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탐방기] 5회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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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 산다

무엇이든 정리하고 덜어내고 싶은 날이었다.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서 숱을 쳤더니 머리가 가벼워졌다. 정확히는, 머리카락이 가벼워졌다. 머리카락의 무게가 줄었으니 그 뿌리를 머금은 머리 또한 물리적으로 가벼워졌다고 말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장발에서 단발로 자르면 샴푸 후 말리는 시간과 허리 통증이 줄어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잡다한 생각으로 가득 찬 뇌의 입장에서는 머리가 가벼워졌다는 말이 기만으로 들릴 것이다. 장기하의 노래 <별일 없이 산다>에는 이런 노랫말도 있다.
 

니가 깜짝 놀랄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할거다
뭐냐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 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걱정이나 고민이 없다는 건 이만큼이나 얄미운 일이다. 다음 가사는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다리 쭉뻗고 잠들진 못할거다”로 이어진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오래된 질투처럼 심각한 감정이다. 요즘은 저마다 불안, 우울, 불면증 같은 걸 하나씩 지니면서 그걸 감출 뿐이라고 굳게 믿고, 해맑고 밝은 사람은 아주 잘 감추는 사람일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 같다. 나도 이렇게 힘든데, 너도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는 의심. 아니, 너도 힘들면 좋겠다는 소망일까.

나도 그런 의심을 받아본 적 있다. 이제 막 친해진 친구에게 극단적인 힘듦, 인생의 밑바닥을 겪어본 후 힘들지 않게 되었다는 말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우리는 아직 서로를 잘 모르는 사이였고, 웬만하면 너는 그런 편이구나, 하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친구는 그냥 덜 힘든 상황만 있었던 것이 아니냐며 인생에서 힘듦을 아예 제거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다고 말하면서도 내가 힘들지 않다는 사실을 끝내 믿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불편한 감정은 찾아왔다. 이런 것은 절대적 수치가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타인의 힘듦을 멋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딱 이것 하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지만, 그와 가까운 사이로 남지 못했다.

이럴 때 장기하의 노랫말처럼 정말 별일 없이 산다는 것을 고집해서 주장한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너는 멋있게 사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 상태가 사실일지언정 상대방에게는 칭찬을 요구하는 자랑으로 들릴 것이다. 어쩐지 속으로는 재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낄 확률이 높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다른 사람들이 불쾌해질 정도로 별일이나 고민 없이 살지 않는다. 굳은살이 두터워져 쉽게 힘들어지지 않을 뿐, 별일 아닌 일에도 걱정이 많은 편이다. 그러니 스스로 머리가 가벼워졌다고 말하다가도 깜짝 놀라 이렇게 정정을 한다. 머리카락이 가벼워진 것이라고. 얄미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니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라고.
 

샤워를 하다가도 핸드폰을 본다

걱정과 고민의 원인은 뻔하다. 그동안 이 지면에서 시대 탓, 구조 탓, 환경 탓, 남 탓에 이은 내 탓까지 반복적으로 많이 써왔다. 자본주의, 취업난, 컨트롤 타워의 무능과 불신, 과시형 소셜미디어, 환경 문제 등등. 사회가 병든 이유를 너무 많이 써왔으니 이번에는 원인 말고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걱정과 고민이 불러일으킨 불안과 우울이 있다는 것은 이제 알겠는데, 구체적으로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 부정적인 질병들이 일상의 모든 속성을 갉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결혼, 출산에 이어 연애도 포기하는 세대라고들 하지 않는가. (물론 가치관의 변화도 큰 원인이겠지만, 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포기한다는 의견에 한해서다.) 그중에서도 내게 가장 크게 와 닿는 것은 휴식이다.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의 의미는 어딘가에 눕거나 기댄 채 핸드폰을 보고 있는 모습에 가깝다. 지하철이나 버스, 신호등을 기다리는 횡단보도, 엘리베이터처럼 찰나의 순간조차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는 사람을 보기 드물다. 핸드폰을 하지 않는 경우, 줄이 없는 이어폰으로 통화를 하고 있거나 노래를 듣고 있다. 정말 핸드폰이 없다면, 대부분은 주변 사람들과 풍경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다. 일단 무엇이든 열심히 한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불안과 우울이 잠식할까 두려워 무엇이라도 끊임없이 하게 되는 걸까. 핸드폰을 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나의 경우 어떤 이유나 의미 없이 습관처럼, 숨쉬듯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샤워를 하다가도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배경음악처럼 들으려고 동영상을 틀었다가 결국 화면을 들여다보느라 머리 감는 시간을 늦춘다. 이제 정말 그만 봐야겠다고 의식하고 내려놓아야 할 정도다. 단순히 핸드폰에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날이 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 이대로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시간을 낭비해버린 의미 없는 하루. 열심히 일하다 찾아온 단비 같은 휴일에도 조금 더 의미있고 생산성이 있는 휴식을 취해야 할 것만 같다.
 

