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헨젤과 그레텔의 섬'/ 미즈노 루리코/ 정수윤 역/ 읻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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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이 책을 처음 알고 사게 된 곳은, 이 책이 출판된 '읻다' 출판사의 강의실이었다. 그때 나는 시인 B의 6주 짜리 시창작 강좌를 듣고 있었는데, 그는 매주 수업 시간마다 글 몇 개를 발췌해 가져와 함께 읽으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수업은 그런대로 즐거웠지만 내 시가 합평대에 올라 인수분해 당할 때면 오랜만의 합평이 익숙지 않아 마음에 이런저런 상처를 입었고, 돌아가는 길에 합정역 홈플러스에서 만 원짜리 위스키를 사 마시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군에서 막 제대했을 쯤이라 여유가 있었는지 저런 값비싼 청승을 떨었다. 그래도 시를 쓰고 읽는 모임에 가고, 내가 좋아하던 시인의 육성을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좋았기에 수업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진실은 구체적이라는데, 나의 막연함이 구체적으로 변하지는 못했지만 막연한 채로 홀로 기웃거리던 때였다.

B는 수업 중반부쯤에 미즈노 루리코의 시집 '헨젤과 그레텔의 섬'에서 한 편을 소개했다. '코끼리 나무 섬에서'라는 시였는데, 이렇게 시작한다.

'섬의 생김새는 그날그날 바뀌었다 구름의 양에 따라 창문이 열린 각도에 따라 의자가 놓인 위치에 따라 어느 날은 불가사리처럼 벌어지고 어느 날은 고둥처럼 비틀리며 어느 날은 모래알처럼 작았다’

시는 이렇게 끝난다.

'우리도 언젠가는 한 그루 나무가 되는 거라고 오빠가 말했다 나무는 잘려나가 의자와 불이 되겠지 의자도 불도 먼 데까지 코끼리 나무 이야기를 운반할 수 있다 얼어붙은 창 안으로 눈이 내리고 눈은 부둥켜안은 우리 머리 위에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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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를 읽자마자 너무 좋았다. 이 시가 전달하는 어떤 동화적인 분위기에 쉽게 감화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동화적인 서사나 감각을 좋아한다. 그게 단순히 동화가 아니라, 동화적으로만 이야기해야만 하는 어떤 상처에 관한 것이라면 더 좋아한다. 잘된 경우라면 그런 글들은 애써 무언가를 포장하거나 감추려는 시도가 아니라, 동화의 형식을 빌려 연약한 기억을 끝끝내 말해내고자 하는 섬세한 의지를 보여준다. 현장에서 책을 바로 샀다. 마침 출판사에서 사니까 10프로 할인도 되었다. 돌이켜보니 출판사에서 직접 책을 산 것은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 짧은 시집에는 특이하게도 페이지마다 옆 페이지에 일본어 원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동시에 읽을 수 있는 책인 것이다. 일본인을 만난다면 한 번 시도해보고 싶다. 인도 여행할 때 만났던 길거리에서 팝핀을 추던 공대생 요시타카가 떠오른다. 걔는 무척 차분하게 생긴 모범생 스타일이었는데, 무언가 갑자기 튀는 광기 어린 구석이 있었고, 그건 내가 아는 ‘일본스러움’과 너무 닿아있어 기분이 이상했다. 요시는 밤에 나와 인도인 친구들과 길거리에서 노상을 까다가 술을 먹고 토를 하기 시작했고, 다음날 다시 길거리에서 팝핀을 췄다. 잘 춘다기보다는 열심히 배운 춤. 요시와 함께 이 시집을 읽는다면 어떨까.

시집은 일종의 연작으로, 나와 오빠의 시점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환상을 차근차근 늘어놓는다. 전쟁이 났고, 아이들은 버려졌다. 시인의 말대로 '의식의 밑바닥에 생겨나는 이미지의 단편을 직조하여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방식'으로 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 하나하나가 전체저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데, 이야기를 지탱하는 서술들이 오락가락한다. 일관되지 않은 환상 속에서 아이들의 아픔이 뒤섞인다.

나와 오빠의 자리가 뒤바뀌고, 나의 말인지 오빠의 말인지도 헷갈리고, 코끼리가 섬이 된 것인지 섬이 어디있다 온 것인지, 내 방에서 상상한 섬인 것인지, 섬은 작아졌다가 커졌다가 모든 것이었다가 방 안에 코끼리였다가 코끼리라는 세계 자체였다가. 서술의 층위가 빠르게 변화한다. 이 변화는 자칫 어지럽지만, 아이의 환상 속에서 모든 것은 섞일 수 있다. 오히려 연결된다. 내가 네가 될 수 있고, 코끼리가 커졌다 작아지고 나무가 되고 그 나무가 섬이 되고 하는, 이어져있는 생명 감각이 점차 드러난다.

전쟁이 시작되고 아이들은 집에 남아 상상하고, 상상 속에서도 어른들은 전쟁 속에서 무언가를 죽이는 일을 하고, 헨젤과 그레텔은 버려진 아이들이다. 나와 오빠도 버려진 아이들이다. 그들은 빵 부스러기를 줍다가 마녀의 집에 갇힌다.

죽음의 그림자가 이 시집의 환상들을 더욱 빛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 잔인한 말인가. 이 시집 속에서 버려진 아이들은 살려달라고 절규하기도 하고, 어머니를 찾기도 하고, 결국 우리는 나무가 될 거라며 서로 다독이기도 한다. 어른들은 마치 말 못하는 존재라는 듯 밥을 준비하고 밖으로 나간다. 이 시집을 읽다보면, 환상이 단순한 부가물이나 부산물이 아니라, 진실을 애써 감추고 있는 투명한 물방울 같은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 물방울을 때로는 눈물방울로 써야하는 순간이 오기도 할 것이다.

어렸을 때 느꼈던 감각들, 그때 세상을 바라보던 어떤 느낌들이 많이 떠올랐다. 유치원 때 혼자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벤치에 누워 하늘을 한두 시간 씩 바라보았던 기억.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색. 어쩌면 그 하늘에 두고 와 미처 찾지 못한 것들이 거기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아닐지 돌이켜보게 된다.

'깊은 숲 속에서 양치식물의 포자가 금빛으로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부뚜막 안에서 마녀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이의 호주머니에 더는 빵 부스러기나 조약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짧은 여름의 끝에 그이는 죽었다 그것은 작고 투명한 유리잔 같은 여름이었다 하지만 그런 여름을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불렀다.'

- '헨젤과 그레텔의 섬' 마지막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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