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핵발전소 정문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노을이 숙연한 바닷가 마을에서 일출이 찬란한 바닷가 마을을 생각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가 지는 쪽 바닷가 마을에서 해가 뜨는 쪽 바닷가 마을의 미래를, 안부를 궁금해 한다. 그쪽의 미래는 곧 이쪽의 미래임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백 년 뒤에, 천 년 뒤에, 아니 십만 년 뒤에도 사람은 오늘과 같은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하는 강력한 의문의 덫에 나는 지금 걸려 있는 셈이다. 날마다 하루 종일 그런 의문에 빠져 있다면 아마 숨이 막히고 우울하고 절망스러워서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가끔, 어쩌다가 한 번씩, 그러니까 핵발전소 인근을 지나갈 때 잠깐씩 문득 그런 의문에 빠져들곤 하는 것일 뿐이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때도 그런 의문의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긴 했지만, 그 또한 일상은 아니었다.

십 만 년 뒤에 지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십 년도 아니고 십만 년이라니. 너무 아득해서 느낌조차도 없다. 백 년을 살기도 어려운 인간에게 십만 년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기 어렵다. 수학을 도구로 활용하는 과학자들에게 숫자와 기호는 보물이겠지만, 나 같은 문외한에게 숫자와 기호는 외계인의 언어인 것만 같아서 보면서도 볼 수가 없고, 들으면서도 들을 수가 없다. 때문에 핵발전소 가까이에 살면서도 그 위험성을 온 몸으로 절절하게 체감하지는 못 한다.

어쨌든 과학자들은 그렇게 말한다. 십만 년이라고. 핵발전소에서 나오는 고준위 폐기물이 품고 있는 인체에 치명적인 방사능을 사람이 어떻게 해볼 수는 없고, 자동으로 감소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 기간이 대략 십만 년으로 추론된다는 것이다.

전에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뭐랄까, 끔찍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먼 나라 남의 일처럼 여겨져서 그리 큰 느낌은 없었다. 그냥 하나의 상식으로만 저장해두고 있었던 셈이다. 상식도 내용이 매우 부실한 상식이었다. 이것은 이것이다 하는, 내용은 몰라도 껍데기는 알고 있다는 식의 근거 없는 자부심, 착각, 한 마디로 말해서 관념이었다.

이 관념을 사정없이 깨트려주는 한 장의 사진이 어느 날 내 눈에 띄었다. 월성 핵발전소에서 일어난 누수 관련 사진이었다. 전기를 만들어내는 핵물질은 수명을 다한 뒤에도 식지 않고 계속 열을 낸다. 그래서 물에 넣어 식히는데 그 기간이 삼 년이란다. 삼 년 동안 식힌 뒤에도 방사능은 여전하기 때문에 밀봉해서 따로 저장한다. 그런데 그 핵폐기물을 식히는 물탱크에 금이 가서 방사능과 뒤섞인 물이 새어 나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핵단지
핵단지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핵단지
준공기념탑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끔찍했다. 내 마음이 끔찍한 게 아니라, 사진으로 보이는 현장이, 한눈에도 그냥 소름이 확 끼치게 와 닿아서 살이 떨렸다. 오래된 청동처럼 여러 가지 기괴한 색깔을 띠고 있는데 그 자체가 나는 심각하게 오염됐어요, 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가면 물고기가 먹을 것이고, 사람은 그 물고기를 잡아먹을 것이다. 오염수가 땅으로 스며든다면 지하수와 섞일 것이고, 사람은 그 지하수를 뽑아 올려서 생활수로 쓰거나 농사용으로 쓸 것이다. 이때의 방사능 양은 미미해서 사람이 즉사하지는 않겠지만, 체내를 돌고 돌면서 갑상선 등 각종 암으로 발현될 것이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화장실과 하수구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집만 커다랗고 화려하게 지어놓은 꼴이라고 하면 말이 되려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우리의 선배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따위 맹랑한 짓을 벌였던 것인가.