사소한 것만큼 어려운 게 없다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숱을 치고 머리가 가벼워진 날이 내게는 그런 날이었다. 아주 늦은 아침, 첫 단추부터 잘못 꿰맨 날. 그 이유는 지난주부터 충분한 숙면을 취하지 못할 만큼 놀아버렸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고, 열심히 사는 것에 지쳤다는 느낌이었다. 왜 이정도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인지 이유가 흐릿해졌고, 자연스럽게 의지와 의욕이 사라졌다. 대신 열심히 산만큼 보상을 받고 싶다는 심리가 발동했다. 그럼 제대로 쉬면 됐을 텐데, 또 열심히 놀았다. 쉬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꼭 그렇게 된다.

일탈의 여파로 잠을 몰아서 열세시간쯤 잤다. 강제로 전원을 끈 컴퓨터처럼 깊은 잠이었다. 부모님은 이미 아침과 점심을 차려 먹고 외출을 하신 듯 했다. 과수면으로 피로는 대충 풀렸지만 생각은 많아졌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그동안 충분히 하지 않은 일들이 줄지어 떠올랐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매일 반드시 하겠다고 다짐한 사소한 일들이다. 자기 전에 5분 동안 영어 공부를 하거나 양치 후에 치실을 사용하는 일, 밥을 먹고 바로 눕거나 앉지 않고 영양제를 챙겨먹는 일들. 한 번 빼먹는다고 큰 일이 생기지는 않지만, 그런 하루가 쌓인 내 몸과 마인드는 생각보다 큰 결과로 돌아온다. 그리 어려운 걸 목표로 삼지도 않았고, 첫 날의 성취감도 대단했는데. 건강한 생활 규칙이 습관으로 자리를 잡는 것은 쉽지 않다.

변명은 있다. 매일 다른 일이 벌어지는 삶에 규칙성을 부과하기는 쉽지 않다. 오늘은 컨디션이 좀 나쁘고, 어제는 날씨 때문에 지쳤고, 그제는 친구와 싸운 것 때문에 마음이 심란한 날일 수 있다. 이런 상태에서는 강제성이 없고 사소한 일과일수록 더 손에 잡히지 않는다. 최근에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그는 장편소설을 쓰기로 다짐하면 해외로 떠난다고 했다. 본국인 일본에 있으면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약속을 나가지 않을 수 없고, 사소하게 해결해야 하는 잡다한 일들이 많아져 방해가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끊어내기 위해 떠난 외국에서는 저녁 약속을 일체 잡지 않고 운동을 제외한 시간에는 모두 집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영위한다고 한다. 다작으로 유명한 소설가도 이렇게 소설을 쓰기가 어려운데, 내가 어떻게 영어 공부를 한단 말인가.
 

부자는 남들과 다른 아침을 보낸다

그 정도로 환경의 변화를 만들어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으면 제대로 무언가를 해내기는 불가능한가보다. 사실 건강을 지키는 습관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걸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여유로우면서도 강박적인 삶이 필수적인 요소일 뿐이다. 여유와 강박은 양립이 불가능한 말 같지만, 강박적인 규칙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일과가 적당히 분포된 여유가 있어야 꾸준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는 외국으로 떠나 머물 수 있는 재력과 자신의 의지대로 스케줄을 모두 조정할 수 있는 자율권이 있다. 부럽다.

요즘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 전 차를 마시고 책을 읽는다는 ‘미라클 모닝’이나 자격증을 여러 개 취득하고 부업으로 사업도 하는 ‘갓생(God+生) 살기’ 등이 유행이다. 해외에서는 모든 것을 척척 잘해내는 슈퍼우먼 같은 사람을 ‘That Girl’이라고 부르며 이를 실천해보는 챌린지가 유행이라고도 한다. 이 최상위 단계까지 가지 않더라도, 동년배 중 안정적인 미래를 위해 고시원에 틀어박혀 시험 준비에 열을 올리거나 조금이라도 더 많이 버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퇴사도 휴식이 아닌 이직을 위함이다. 그렇지 않으면 동시에 두 세 개의 일을 하면서 돈과 스펙을 모으고, 그 와중에 청약이나 주식도 공부해서 한다. 운동, 다이어트와 같은 자기 관리와 언어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요즘 나 빼고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감각을 느껴보지 않은 2,30대는 적을 것이다. 매너리즘, 귀차니즘은 정말 나에게만 해당되는 일인 것일까. 나는 강제성이 없는 일이라면 열정이 불타오르다가도 금방 꺼지고, 이제 쉽게 불타오르지도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모두가 하루키와 같은 환경에서 여유롭고 강박적인 삶을 지키긴 쉽지 않을 텐데, 소수가 아닌 다수가 그렇게 살아가는 사회가 존재한다고 믿고 싶지가 않다. 무엇이 동력이기에 그렇게들 열심히 살 수 있는 것일까. 불안 말고 다른 연료가 있다면 누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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