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추석 전날부터 사람이 오고, 가고, 또 오고 또 갔다. 나는 막걸리에 취했다가 깨고, 소주에 취했다가 깨고, 맥주에 취했다가 깨기를 삼박 사일로 했다. 밤이면 어른 아이 구별이 없이 마을회관 앞에 나와서 터뜨리는 폭죽 소리가 동네 개들을 일제히 연속으로 짖어대게 해서 전쟁이라도 터진 것 같았고, 핸드폰은 밤낮으로 정신없이 울어대서 나를 무한히 귀찮게 했다.

여러 모로 시끌시끌 요란한 추석이었다. 근래에 없었던 일이었다. 삼박 사일이 지나서 이제 더 이상은 올 사람도 없고, 오고자 하는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귀찮아서 아예 멀리 한쪽으로 팽개쳐두었던 핸드폰을 찾아 들고 열어보았다.

확인하지 않은 문자가 마치 벌레처럼 오글거린다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이걸 다 읽어야 하나? 아래로, 아래로, 하릴없이 계속 내려가다가 하나에서 탁 멈췄다. 청와대, 그 세 음절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오래 전 민족문학 어쩌고 하는 연구모임을 드나들며 정을 쌓았던 사람이 청와대라는 제목으로 몇 장의 사진을 보내온 것이었다.

청와대 건물 안에서 찍었다고 하는 매우 선정적인, 한눈에 척 봐도 일본 문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사진들이었다. 신기하게도 왜색은 언제 어떤 눈으로 봐도 금방 일본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그 색은 대체로 복숭아 꽃 이미지와 연계돼 있고, 옆에서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성의 상품화가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노골적으로 마치 화선지를 먹어 들어가는 채색 물감처럼 이면에 깔려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기분을 몹시 불쾌하게 하는 그런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불현 듯이 옛날 옛적의 삽화 하나가 떠올라 왔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도 넘게 온갖 물건들과 온갖 책들을 들쑤셔놓은 끝에 비로소 그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오래 전 청와대 경내에서 주워들었던 삐라였다. 삐라 뭉치였다. 화재 사건으로 대부분 타서 없어지고 남은 것들을 어디엔가 넣어두었다는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그것들이 세상에, 몇십 년이 지난 오늘 내 눈앞에 떠억 나타나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한때 삐라 수집가이기도 했었다. 또한 그 시기에 나는 삐라는 ‘삐라’라고 발음해야지 고운 말 바른 말을 쓴다고 ‘비라’하고 해서는 안 된다는 나름의 개똥철학도 완성했었다. 짜장면은 짜장면이라고 해야지 ‘자장면’이라고 하면 짜장면 맛이 안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청와대를 까부시러 왔수다.”

남파 공작원 김신조가 했다는 이 말을 내가 언제 어떤 계기로 접했던가는 지금 기억나지 않는다. 그 말을 듣던 시기에 나는 청와대가 무엇 하는 곳인 줄도 아직 몰랐고, 정치라든가 대통령 또는 국가 같은 것들에 대한 개념도 전혀 잡혀 있지 않았으며, 김신조라는 사람이 청와대를 왜 ‘까부시러’ 왔다고 호연한 것인지도 당연히 몰랐다. 나는 다만 김신조라는 사람이 위기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러 달려온 만화 속의 영웅처럼 느껴져서 아, 오, 어쩌면 따위 감탄사나 토해냈을 뿐이었다.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던 그 시기의 내 머릿속에 불쑥 들어온 청와대는 뭐랄까, 살금살금 다가와서 다정하게 목을 끌어안고 요사스런 소리로 사람을 현혹시켜서 인사불성 상태로 만들어놓은 다음 순식간에 모가지를 깨물어서 피를 쭉쭉 빨아먹는 드라큘라들이 우글대는 소굴인 것만 같았다.

흡혈귀는 다른 나라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우리나라에도 있나 보다 하는 새로운 인식이 내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런 흉악한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을 ‘까부시러’ 왔다고 하는 김신조는 진실로 영웅인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워죽겠기도 하고, 나 자신의 순진성이 가소롭기도 하지만, 어쨌든 뭐 그랬다. 김신조는 청와대를 전혀 몰랐던 내 머릿속에 청와대라는 고유명사를 최초로 심어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청와대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세월이 흘러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했을 때 청와대로 상징되는 권력의 메커니즘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추론해볼 수 있는 몇 개의 단서를 접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었고, 그마저도 구체성을 띤 것은 하나도 없었다. 명확하게 이거다 하고 단정할 만한 게 하나도 없으니 답답하고, 답답하다 보니 호시탐탐 청와대를 만져보고 느껴볼 만한 동기나 계기 혹은 기회를 찾아 헤매기를 몇 번이나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 내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간절히 원하면 반드시 이뤄진다고 했던가. 노태우 정권 시절이었다. 임기 내 주택 2백만 호 공급을 약속했던 노태우는 청와대를 대대적으로 개보수하는 작업을 벌였다. 나중에 춘추관으로 명명된 건물도 아마 그때 신축했을 것이다. 이 공사를 이른바 국내 굴지의 기업이라고 하는 건설회사에서 맡았다. 그 회사는 내가 하청에 재하청을 맡아서 일하던 아파트 공사현장의 원청회사였다.