도무지 어수선해서 책을 펼 수도 없고, 영화를 볼 수도 없고, 다른 뉴스를 찾아볼 수도 없었다. 집을 나서면 영광 핵발전소까지 자동차로 이십여 분 거리였다. 자동차 미터기로 21킬로미터가 나온다. 구불구불한 논두렁과 밭두렁을 빼고 직선으로 측량을 해보자면 아마 15킬로 남짓 정도일 것이다. 핵발전소에 사고가 터지면 이유 불문하고 대피해야 하는 것으로 돼 있는 30킬로미터 이내에 나는 지금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동네 마을회관 벽에 대피소라는 세 음절의 안내문이 붙어 있기도 하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아마 그런 정책을 쓰기 시작한 것 같은데, 이 대피소는 사실 이름만 대피소일 뿐 아무런 장치도 없다. 마을 사람들이 가끔 모여서 밥도 해 먹고 전도 부쳐 먹는 그야말로 마을회관일 뿐이다.

안전 불감증이 생활화된 나라의 형식주의라고나 할까. 관련 공무원들은 뭔가 매뉴얼 같은 것을 숙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뭐 그렇다. 대피소에 대피와 관련된 시설이 따로 설치돼 있지 않은 것은 주지의 사실이고, 사고가 터졌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주변에 한 명도 없다.

오랜만이다. 핵발전소 근처를 지나가는 일은 자주 있었어도, 육중하게 요란한 건물이 즐비한 정문 가까이까지 와 보기는 글쎄, 십 년? 이십 년? 어쨌든 예전에는 자주 왔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살벌했고, 치열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소리가 들린다. 창문을 완전히 닫은 상태의 차 안에서도 오싹하게,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위잉 소리, 공상과학영화 같은 데서나 들을 수 있음직한 소리가 어떤 때는 이명인 것만 같아서 귀속을 후비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몸으로 마구 날아드는 흡혈 곤충인 것만 같아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보기도 하지만, 소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한순간도 멈추지 않는 소리, 소리는 핵발전소의 숙명이다. 만약에 소리가 멈춘다면, 그것은 대형 사고가 터졌거나 터지기 직전이라는 반증으로 읽힌다.

 

보도블록교채중
보도블록 교체 중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보도블록을 교체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홍보관 견학을 나온 학생들이나 일 년에 서너 차례 다녀갈 뿐인, 보행자도 자동차도 거의 없어서 깊은 산속 암자 주변을 연상케 하는 고요한 거리의 보도블록을 죄다 걷어내고 새것으로 까는 이유는 혹시, 혹시 핵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누군가 고귀하신 분의 방문계획이도 잡혀 있는 것일까? 그런 쓸데없는 궁금증을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고 있는데 문득, 불현 듯이 오래 전의 한 삽화가 떠올라온다.

그 이름은 지금 생각도 나지 않는다. 행정부 서열 2위, 국무총리였다는 기억은 또렷하다. 방사능폐기장, 줄여서 방패장이라고 하는, 그 무시무시한 시설물 설치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절정에 다다랐던 어느 날이었다. 도무지 그 숫자를 헤아려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전국 도처에서 버스를 타고 달려온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경찰관들이 철모를 쓰고 곤봉을 들고 워커를 신고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었고, 국무총리가 다녀갔다.

그 시절에 핵발전소 홍보관은 지금처럼 고요하지가 않았다. 고요할 틈이 없이 날마다 바빴다. 학생들의 사생대회와 백일장 그리고 장기자랑 같은 각종 행사가 핵발전소 홍보관 주변에서 거의 매일 열렸다. 초등부터 중고등학교까지 학년 단위로 열리기도 하고 학교 단위로 열리기도 했다.

학생뿐만이 아니었다. 주부백일장도 있었고, 음악회 회원들의 연주회가 있는가 하면 미술협회 회원전이 열리기도 했고, 효도잔치 행사가 열리는가 하면 불우이웃돕기 바자회 같은 것이 열리기도 했다. 내용이 무엇이건 행사에 참가한 사람은 누구나 없이 선물 보따리를 안고 돌아갔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당시 핵발전소 홍보관 주변은 완전히 별세계였다.

이 별세계를 나와서 백여 미터만 걸으면 바로 전쟁터였다. 방사능 폐기장 반대 운동이 치열하다 못해 처절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곤봉과 방패와 철모로 무장한 전투경찰 대원들이 반대 운동가들을 밀어내는가 하면, 운동가들이 전투경찰 대원들을 밀어내는 일진일퇴가 끝도 없이 되풀이되었다.

