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짜 현실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짜 현실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2.10.1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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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이재원 역, 이후, 2007
수전 손택의  '타인의 고통' ⓒ위클리서울/ 이후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몇 달 전 J의 집에 놀러갔을 때 그의 책장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했다. 익숙한 제목에 익숙한 저자였지만 단지 많이 접해서 익숙했을 뿐, 작가와 내용을 바로 가늠하기는 힘들었다. 유명해서 유명하다고 아는 정도의 책. 손택의 글을 읽어본 적은 없었는데 왠지 뉴욕에 사는 바른 소리 잘 하는 지식인 같다는 이미지 정도가 떠올랐다. 왠지 읽어봐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고통’이라는 제목도 무척 중요하게 느껴지는 데다가가, 이름 난 책을 따라 읽고 싶은 마음도 컸다.

J는 자기도 다 읽지는 않았지만 그냥 빌려 가져가라고 선선히 허락해 주었다. 그는 요즘 책을 읽을 시간이 영 없는 모양인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친구들 집에서 가져온 책들이 몇 권 있다. 또 그렇게 내가 내어준 몇 권의 책 또한 있다.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는 책도 있고, 왜 여기 없는지 모르겠는 책들도 있다. 물론 빌려온 책들은 기억하고 있는 편이다. 최대한 낙서도 안하려고 혼신의 힘으로 노력한다.

이 책이 '사진'에 대한, 특히 전쟁사진에 대한 책이라는 것은 책장을 피고 나서야 알았다. 손택의 이야기를 내가 명확하게 이해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처음 읽어본 그의 글은 비교적 짧고 간명한 편이지만, 오히려 짧기에 배후에 있는 맥락을 바로 알아채기 힘들었다. 책의 후반부에는 자신이 20년 전에 썼던 '사진에 대하여'의 내용을 수정하는 대목이 있는데다가, 후반부에 부록으로 붙은 짧은 글들이 9.11 테러 이후 전쟁을 시작한 미국의 상황 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봐서, 이 텍스트가 놓인 사상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있을 것으로 느꼈다. 2000년 대 초 미국이 전쟁에 광분하고 유럽이 쉬쉬하는 분위기. 테러와의 전쟁이 선포되고 몇몇 국가들에서는 반미 감정이 대두되었던 그때의 분위기. 2000년대 초반 즈음까지 한국에도 이어졌던 반미 운동 분위기도 떠올랐다. 더불어 생각난 안티 조선 운동도. 이제 미국을 비판하는 한국인은 표면적으로는 많지 않아 보인다. 미국적 감각은 이제 한국에서는 거의 피부처럼 되었기 때문일까? 이 책에서 손택은 미국의 전쟁에 거의 학을 뗀다.

책의 내용을 짧게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가 ‘사진’을 경험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다. ‘전쟁 사진’을 경험한 것은 더 오래되지 않았다. 전쟁을 '사진-이미지'로 경험하는 것은 상당히 독특한 경험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경우, 우리가 전쟁의 실상을 생생히 담은 사진을 볼 때, 여과 없이 드러나는 인간의 악함을 마주하며 전쟁에 반대하게 될 것을 기대했다. 직접 마주하면 반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서 손택은 묻는다. “정말?” 사진이 회화나 다른 매체에 비해 현실을 비교적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 때문에 사진은 여전히 '기록의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나아가 다른 매체와 다르게, 특히 전쟁 사진의 경우 미적인 가치보다는 아마추어적인, 우연적인, 즉각적인 것의 미덕을 요구 받는다. 사진이 곧 현실 그 자체로 여겨지기 때문에. 인위적인 전쟁 사진만큼 이상한 것도 없다.

손택은 사진이 현실 그 자체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건 아니라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한다. 사진 이미지 자체의 특성에서, 사진작가가 어떤 조작을 행했거나 적어도 완전히 '우연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여러 삽화들에서, 사진 이미지를 둘러 싼 상황들에서 사진의 불투명성을 찾아낸다. 이미지를 설명하는 '캡션'이 어떻게 사진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되게 할 수 있는지를 포함해서.

