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술을 마시는 동양인 광대가 되어
혼자 술을 마시는 동양인 광대가 되어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2.08.23 11: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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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터키 시린제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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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아담한 도시 셀축은 처음 도착한 순간부터 마음을 끄는 곳이었지만 지내면서 친구를 만들지는 못했다. 내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는 왜인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여느 숙소라면 저녁마다 북적북적했을 마당의 테이블에서도 사람을 볼 수 없었다. 셀축은 유명한 관광지이고, 곳곳을 돌아다닐 때면 항상 사람이 많았는데, 막상 자연스럽게 섞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밝고 쨍한 날씨, 그늘에 앉으면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밝은 얼굴들로 셀축의 분위기는 아늑했는데, 그 아늑한 거리를 혼자서 걸어 다닐 때면 아름다운 엽서 사진 속에 홀로 오려 붙여진 느낌이 났다. 외롭지는 않았으나 어딘지 헛헛했고, 조금만 더 가면 침울해질 법도 한 기분을 이곳의 날씨가 계속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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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에 사람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12인실쯤 되는 도미토리에는 나와 함께 미국인 톰이 묵고 있었다. 바로 옆 침대 1층이 그의 자리였다. 그도 나처럼 셀축에 잠깐 들렸다가는 모양이었다. 밤에 도착한 나는 그를 처음 보았을 때 조금 피곤했었나. 처음 마주쳤을 때 톰은 밝게 웃으며 막 만난 여행자들이 나눌 만한 질문을 던졌다. 하필 나는 그 순간에 영어로 말하는 게 버겁게 느껴져 그의 질문에 별다른 호응을 해주지 못했다. 마치 그다지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는 듯 보였을 것이다. 살짝 곱슬거리는 머리에 무테안경을 쓴 톰도 애초에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는지 더 말을 걸지 않았다. 그렇게 3일 정도 둘이서 함께 같은 방을 썼는데 계속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았다.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끝내 꺼내지는 못하는 기분으로 밤마다 내 옆자리에 톰이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찾는 모습을 건너보았고, 어쩌면 그도 나를 건너보았을지 모르겠다. 안녕, 응 안녕을 넘어가지 못했던 어색한 그때가 떠오르는 것을 보면, 조금 말을 더 걸어보아도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아무튼 톰과 나는 안녕에서 끝났고, 그는 내가 셀축에서 미묘한 외로움을 느꼈던 작은 원인으로 남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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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배 와인

홀로 빛나는 그리스 시대의 폐허를 걸어 다니고, 또 다른 유적을 향하고, 계속 걸어 다니기만 했다. 지중해에 어울리는 햇볕이 가득 내리쬐었다. 올리브 나무가 무성할 것 같은 날씨, 밝고 노랗게 빛나는 들판 위로 작은 관목들이 이어졌고, 한쪽에는 키가 큰 나무들도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이 풍경 사이로 계속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던데다 언제까지 내가 걸을 수 있을지 셈 해보는 마음도 있었다. 샌들을 조여 매고 몇 시간이고 걷는 동안 나는 충분히 지쳤고, 이른 아침에 출발했던 마을의 입구로 한낮을 조금 넘은 시간에 다시 돌아왔다. 버스를 조금만 타고 가면 와인으로 유명한 마을에 닿는다고 했다.

