를 팔려고 하는 사람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선의에 차있는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그는 그저 대단히 비싸보이지만 동시에 촌스럽기도 한 옷을 입고 성공한 남자 특유의 거만한 어깨짓을 하고, 그러나 거만을 뽐내고 싶지는 않다는 듯 사근거리는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내게 스페인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정말로 동아시아인처럼 생겼기 때문에, 살면서 처음 들어본 물음이었고, 나는 그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진지하게 나를 스페인 사람 같다고 연신 되풀이 했다. 내가 장난으로 몇 마디 아는 스페인어를 하자 그는 행복하게 웃었다. 그는 쿠르드족으로, 그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는 ‘크레이지 쿠르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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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듣기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아마도 쿠르드인이라는 뜻의 그의 아이디 ‘쿠르도’라고 기억하고 있다. 쿠르도는 멋진 분홍 셔츠와 벨트에 내 눈으로는 촌스러운 뾰족 구두를 신고, 나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는 동부의 고향에서 떠나와 이곳 이스탄불에서 카펫 장사를 한다고 했는데, 장사가 꽤 잘 되는 모양이었다. 아야소피아 광장 바로 근처에 자신의 매장이 있다고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경복궁이나 광화문 광장 같은 좋은 땅에 크게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일 테니, 그는 그냥 돈과 시간이 많은 사람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이렇게 사근사근하게 다가와 자신의 매장으로 데려가서, 어떻게든 카펫을 팔아 치우려는 장사꾼들이 대다수겠지만, 쿠르도는 달랐다. 그는 시간이 날 때 이 광장을 찾는 여행객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에, 아무 목적도 없이 광장을 산책한다고 했다. 원한다면 카페트를 구경시켜줄 수도 있는데 비싼 게 많기 때문에 굳이 보러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단지 득의양양한 얼굴로 내게 몇몇 가지의 이야기를 묻고(당연히 김정은이 빠질 수는 없다), 터키 동부의 사진을 잔뜩 보여주었다. 동부에 있는 거대한 산과 우거진 숲들을 배경으로 그와 그의 가족들이 함께 웃는 사진들이었다. 내가 친구를 만나러 갈 시간이 되었다고 하자 쿠르도는 나를 전혀 붙잡지 않고 보내주었다. 인스타그램 아이디만을 교환했다. 나는 요즘에도 그 광장을 배경으로 찍은 쿠르도의 사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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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밤에 길 잃기

쿠르도를 떠나 신시가지의 탁심 광장으로 향했을 때, 진과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조금 늦어 있었다. 광장 한 구석에서, 방금 터키에 도착해 이곳까지 버스를 타고 온 진의 모습이 보였다. 진은 몸집이 크고 다부져서, 멀리서봐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진과 이스탄불의 신시가지에서 이렇게 만나는 게 어딘가 어색하기는 했지만, 생각만큼 생소하지는 않았다. 익숙한 사람을 만나서 반가웠고 먼저 이곳에 온 내가 경험한 이스탄불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신시가지의 거리에서 이스켄데르 케밥을 사먹었고, 진에게 이스켄데르 케밥이 무엇인지 내가 설명했으며, 아마도 저녁에는 광장에서 맥주를 신문지에 싸서 조금씩 몰래 마셨던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또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익숙해지고 있는 낯선 이스탄불과, 낯설지만 익숙한 진의 모습이다. 덩치 큰 그의 옆에 있으면 시비를 거는 사람도 거의 없어 든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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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진과 함께 여행할 계획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내일 다른 도시로 떠날 항공편을 예약해두어서 금방 진과 헤어졌다. 어차피 어느 정도 비슷한 루트를 따라 움직일 것 같아 시간이 되면 또 만나기로 했다. 나는 첫 단추를 끼는 마음으로 이스탄불을 떠났다. 긴 여행의 첫 도시를 떠날 때면, 이제 무언가 시작된다는 기분이 든다.

육로로 가는 것보다 훨씬 저렴했던 비행기를 타고, 서쪽의 대도시 이즈미르로 향했다. 거기서 내려서 기차를 타고 바로 셀축으로 갈 예정이었다. 셀축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소도시 중 하나였던 ‘에페소스’가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고 했다. 거의 2000년 전의 도시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심지어 그리스에도 없는 그리스가 그대로 있다고 했다. 거기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각을 전공 한 사람으로서, 가보지 않을 수 없는 곳이었다. 신이 나는 마음으로, 이즈미르에서 작은 소도시를 향해 기차를 탔다. 문제는 내가 기차를 잘 못 탔다는 것이었고, 더더욱 문제는 그때가 늦은 저녁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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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대로 타고 마음 편하게 쉬고 있던 열차는 외딴 마을을 종점으로 멈추었고,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채 기차에서 내렸다. 그 작은 역에는 사람들도 별로 없고, 서있는 역무원은 내가 묻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셀축으로 향하는 기차가 있냐고 번역기로 물어도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얼굴을 구겼다. 구글 맵으로 보니 셀축까지 그렇게 먼 곳은 아니라서, 우선 버스라도 찾아서 타 볼 요량으로 마을을 돌아다녔다. 당연히 이 마을에 여행객이 찾아올 리는, 거기다 동양인 여행객이 앞 뒤로 배낭을 메고 찾아올 리는 더더욱 없어서 마을 애들이 나를 신기해하며 따라오기 시작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셋을 넘어서는 너무나도 쉽게 늘었다. 나는 피리 부는 사내처럼 아이들을 끌고 다니며 아이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터키어로 무슨 말을 하며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힘겹게 버티며 걸었다. 지나가는 어른들을 만났을 때 번역기로 셀축 가는 법을 물어도, 말이 전달이 잘 안됐는지 설왕설래가 이어지다가 답은 결국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은 계속 재잘거리다가 밤이 늦어 하나씩 돌아가버리고, 나는 터키 마을에 황망하게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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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그냥 역으로 돌아갔다. 역에서 가디라면 무슨 기차가 올 것이고, 아마도 셀축 가는 기차는 분명 올 것이고, 나는 그걸 타면 될 것이니까. 세워둔 배낭에 기대 졸았다. 어쩌면 여기서 한참은 기다려야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하며 졸았다. 1시간쯤 지났나 어떤 열차가 큰 소리로 플랫폼에 들어와 멈췄고, 나는 벌떡 일어나 열차에 타있던 승무원에게 외쳤다. 셀축 가냐고, 셀축 가냐고. 승무원은 쾌활하게 셀축 간다고, 셀축 간다고 답했다. 내가 그 기차를 타고 셀축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의 침대에 누운 것은 새벽 1시가 넘었을 때였다. 거기에 누워서 쿠르도와 진을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금세 어딘가에 와있고, 대부분 무언가를 두고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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