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탐방기] 7회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영화 <큐어> 포스터 ⓒ위클리서울/ 네이버 영화

갑자기 살인범이 되었다

오스카 봉,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에 영감을 준 영화가 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10위에도 들어간단다. 너무 궁금하지 않는가. 바로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1997)다. 봉준호 감독의 영업에 넘어간 나는 언젠가 반드시 보리라 다짐했고, 최근 극장에서 다시 개봉하자마자 지체 없이 달려가 감상했다. 큰 기대를 품었음에도 놀라운 영화였다.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수없이 의심하고 곱씹었다. 이런 영화가 있을 수도 있구나. 충격에 저릿한 머리를 붙잡고 극장에서 나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오래된 작품이니 단도직입적으로 스포일러부터 하자면, 한 의대생이 심리 치료 목적으로 최면술을 터득해 사람들로부터 살인을 유발하는 내용이다.

이전에 무서운 영화를 잘 보지 못한다고 쓴 바 있다. (“공포는 싫지만 공포영화는 좋아할 수 있을까” 서울독립영화제 5편 참조.) 귀신이나 날카로운 칼이 등장하면 눈부터 가리고 본다. 이번 영화 <큐어>는 무작정 무서운 공포 장르나 범인을 추리해야 하는 스릴러는 아니었다. 무서운 장면이 아예 나오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저 괴로운 감정을 주기 위해 만든 영화는 아니다. 흥미로운 인물과 이야기를 따라가느라 바빠 막상 공포심은 뒤편으로 제쳐놓게 되기도 한다.

영화에 나오는 살인범들도 무서운 악인이 아니다. 최면술사이자 살인교사범인 마미야(하기와라 마사토 배우)는 곧 쓰러질 것처럼 연약해보이고, 심기를 거슬리게 만들지만 욕설이나 저급한 말을 쓰는 사람도 아니다. 그의 타겟이 되어 살인자가 된 이들 또한 누가 봐도 살인을 저지를 것 같은 무뢰한이 아니다.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알몸으로 소화전에 들어가 덜덜 떨고 있는 회사원, 무례한 행인을 집에 데려와 짜증 한번 내지 않고 도움만을 베푼 교사, 옥상 위에 서 있는 남자를 병원까지 데려간 경찰, 성희롱에도 덤덤하던 의사다. 왜 이들이 선택되었는지는 모른다. 겁이 많거나 선량하거나, 혹은 상식적인 사람이라서 등의 이유는 제각기 다르지만,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인다는 점이 유일한 공통점이다. 대체 범인은 무슨 짓을 했기에 사람을 죽이는 행위까지 시킬 수 있는 것일까. 이 사건을 맡게 된 주인공 형사와 관객들은 최면술의 비밀이 더욱 궁금해진다.
 

영화 <큐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네이버 영화

아내의 죽음을 환각으로 본다면

주인공인 다카베 형사(야쿠쇼 코지 배우)는 일과 가정 모두에 충실하다. 이런 사람을 선배로 만난다면 주저 없이 믿고 따르고 싶은, 모든 일을 묵묵하게 잘 해내는 타입이다. 그의 아내가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 큰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책임을 다한다. 그런데 마미야를 만나고 그의 일상에 지각 변동이 일어난다. 갑자기 당연하게 참아오던 모든 것에 새삼스럽게 분노한다. 마치 자신만을 생각하는 어린아이처럼 타인을 헤아리거나 배려하는 모습이 모두 사라진다. 다카베도 마미야의 최면에 걸린 것이다.

그 절정은 집에 돌아온 다카베가 목을 매달고 죽어있는 아내의 모습을 환각으로 보는 장면이다. 그는 그대로 주저앉아 오열한다. 보통은 상대를 어떻게든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살아있는지를 확인하거나 믿을 수 없어 발버둥을 칠 텐데, 우는 그의 모습이 이상하게 성급해보인다. 이 순간을 예상했거나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끙끙 앓던 울음이 마침내 터져 나오는 시원함이나 후련함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건 지나친 착각일지도 모른다. 오래 시달린 고통스러운 문제가 끝에 다다랐기 때문인지,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그 모순적이고도 괴이한 감각의 뒤로, 다시 살아있는 현실의 아내를 확인한 다카베는 자신을 뒤흔들어놓은 마미야를 찾아가 쏘아붙인다. 집에 돌아와서 그런 아내를 돌봐야 하는 인생을 네가 아냐고. 안타깝게도 다카베 역시 인내심이 있고 존경스러운 성인(聖人)이 아니라 평범하게 괴로워하는 범인(凡人)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가족을 아끼고 사건 해결에 열심이던 형사가 이렇게까지 자기중심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그 전에 더 중요한 질문은 마미야, 그러니까 심리학을 배운 학생이 어떻게 몇 마디 대화만으로 사람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일까의 문제다. 관객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설정을 영화가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팔짱을 끼고 지켜보게 된다.
 

당신의 얘기를 듣고 싶어

범인은 심리학도로서 최면술을 완전히 터득했다. 흐르는 물과 라이터의 불도 이용하는 기술이 있다. 그런 능력과 기술이 최면을 성공하는 핵심일 수 있다. 그런데 다카베가 최면에 빠져드는 과정을 체험하다보면 그가 던지는 간단한 질문들이 사람의 중심을 꿰뚫어 휘저어놓는다는 점에서 등골이 서늘해진다. 작은 총알 하나가 사람의 몸을 빠른 속도로, 심지어 소용돌이를 그려놓으면 그 위력이 거세지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누구.”
“당신의 얘기를 듣고 싶어.”

