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가지안테프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터미널의 군중들

처음 가지안테프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하루 종일 달린 끝에 겨우 도착한 터미널에서 내리는 순간, 둥글게 둘러서서 북을 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버스가 늘어서 있는 터미널의 주차장은 조금 습하고 축축했고, 그 사이사이로 점차 많은 사람들이 둥글게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처음 도착한 도시의 밤에 만난 축제가 너무나 반가웠을 테지만, 이번에는 어딘지 두려웠다. 가지안테프는 터키의 남동부에 있었다.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 도시는 아니었고, 특히 한국 여행객들은 찾아보기 힘든 곳이었다. 조금만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시리아가 있는데, 내가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까지도 시리아 지역에서 기승을 부리던 IS의 때문에, 더더욱 여행객이 찾지 않는 곳이었다. 물론 내가 갔을 때 IS는 이미 거의 끝난 상태였지만.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나는 터키에 온 김에 비교적 다양한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동부에 가보고 싶었다. 많은 터키 현지인들에게 동부 도시들의 안전에 대해서 묻고 다녔다. 10명은 족히 물었을 것이다. 가지안테프 같은 도시는 안전한가요? 시리아 근처에 있는데 괜찮은가요? 내가 묻자 터키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마치 어느 외국인이 한국인에게, 파주가 북한에 있는데 안전한가요? 라고 묻는다는 듯 반응했다. 거기가 대체 왜 위험하냐고, 가지안테프는 음식이 맛있는 도시라고. 아주 남쪽으로만 가지 않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나는 터키 동부 여행을 결심했고, 동부의 여러 도시들을 지났다. 관광 도시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터키가, 소수 민족인 쿠르드족이 살아가는 모습과 마음과, 중동의 문화에 깊게 영향을 받은 다양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그래도 동부는 동부. 밤에 처음 도착했을 때, 괜히 금단의 영역에 들어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북치고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어딘지 모를 위압감을 느꼈다. 너무 눈에 띄면, 열에 오른 군중이 나를 향해 이유 없이 달려들 것 같은 알 수 없는 기분. 나는 서둘러 짐을 챙겨 계속 함께 여행하고 있는 진과 함께 예약해둔 게스트하우스를 향했다. 그때는 정말 몰랐다. 내가 터키에서 동부 지역을 가장 좋아하게 될 줄을,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지안테프라는 도시를 가장 깊게 사랑하게 될 줄을, 지나왔던 여행지를 통틀어 다시 돌아가보고 싶은 도시 중 하나를 경험하게 될 줄을, 몰랐다. 나는 가지안테프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누리와 셀라미

두려운 마음으로 밤의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거리를 지나쳐 도착한 게스트하우스는 언덕 위에 있었다. 언덕이 많은 도시인지,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무거운 배낭을 이고지고 겨우 언덕을 올랐다. 겨우 몸을 움직여 게스트하우스의 문을 열었다. 게스트하우스는, 지금까지 경험해 온 여행객들의 게스트하우스와 느낌이 달랐다. 배낭에 워커를 신은 백인들이 빼곡한, 2층 침대로 가득하고 땀 냄새를 청춘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그런 느낌의 게스트하우스가 아니었다. 문을 열자 넓은 마당이 있었고 그 뒤로 한두 명이 들어가 묵는 방이 몇 개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한옥 같은 구조라고 해야 할까. 터키 현지인의 가정집에 가보지는 못했지만, 가정집처럼 편안한 분위기였다. 잘 가꾸어진 풀들이 군데군데 자라나고 있었고, 자연스러웠다. 어색하게 급조된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이곳에서 오래오래, 누군가가 편안하게 살았을 거라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곳이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가운데 작은 정원의 테이블에는 누군가가 앉아서 무언가를 마시고 있었다. 50대는 족히 넘었을 것 같은, 배가 나온 푸근한 아저씨였다. 그는 우리를 보고 앉으라고 했고, 그의 웃음은 편안했다. 막 만났지만, 어딘가 인생을 많이 겪고 한층 편안해진, 지혜로운 삼촌 같았다. 그의 이름은 셀라미였다. 우리가 그의 맞은편에 앉자 우리를 따라와 게스트하우스의 관리인 누리가 앉았다. 누리는 영어를 잘 하지 못했지만, 얼굴에 ‘착한 사람’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 사람이었다. 일부러 착한 표를 내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참 착한 사람. 몸에 베어 있는 친절이 상대방을 전혀 부담스럽게 만들지 않는 사람. 오래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만이 풍기는 느낌. 내가 터키 동부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내게 편안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누리와 셀라미는 허기진 우리를 위해, 배달로 양고기 케밥을 시켜주었다. 당연히 터키에도 배달이 있었을 텐데, 케밥이 배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당시에는 뭐가 그렇게 신기했는지 모르겠다. 늦은 밤에 도착한 케밥을 손에 들고 열심히 먹었고, 누리와 셀라미는 우리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셀라미는 우리에게 술을 권했다. 라크인지, 라키인지, 그 사이로 발음되는 전통주였는데, 하얀색 원액에 물을 부으면 곧 투명하게 변하는 신기한 술이었다. 약품에 향이 나는 듯도 하고, 펜넬 같은 향신료의 냄새가 났다. 그 투명하고 특이한 술을 들고 우리는 터키어로 건배라는 말을 처음 배웠다. 셰데페, 셰데페, 몇 번씩 외치며 우리는 함께 술을 마셨다. 너무 취하지는 않게. 낯선 도시에 도착한 긴장을 풀만큼. 우리가 잠들 수 있는 방을 바로 등 뒤에 두고. 그러나 긴장이 풀린 건 술 때문이 아니었다. 누리와 셀라미의 편안한 웃음 때문이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터키인들은 손님을 반기지. 누군가를 대접하는 건 정말 소중한 일이야. 셀라미가 말하면서 웃었고,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스탄불에서 무슨 사업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여러 지방 곳곳을 도는 출장을 나온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열정적인 비즈니스맨이라기보다는, 은퇴한 예술가 같은 인상을 풍겼다. 서두르는 법이 없었고, 늘상 여유로웠다. 대부분이 무슬림인 터키 사회에서, 그는 강건한 무신론자였다. 나 같은 사람은 터키에서 2%밖에 없다고 웃는 셀라미의 얼굴에는 어떤 자만도, 느끼한 자의식도 없었다. 그냥 인생에 너무 큰 무게를 두지 말라고 든든하게 이야기해주는 삼촌 같았다. 그는 담배에 필터를 하나 더 끼워서 피웠다. 이런 거 신기하지? 물으며 그는 터키의 문화, 터키의 술, 터키의 음식들. 그는 술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나는 조금씩 취기가 올랐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 사람들의 환대. 누리와는 번역기를 켜놓고 서로 궁금한 것들에 대해 묻고 놀았다. 순수한 호기심이 눈에서 어떻게 빛나는지를, 나는 누리의 눈을 통해 그날 알았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하얀 조명이 아름답게 빛나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기억의 미화일까? 너무 소중한 기억은 점점 더 빛난다. 그날 나는 사람을 본 것이 아니다. 그날 나는 사람의 마음을 보았다. 낯선 사람들을 환하게 맞아주는 낯선 사람들의 환한 마음을 본 것이다. 결국 미화된 기억일지라도, 이런 기억이라면 결코 잊고 싶지 않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