그때는 그렇게도 치열했고, 절박했지만, 지금 와서 돌아보면 헛된 에너지 낭비, 국력 소모일 뿐이었다. 과학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때는 절대적 진리로 간주되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완전 엉터리였다. 그때 만일 고창과 부안 사이 위도 섬에 방폐장을 지었더라도, 지금 그 시설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확률은 거의 없었다. 세계 어디에도 그런 나라는 없는데 대한민국만 예외일 것인가.

과학은 발견의 학문이라고 한다. 발견이란 나날이 새로울 수밖에 없다. 어제 못 본 것을 오늘 볼 수도 있고, 오늘 본 것이 내일 잘못 본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그리하여 핵발전소는 인류가 저지른 실수 가운데 최대의 애물단지인 것으로 속속 드러나는 중이다. 세계 유수의 핵관련 학자들이 미국 어딘가에 수십조 원의 돈을 써가며 폐기물처리 방법을 연구한다고 할 때 한국도 조 단위의 돈을 지불하고 참여했지만, 완전하게 안전한 폐기 방법은 발견하지 못한 채 해산되고 말았다.

지하 깊은 곳에 불덩어리 마그마가 존재하고, 거대한 암반도 산산조각을 내는 지진 가능성이 상존하는 지구에서 핵폐기물을 땅속 깊이 묻어둔다 해서 안전할 것인가?

게다가 십만 년이다. 십만 년 동안 지질학적으로 아무 일이 없어야 핵폐기물이 품고 있는 방사능이 자연감소돼서 사람이 그나마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놀랍게도, 수명이 다 되어가는 핵발전소 18기에 대해서까지 수명연장을 검토한다는 발표를 했다. 이게 무슨 근자감에서 나온 배짱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래 전에 했던 인터뷰 한 토막이 생각난다.

 

살던 사람이 사라진 뒤의 망향각
살던 사람이 사라진 뒤의 망향각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때 고창과 부안에서 방폐장 반대 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됐었지만, 모든 군민들이 반대했던 건 아니었다. ‘내고향 발전협의회’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찬성을 외치는 사람이 많지는 않다 해도 어쨌든 있었다. 그 단체의 회장이 내가 잘 아는 선배였고, 지역신문 주주 자격으로 인터뷰를 했었다.

“에두를 필요 없이 그냥 질문 드리겠습니다. 방폐장 유치를 외치는 까닭이 뭐죠?”

“나도 에두를 필요 없이 막바로 그냥 답하지. 돈이 들어오잖아 돈이.”

“만에 하나라도 사고가 터지면 우리 고장 전체가 망하는데도요?”

“자네의 그 질문에도 이미 전제가 깔려 있듯이, 사고는 만에 하나일 뿐이지. 돈은 확실하게 들어오는 거고.”

“돈이 생명보다 중할까요?”

“우리가 지금 아주 빈한해져 버렸거든. 농사꾼은 사람도 아닌 세상이 됐다 이 말이여. 사람도 아니게 돼버린 나를, 우리를, 쓰레기만도 못해져버린 우리를 한수원이 구해준 거란 말이지. 이 운동 시작한 이후 나의 생활은 열 배 이상 윤택해졌단 말이거든. 돈이 생명보다 중하냐고 물었는데, 지금의 여기 이 나, 굶어죽지 않고 거지가 돼버리지도 않은 우리가 산증인이야. 미래? 그게 뭔 필요가 있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배가 고파서 쩔쩔 매는 목숨은 오늘, 지금, 이 순간이지만 미래는 그야말로 미래일 뿐 아무도 그게 어떻다고 확신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안 그래?”

듣고 보니 그럴 것 같아 보이기는 했다. ‘발전협의회의’ 회원 숫자는 보잘 것이 없지만, 회장과 부회장, 사무국장, 간사, 대외협력위원장, 홍보위원장 등등 감투를 쓴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활동비와 격려금 그리고 위험부담금 등 각종 명목의 돈을 받아오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뛰어난 논리를 개발해서 그들을 설득하려 한다 해도, 그들의 불안까지 어떻게 해볼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때도 그 점이 매우 궁금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것이 궁금하다. 도무지 그 끝을 알 수 없는, 결론을 낼 수도 없는 핵발전소라는 재앙을 옆구리에 끼고 살아가는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