형사로서의 의무, 남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던 다카베에게 저 질문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그러게, 내가 누구였지? 자신도 모르게 마미야의 질문을 곱씹었을지 모른다. 자신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사실은 이런 삶을 원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다다랐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결말까지 이어서 이야기해보자. 다카베는 최면에 걸렸지만, 형사로서 도망치는 마미야를 붙잡아 사살한다. 이 모든 일들의 시초인 범인이 죽으면서 영화의 모든 갈등은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신과 병원에 입원했던 다카베의 아내가 이전의 피해자들과 동일한 형태의 시신으로 발견된다. 누가 죽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미야의 영향 아래 벌어진 일일 것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음식을 죄다 남기던 전과 달리 밥그릇을 싹 비우고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는 다카베다. 마미야의 논리대로 살인을 통해 자신의 심리가 치료된 환자의 얼굴이다. 아내를 죽인 것은 누구인가. 마미야인가, 다카베인가, 혹은 영향을 받은 제3자인가. 여전히 밝혀진 것은 없지만, 홀로 된 다카베가 행복해졌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에겐 전조 증상이 있었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해내고 집에 돌아가면 아내에게 충실한 모범적인 사람이었지만, 아내가 입원한 병원의 의사에게 걱정스러운 말을 들은 적 있다. 사실, 아내보다 당신이 더 아파 보여요. 늘 덤덤하고 능통해보이던 다카베는 그만큼 속이 곪아서 누군가 방아쇠를 당겨주길 기다리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제 그는 잘 견디고 버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묵은 체증을 완전히 소화해내고 진정 원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산다.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그가 기꺼이 내려놓은 것들을 감히 이해할 수도, 이해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야말로 공포스러운 결말이다.

 

ⓒ위클리서울/ 네이버 영화
영화 <큐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네이버 영화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사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카베가 아닌 다른 사람이다. 그가 먹고 난 빈 그릇을 치우는 종업원이 갑자기 다른 이에게 칼을 겨누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아마 다카베는 제2의 마미야로서 이 최면술을 전파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래도 다카베가 마미야를 죽이는 장면을 보고 그가 형사로서의 정의로운 자아를 잃지 않았다며 안심했던 관객은 그 살인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의심하며 혼란에 빠져든다. 마미야를 죽인 다카베는 형사였을까, 최면에 빠져든 살인범이었을까. 이후로도 계속 퍼져나갈 최면 살인을 생각하면 영화 속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 것과 다름없다. 더 무서운 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세상은 최면에 빠지지 않았을 뿐 분노와 갈등이 언제나 저변에 깔려있다는 사실이다.

다카베의 단골 세탁소에는 누군가를 증오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손님이 있다. 그는 영화에서 잠깐 등장하는 엑스트라일 뿐 마미야와 마주치거나 최면에 빠져든 적 없다. 그가 반드시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고 확신할 순 없지만, 도저히 억누를 수 없어 새어나온 분노의 감정이 여실히 느껴진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1호선 빌런’ 등의 이름으로 지하철에서 정신 질환이나 분노에 휩싸인 사람이 벌이는 이상 행동을 동영상으로 찍어 조롱하는 문화가 유행했다. 지하철 표 값만 냈을 뿐인데 서커스까지 구경하고 간다는 사람들의 비웃음은 그 이상 행동보다 더 섬뜩하다. 타인의 고통스러운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고, ‘이상한’ 행동을 벌인 사람은 모자이크도 없이 찍어 올려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은 우리 곁에 마미야가 숨어있었다고 해도 놀라울 것이 없다.

 

영화 <큐어> 스틸컷 ⓒ위클리서울/ 네이버 영화

슬픔을 공부해야 한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저런 최면에 빠져들어 누군가를 죽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열심히 고민했다. 나는 겁이 많고 분노도 성가실 정도로 귀찮은 사람이라서 절대 그런 일이 생길 수 없다는 걸 확신하지만, 영화에서 살인을 저지른 이들 모두가 결코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이 떠올랐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통찰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한나 아렌트, 한길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391쪽.)

그가 악마라서 그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지시에 순응하고 그로 인해 타인이 겪게 될 고통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마무시한 일을 벌일 수 있었다고 말한다. 누구나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하기를 멈추고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누군가 내 안의 방아쇠를 당겼을 때 그 총알이 누구에게 튀어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서늘한 이야기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 그해 가을, 신형철(42) 문학평론가는 세월호 추모 에세이집 <눈먼 자들의 국가>를 엮으며 이렇게 썼다. (허윤희 기자, 한겨레 21, “나는 오늘도 타인의 슬픔을 공부한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6115.html)

다카베는 슬픈 사람이었다. 아내를 사랑하고 애정했기 때문에 병원에 입원시키는 일 만큼은 가장 끝으로 미루고 최대한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려 했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다며 들뜬 아내가 아무 것도 들은 것 없는 세탁기를 또다시 가동시킬 때, 그는 말없이 몇 번이고 세탁기를 끈다. 그런 상태이면서 괜한 희망을 주지 말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속이 텅 빈 상태로 돌아가는 세탁기가 자신과 닮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가 느꼈을 슬픔, 무기력, 자괴감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다. 그 고통이 너무나 강해서 마미야의 최면에 쉽게 빠져들었을 것이다.

소 잃은 외양간을 지켜보며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다카베가 고립되지 않도록 더 적극적으로 나서주었다면 어땠을까. 아내가 병원 말고도 갈 수 있는 곳과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땠을까. 그 정도의 숨통만 트였어도 다카베는 정신과 전문의의 충고대로 마미야를 대면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분노 혹은 알 수 없는 충동에 휩싸여 직접 그를 만나야겠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마미야는 어디에나 있고, 나 또한 그의 최면에 걸려들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진실을 기억해보기로 한다. 그 평범한 악을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고 다짐해본다. 주변의 슬픔을 공부하며 우리 세계가 더 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생각하고, 또 헤아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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