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 김일경 기자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아침이 오면 괜히 바쁘다. 정시에 출근해야 하는 회사원도 아니고 아침밥을 먹여서 학교에 보내야 하는 아이도 이젠 없다. 비교적 시간이 자유로운 프리랜서임에도 집을 나서기 전까지의 아침 시간은 늘 분주하다. 아침잠이 많아서 일어나는 것조차 힘에 부치니 더욱 그러한 것 같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저녁거리부터 생각한다. 이젠 식구들이 저녁 한 끼만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쌀도 미리 씻어놔야 하고 먹을 만한 반찬이 있는 지도 확인한다. 양치를 하면서 냉장고를 두 서너 번은 열어 보는 것 같다. 저녁에 해 먹을 요량으로 냉동실에 얼려져 있는 식재료를 냉장실에 옮겨 놓기도 한다. 특별히 반찬거리가 마땅치 않으면 퇴근길에 마트를 들러서 데리고 와야 할 식재료들도 생각해 놔야 한다. 어제 저녁에 먹고 남은 국을 한 번 더 데우기도 한다. 그냥 두면 상할 지도 모르니 말이다.

세수와 함께 머리를 감는다. 다행히 머리는 린스만 하면 된다. 어제 운동을 다녀 온 후 샴푸는 미리 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감으면서 세탁기를 돌려야 할 빨래는 없는 지, 혹은 어제 저녁 미처 널지 못한 빨래는 없는 지 되짚어 본다. 운동을 다녀 온 후 운동복을 쾌속으로 돌려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적이 몇 번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휙 감으면서 세탁기를 확인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축축한 생태로 긴 밤을 견뎠을 빨래가 숨죽이고 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세탁조 안에서 억지로 건조를 당한 그것들을 얼른 세상 밖으로 탈출시켜 빨랫대에 걸쳤다. 밤새 웅크리고 있은 흔적은 빨래의 구김이 말해 주는 듯하다.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쌀을 씻는다. 반나절 정도 불린 쌀로 지은 밥이 맛있다며 스스로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아침마다 반복되는 자질구레한 일상들을 왜 전날 미리 해두지 않았는지에 대한 한탄은 스트레스의 최단거리 도착 지점이란 것을 이제는 안다.

본격적으로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시작한다. 얼굴 전체 기초화장을 한 다음 마스크 밖으로 노출되는 부위만 색조 화장을 한다. 이럴 때는 마스크를 써야 하는 이 시국이 감사하다. 메이크업을 전체 얼굴의 상단 부분만 해도 되고 루즈는 바르지 않아도 된다. 눈가 처짐을 감추기 위해 아이라인을 한껏 치켜서 그린다. 그러나 아주 종종 눈꺼풀이 아이라인을 집어 삼키는 경우가 많다.

이제 외출복을 갈아입고 머리만 말리면 된다. 나의 출근 루틴에 머리는 항상 마지막이다.

수건에 둘러 싸매진 머리 덕분에 화장을 할 때도 머리카락의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으며 옷을 갈아입고 난 다음 머리를 말리면 훨씬 더 머리의 단정함을 유지할 수 있다.

머리를 흔들며 드라이를 한 후 청소기를 한 번 돌린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날리는 먼지와 머리를 말리며 낙하된 머리카락들을 집어 삼켜야 한다,

제 한 몸 꾸미기에 바빠서 군데군데 긴 머리칼을 내던져 놓은 채 몸만 쏙 빠져 나간 딸아이 방도 들러야 한다. 아들놈 방도 별반 다를 게 없다. 짧은 머리칼과 함께 굵은 체모까지 뒤섞인 곳을 함께 휩쓸어 간다. 가끔은 남편의 붙박이 장소인 쇼파 근처도 들려야 한다. 전날 먹은 야식의 잔해들이 눈에 거슬리게 띈다.

이제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집을 나서야 한다. 수업 시작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북도 꺼내야 하고 출석부도 챙겨야하기 때문이다. 가방을 챙기고 손목시계를 비롯한 악세사리를 장착한다. 거울을 한 번 더 보면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의 스타일링도 체크한다. 손가락빗으로 머리를 쓱 빗어 넘기는데 이런!!! 오지 말아야 할 순간, 머리에 섬광이 지나간다.

가장 바쁘고 긴박한 순간에 섬광은 마치 우주의 혹성 하나가 폭발하면서 생기는 듯한 번쩍임을 동반한 채 나의 발목을 잡아 버린다. 가끔은 쌍소리도 나온다.