어떤 전쟁의 사진들은 널리 유포되고, 어떤 전쟁의 사진들은 거의 기록되어 남아있지도 않는 경우들. 그 경우에 섞인 정치적 이해들. 사진 이미지는 가만히 있었더라도, 우리가 사진을 이해하고 겪는 방식은 결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지는 못한다. 때로는 오도한다. 이미 알고 경험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잔혹한 사진을 보고, 인체가 갈기갈기 찢긴 사진을 보고 두려움과 공포, 혹은 미묘한 쾌락을 얻는다. 사진은 대상화한다. ‘아 정말 인간은 사악해’ 하며 무기력하게 푸념하게 만든다. 혹은 잠깐의 연민을 보낸다. 거기에 있는 너는 고통에 있고, 여기에 있는 나는 안전하다는 표식 같은 연민을 남긴다. 이미지로 과포화된 스펙터클 속에서 현실을 마주한다는 '착각'을 겪으며 잠깐의 연민을 보내고 끝이다.

 

ⓒ위클리서울/ pixabay.com

꽤나 통렬한 사진 비판이기도 한데, 이렇게 끝은 아니다. 손택은 한 쪽으로 치우치려 하지 않는다. 손택이 몇몇 프랑스 사상가들처럼 현실 자체가 곧 복제되는 이미지, 오로지 이미지의 스펙터클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이미지가 현실을 완전히 덮어버렸다고, 혹은 이미지 자체가 곧 현실 자체라는 식으로 냉소하거나 비관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진 자체의 특성을 깎아내려고 하지 않는다. 사진에 대한 냉소는 돌이켜 보면 꽤 많았다. 전쟁 사진은 고고한 척 하지만 결국 인간의 고통을 관음하려는 것 아니냐, 스펙터클화된 고통을 포르노그래피처럼 소비하는 것 아니냐, 잠깐의 '충격'을 줄뿐 사람들은 어차피 무뎌지는 것 아니냐, 대상과의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사진의 특성에 대한 비판은 꽤 많았다.

손택은 거기에 대고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오바하지 마라.” 맞는 비판일 수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사진은 원래 그렇다. 그렇다고 사진이 구제불능의 관음 도구에 불과하냐? 그렇지 않다. 사진은 분명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다. 익숙해질지언정, 어떤 '충격'을. '타인의 고통'을. 다만 사진 그 자체가 곧 현실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되는 것뿐이다. 사진-이미지는 여러 다른 이미지에 뒤덮인 현실에 접근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사진이 완전한 현실 자체인 것도, 어떤 현실도 포착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현실 위에 겹쳐진 이미지를 겪고 현실로 들어가야 한다.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하는 진짜 현실을 틈새로 목도한 인간은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양심이니까. 그의 논의의 밑바탕에는 인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하는 어떤 도덕심이 강하게 깔려 있다. 손택처럼 올곧은 사람을 만나면 항상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렇다면 손택의 '행동'은 무엇이었나?

'타인의 고통'에서 그 현실을 어떻게 마주하고 행동해야하는지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게 부록이 붙은 이유일 것이다. 4개의 짧은 부록에서 손택은 미국을 성토하기도 하지만, 세르비아-보스니아 전쟁에 개입하지 않은 나토를 성토한다. 왜 직접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는지 따진다. 그에게는 분명히 '정당한 전쟁'이 있다. 인간의 양심과 인권이 뚜렷하게 존재하는 한에서는. 이게 이라크를 침공했던 미국의 논리와 표면적으로 비슷할 수 있다는(무언가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시작한다는 측면에서) 우려도 들었지만, 그렇게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의 고심을 모르지 않으므로. 참 대쪽 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짜 현실은 무엇인가. 멈춘 시간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전모를 목격한 이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진은 무엇인가? 사진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사진에 속지 말고, 사진이 슬며시 보여주는 어떤 틈을 통해, 조금씩 진짜 현실로 나아갈 수 있을까. 그것을 마주하면, 보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어쩌면 간단한지도 모른다. 정확히 보려고 노력할 것. 정확히 보았다면, 행동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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