원청 업체는 하청 업체에 인력 공급에 관한 협조요청 내지 요구를 하고, 하청 업체는 재하청 업체에 인력 공급에 관한 협조요청 내지 요구를 하는데 그것이 나한테까지 왔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신원조회를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 첫째 조건이고, 해당 분야 경력이 3년 이하인 자는 절대로 데려와서는 안 된다는 게 둘째 조건이었다.

경력 3년 이상이면 숙련공이었다. 사람이 항상 모자라서 초보자 한 명 구하기도 어려운 시절에 3년 이상 경력은 어불성설이었지만, 밤샘 작업 하루에 삼 일분의 일당이 지급된다는 얘기가 돌면서 말이 안 될 것 같던 일은 금방 말이 되어갔다.

해가 떨어질 때 출근해서 다음날 해가 떠오르기 전에 퇴근하는 철야작업이 기본으로 설정된 게 청와대 공사였다. 그래서 한 번 출근하면 일당이 세 배가 되는 거였다. 문제는 뭐가 뭔지, 어디가 어디인지 하나도 알 수 없어서 마치 감옥에라도 갇혀버린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오후도 늦은 시간 지정된 시간에 지정된 장소로 간다. 기다리고 있노라면 버스가 오고,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일렬로 선다. 금속 탐지기를 통과하면 소지품 검사가 기다리고, 소지품 검사가 끝나면 정신교육이 시작되는데 첫째 지정된 장소를 이탈하지 말 것, 둘째 아무 데서나 함부로 용변을 보면 즉시 추방되니 명심할 것 등등이다.

작업 현장에 들어서면 감독관의 잔소리가 기다린다. 마음에 항상 중앙청 건물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훗날 김영삼 대통령이 일제의 잔재라 해서 철거하게 되는 중앙청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기술로 지어진 총독부 청사인데 제대로 잘 지어진 건물로 소문나 있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지진이 나서 땅이 쩍 갈라진다 해도 건물은 의연하게 꼿꼿이 서 있도록 설계를 했고, 세부적인 작업도 그만큼 단단하고 완벽하게 처리했다는 얘기였다.

그렇게 정밀하고 단단하게 건물을 세우자면 확인에 확인은 필수였다. 숙련공이 확인한 것을 반장이 재확인하고, 해당 분야 기사가 한 번 더 확인하고, 감독관이 확인하고, 이어서 총감독이 확인한 뒤에 좋아 됐어, 하면 비로소 다음 단계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이니, 작업의 강도는 강도랄 것조차도 없이 완전 놀고먹기 수준이었다.

일반 관공서나 상가 건물 혹은 아파트를 지을 때 단위 면적당 열 명의 기술자가 투입된다면, 청와대 공사는 단위 면적당 백 명 아니 그 이상의 기술자가 투입돼서 자로 잰 것을 또 재고, 이미 다진 것을 또 다지는 것이니 작업을 하면서도 작업을 하는 것 같지가 않아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래도 되는가. 이렇게 인력을 낭비해도 되는가 하는 의문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던 어느 하루 아침 일찍 퇴근을 하는 내 발등 위로 척 걸터앉는 뭔가가 있었다.

이게 뭐냐 하고 집어 들어 보니, 놀랍게도 그것은 대통령 노태우를 배불뚝이 탐욕덩어리로 묘사해놓은 만화 한 컷이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확 달려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삐라를 본 적이 없었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아 이것이 삐라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재빨리 귀신도 모르게 주머니도 아닌 윗도리 가슴팍 사이로 쑤셔 넣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내밀히 사방을 두리번거리곤 했지만, 두 번 다시 청와대 경내에서는 삐라가 발견되지 않았다. 감질이 났다고나 할까. 한 장의 삐라에 매료된 나는 이제 청와대를 에워싸고 있는 산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동두천과 의정부 그리고 연천까지 삐라수집 여행을 나서기도 했다. 왜 그렇게도 삐라수집에 열정을 쏟았는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헤매 다니는 동안 조금씩 뭔가를 알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그 생각은 점차 확신이 되어갔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내 손으로 직접 권력을 만져보았다는 거, 발로 밟아도 보았다는 거, 냄새도 맡아보고, 색깔을 눈으로 확인도 해 보았다는, 그리하여 권력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일종의 자긍심 같은 것이었다.

삐라를 왜 비밀리에 수집했던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어서 할 말이 없지만, 권력의 속성을 알알이 알았다는 자긍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치열한 토론의 과정이 생략된 일방적인 권력 행사는 필연적으로 비통한 몰락을 맞이하게 돼 있다는 생각 말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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