시린제 마을은 산등성이에 있는 와인 마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과실주 마을이라고 해야 할까. 포도로 만든 와인도 있었지만 다른 여러 과일로 만든 술들이 유명했다. 한국으로 치면 복분자주, 머루주, 사과주… 가득 차 있는 마을 같을 것이다. 걷느라 지친 몸으로 작은 버스를 타고 도착한 시린제는 내릴 때부터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좋은 향을 풍겼다. 마을 중앙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술 파는 곳, 시음을 권하는 가게들,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매대가 이어졌다. 상업적인 낌새나 수작도 딱히 없이, 그저 특산물을 파는 시골의 어느 정겨운 마을처럼 돌길이 이어졌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한두 잔씩 시음을 한 사람들의 얼굴은 상기된 채 신나있고 와인 가게들 옆에서는 슬러시 기계가 열심히 돌아갔다. 와인 가게와 관광객들로 붐비는 마을 중심을 지나 살짝 비켜 올라가면 현지인들의 비슷비슷한 모양의 하얗고 낮은 집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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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나는 어느 와인 가게에 들어갔다. 권하는 대로 여러 과일로 만든 술들을 조금씩 맛볼 수 있는 샘플러를 시켜놓고, 가게 한 구석에서 맛의 차이를 열심히 느껴보려는 듯 머리를 굴렸다. 크랜베리, 블랙베리, 자두, 배, 파인애플, 멜론… 익숙했지만 술로는 먹어보지 못한 과일들로 참 많은 술이 있었다. 다른 손님은 없었던 가게 구석에서 술에 각각의 과일이 남긴 흔적을 찾아내느라 골몰한 이후, 서양배로 만든 와인을 한 병 샀다. 이 밝은 날에 같이 이야기할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친해질 넉살도 없고, 그냥 취해버리기나 하고 싶었다. 술을 산 사람들은 가게 테라스에서 조금 마시고 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테라스는 가게 안 쪽이 아니라 사람들이 잔뜩 지나다니는 돌길 쪽, 가게 입구 옆쪽으로 붙어 있었다. 그곳에 자리를 잡고 받아온 잔에 와인을 따라 받아온 견과류를 안주 삼아 사람 구경하며 먹었다.

사람들을 구경하던 시간이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이 나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혼자 앉아서 와인 한 병을 따라서 마시고 있는 동양인 남자애가 신기했던 건지, 가볍게 한두 잔 먹는 분위기에 한 병을 까서 먹고 있는 사람이 신기했던 건지, 그냥 동양인이 신기했던 건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신기해하며 웃었다. 그들은 정말이지 나를 신기해했다. 그날 어떤 부분이 가장 신기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를 일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나와 셀카를 찍자고 요청했고(터키 동부에서는 흔한 일이었지만), 나에게 격한 인사를 건네고 가기도 했다. 점점 취기가 오르던 나는 그들의 호의인지 호기심인지 웃김인지 모를 관심에 열렬히 반응했다. 점점 나는 시린제 골목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동양인 광대가 되어갔다. 어설프게 배운 관광 터키어와, 돌아다니며 터키 아이스크림 아저씨들에게서 배운 말들을 던졌다. 그들은 깔깔 웃었고 나는 뿌듯했으며, 마을로부터 돌아오며 터키어로 중얼거렸다. 타맘(괜찮아), 타맘(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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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축에 도착했을 때는 막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아까 먹던 와인은 그 자리에서 다 먹기에는 너무 달아서, 이미 딴 코르크를 다시 쑤셔 넣은 채 손에 들고 왔다. 시간이 되면 들리려고 했던 셀축의 성은 입장 시간이 지나 있었다. 와인 한 병을 들고, 들어갈 수 없는 성곽을 따라 걷고 있는데 허름하게 옷을 입은 한 남자가 다가왔다. 돈 얼마를 주면 성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가이드도 해주겠다고, 이곳에 오래 살아서 방법을 알고 있다고, 그는 내게 말했다. 평소라면 더 생각도 안 하고 지나쳤을 제안인데, 어쩐지 그때는 그가 말하는 대로 해보고 싶었다. 요구하는 금액도 무척 적었다. 어떻게 길을 안내할 건지 궁금하던 차에 그가 행동에 옮긴 것은 창살 같은 울타리를 넘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는 성을 기어서 올라갈 거라고 했다. 그를 따라 잠깐 울타리를 넘어 왔던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어 다시 울타리를 넘어 왔고, 그는 울타리를 넘은 비용이라도 달라고 했다. 내가 돈은 없으니 들고 있던 와인이라도 한 잔 마시고 가라고 말하자 그는 생각보다 흔쾌하게 내 와인을 들고 한 두 모금 벌컥 마신 이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그렇게 나는 나의 서양배 와인과 함께 숙소로 돌아왔다. 톰도, 숙소 주인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마당 테이블에 앉아, 마시다 남은 와인을 까서 계속 마셨다. 날씨가 참 좋다, 혼자 이야기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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