“에이, 씨...”

거울 앞으로 몸을 밀착시키고 눈알은 최대한 머리 꼭대기를 향해 부라린다. 좀 전에 그린 아이라인의 각도 보다 치켜 뜬 눈알이 더 높아 보인다. 한 손은 섬광이 지나 간 자리를 부여잡고 다른 한 손은 들었던 가방 대신 족집게를 찾아 든다.

얼굴 표피를 뚫고 나오는 뾰루지도 용서할 수 있다. 살아 온 세월의 시간만큼 팬 주름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나 흰머리만큼은 용서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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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에서 동상처럼 버티고 있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위 아래의 피부 톤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채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치켜 뜬 눈알을 부라리며 흰 머리 한 올을 잡겠다고 용을 쓰는 모습이라니....치켜 뜬 눈알로 인해 안압은 터질 듯 하고 검은 동자는 뒤로 넘어갈 것 같다. 눈알을 끌어 올리느라 이마는 찌그러지고 있었다.

신중과 집중을 반복하며 공을 들인 덕분에 흰 머리카락 한 올을 잡아냈다.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눈알을 얼얼했고 이마는 아직도 주름져 있다. 밤새 웅크리고 있었던 빨래의 구김처럼 말이다. 헛웃음이 나왔다.

엄마도 가끔 거울을 기대어 놓은 채 가르마 진 머리를 양손으로 누르고 눈동자는 머리 꼭대기를 향해 한껏 치켜뜨고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머리카락 하나를 찾아 해매고 있었다. 도저히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머리카락 한 올을 엄마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때로는 어린 나를 불러 앉히고 흰 머리 한 올에 십 원이라는 단가를 제시하며 베개를 베고 누웠다. 내가 유일하게 엄마를 가까이 두고 마음껏 엄마를 만질 수 있는 때는 흰 머리를 뽑아내는 시간이다. 보드라운 엄마의 머리칼을 이리 저리 흩트려놓아도 엄마는 꾸중하지 않았다. 그 시간만큼은 엄마 옆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마음껏 엄마를 부릴 수 있었다.

“ 이쪽으로 누워 봐.” “ 머리를 좀 더 숙여 봐.”

엄마는 곧 잘 내말을 들었고 하라는 대로 자세를 바꾸었다, 그러면서 당신이 엄마의 흰 머리를 뽑아내던 고래 적 이야기도 해 주었다. 외할머니도 엄마에겐 무서운 존재였던 것 같다.

엄마는 내게 결코 다정하지 않았다. 항상 나는 꾸중을 들었고 엄마가 무서웠다.

내가 잘 하는 것도 많았지만 칭찬을 해주면 그 자리에 안주해 버리고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까봐 채찍만 주었다며 아주 훗날 내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었을 때, 비로소 엄마는 후회를 하였다.

뽑아 낸 흰 머리 개수만큼 짤랑거리는 동전이 좋았을까. 아니면 엄마의 머리를 거리낌 없이 휘젓던 보드라운 기억 때문일까.

나도 가끔은 아이들에게 내 머리를 들이 밀고서 흰 머리카락들을 뽑아 달라고 부탁해 보았다.

한 올 당 백 원이라는 단가를 제시해도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염색을 하면 되는데 왜 굳이 뽑으라고 하는 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한다.

그건 나도 모르겠다. 염색하는 일이 번거롭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냥 내 머리를 온전히 아이들에게 맡기는 안락함을 즐기고 싶은 것은 아니었을까.

흰 머리 때문에 동동거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휴대폰 검은 화면 가득 뽑아 준적도 있다.

셀수 없을 만큼의 머리카락들이 즐비해서 그냥 만원으로 퉁을 쳐 주었다.

이젠 정말 출근을 해야 할 시간이다. 헤집었던 머리를 정리하느라 손가락빗으로 여기저기를 훑어가는데 아뿔싸 뒤통수 쪽 어딘가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지나간다.

뒤통수 쪽은 꽤 고난이도에 속하는 지역이다. 저 곳을 점령하려면 긴 시간과 공이 필요하며 눈깔의 뒤집힘과 찌그러질 이마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왜 섬광은 아침에만 목격이 되는 걸까. 분명 저녁에도 머리 감으면서 거울을 봤는데 말이다.

오늘 저녁엔 잊지 말고 뒤통수 지역의 흰머리를 전멸해 버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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