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잃어버린 옛 친구의 고향 냄새를 찾아서
고향을 잃어버린 옛 친구의 고향 냄새를 찾아서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2.11.03 08: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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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먹을 것 없는 맹감열매
먹을 것 없는 맹감열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흔적을 찾아보기도 어려운 옛 마을에 버섯 탐험(?)을 나섰다가 맹감을 만났다. 도시생활을 정리한 지 이십 년도 훨씬 넘은 내 눈에 맹감은 지금도 산기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해빠진 열매이지만, 고향이 수몰된 이후 줄곧 도시에서만 오락가락 했을 뿐 고향의 흔적이나마 찾아볼 생각조차 해볼 틈이 없었다고 하는 옛 친구의 눈에 그것은 대단히 신기했던 모양이다.

“야 저거, 저거 혹시 맹감 아니냐?”

그는 맹감을 보다가, 내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신없이 눈을 깜빡거리는 둥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감격의 눈물이라도 펑펑 쏟아낼 것만 같은 옛 친구의 아슬아슬한 호들갑이 신기해서 나는 한참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고맙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하고, 내 마음이 복잡했다. 어린 시절의 맹감을 잊지 않고 알아봐주는 게 고마운 것 같기도 하고, 얼마나 바쁘게, 얼마나 정신없이 살았으면 흔해빠진 맹감 한 번 구경할 시간도 낼 수 없었을까 하는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 같기도 하고, 내 마음을 내가 알 수 없는 순간이었다.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늘 배가 고팠던 시절에 맹감은 희망이면서 실망이고 절망이었다. 멀리서 보면 통통한 것이 주린 뱃속을 금방 가득 채워줄 것 같지만, 막상 달려가서 한가득 입에 넣고 씹어보면 뱃속으로 넘어가는 것은 하나도 없고 퉤, 퉤, 소리만 요란하다. 그나마 빨갛게 물들기 전, 풋사과 색을 띠고 있을 때 맹감을 톡 따서 입에 넣고 깨물면 살짝 시큼한 느낌과 함께 단맛이 입안을 돌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산속의 아스팔트
산속의 아스팔트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무엇보다 가을이 깊어져서 붉은 빛이 들기 시작할 때, 이때의 맹감은 탱탱하게 탐스러워서 뱃속을 금방 가득 채워줄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아이들은 너나없이 손에 한가득 따서 입에 넣고 씹어보지만, 맛도 향도 그 어떤 느낌도 없이 푸석푸석한 무슨 솜 같은 것이 굵은 씨앗과 함께 이빨에 느껴질 뿐이다. 그게 그렇다는 것을 아이들은 오래 전에 이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산에서 맹감을 발견하면 습관적으로 따서 입에 넣고 씹다가 에이 퉤, 소리와 함께 뱉어내기를 되풀이한다.

뭔가에 크게 속은 것 같긴 하지만 속은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희망과 실망이 공존하는 열매인 까닭에 각별한 기억으로,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아 있는 것일 게다. 그러니까 옛 친구는 맹감을 보는 순간 배고픔이 일상이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왔고, 그와 동시에 허둥지둥 살아온 지난 세월이 한강다리의 가로등처럼 일제히 한꺼번에 떠올라 오면서 감동과 슬픔과 회한 등등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의 도가니 속으로 푹 빠져버렸던 것일까?

어쨌든 오랜만이었다. 진짜로 오랜만이었다. 겨울에만 운영하는 서당에서 천자문에 떼고 ‘사자소학’을 공부할 때였으니 그때 나이가 여덟? 아홉? 어쨌든 열 살 이전이었다. 그 시절에 그는 쌓인 눈이 허벅지까지 차오르는 험한 산골짜기를 자기 형과 둘이서 어렵지만 정답게 통학했다. 둘이서 오가는 그 모습이 그림 같았다. 도시락을 싸 들고 아침 일찍 서달 마당을 들어설 때의 헉헉거리는 모습은 밀레의 그림처럼 애잔했고, 해가 산모퉁이로 떨어져갈 즈음 둘이서 산속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벌써부터 그리워지곤 했다.

‘산앙등이’를 넘어서 ‘오앵이골’을 지나 병풍바위를 왼쪽에 끼고 활처럼 휘어진 습지대를 건너 구름의 골짜기 운곡까지, 그 거리가 십 리도 훨씬 넘었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내가 사는 마을도 잘산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가 사는 마을은 그냥 대충 훑어만 봐도 가난이 천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마을은 그나마 논이라도 있고, 시야도 제법 트여 있었지만 그의 마을은 고개를 들어도 산이요 좌우로 돌려봐도 산이었다. 땅은 땅이라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흙을 찾아보기 어려워서 벼농사 같은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자갈밭에 콩이나 팥이나 참깨 같을 것을 심어서 거두는 걸 부업으로 하고 있었고, 주업은 복숭아나무와 닥나무였다. 해가 잘 드는 언덕에는 복숭아나무를 심고, 물이 흐르는 골짜기 근처에는 닥나무를 심는 식이었다.

 

모르는 열매
모르는 열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저수지 옆의 오래된 감나무
저수지 옆의 오래된 감나무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봄이면 화사한 복사꽃이 마구 피어나서 삼국지 속의 도원결의 장면을 연상케 하는 언덕배기, 여름이면 잘 익은 복숭아를 장에 내다 팔려고 머리에 이거나 지게에 진 어른들 뒤를 강아지처럼 촐랑거리며 따라가던 꼬맹이들이 자갈밭에 넘어져서 울음소리가 길게 메아리 돌던 골짜기, 가을이면 닥나무를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그것을 떡메로 쳐서 물에 담갔다가 채반으로 떠서 종이를 만드는 사람들의 웃음꽃이 그야말로 꽃처럼 화려했던 계곡 마을, 이 정다운 골짜기의 끝을 막아서 물을 채우면 영광의 핵발전소가 필요로 하는 물을 대고도 남는다는 계산을 정부에서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골짜기 마을에 한 명도 없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지금은 공청회다 뭐다 해서 주민들의 의견을 묻는 형식적인 절차라도 있지만 그 시절에는 아니었다. 그냥 일방적으로 통보가 나왔고, 보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한다는 대책이란 것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나의 옛 친구는 고향을 떠났다.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구백 명 이상 천 명 미만이었다.

그때 고향을 잃고 떠난 사람들 중 일부는 나중에 의기투합에서 망향비도 세우고 정자도 기념으로 세우고 했지만 나의 옛 친구는 한 번도 와보지 않았다고 했다. 정나미란 것이 확 떨어져서 생각도 해보고 싶지 않았다나. 그랬던 그가 이제 나이가 들고 다니던 직장에서도 정년을 맞이하고 보니 고향 생각이 났다는 거였다.

계기는 인터넷이었다. 인터넷에 개설된 고향 잃은 사람들 모임에 충동적으로 가입을 했고, 오프라인 모임에도 가끔 참석했다. 그런 어느 하루 내 이름이 우연찮게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내 이름을 듣는 순간 그는 어린 시절의 서당이 생각나면서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대나 어쨌다나. 그래서 내 연락처를 수소문하기 시작했고, 어렵게 전화번호를 얻어내긴 했지만, 내가 워낙 전화기를 가까이 두지 않는데다가 모르는 번호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탓에 실제 통화가 이루어지까지는 일 년 이상이 걸렸다.

아무튼 통화는 이루어졌다. 이름을 듣고 누구지? 하고 헤매지도 않았다. 이름 석 자를 듣자마자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기가 막히게도 “야 너도 살아 있었구나?”였다. 그리고 생각난 것이 닥나무 버섯이었다. 무슨 맛이었는지 디테일한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 씹을 때의 기분이 매우 좋았다는 막연한 기억은 남아 있었다.

 

무명지묘
무명지묘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옻나무단풍
옻나무단풍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다른 어디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버섯이었다. 첩첩산중 운곡리에서 용계리까지 뻗어있는 닥나무 밭 그 골짜기에서만 볼 수 있는 버섯이었다. 가을 한철 그 바쁜 와중에도 어른들은 단체로 닥 버섯 채취 날짜를 잡기도 했고, 엄마들은 고무줄넘기 놀이에 여념이 없는 누나들을 향해 “야 이것들아 가서 딱버섯이나 좀 따와라”하고 소리를 질러대곤 했다. 그리하여 어느 하루 누나들이 단체로 닥 버섯 채취 여행을 나서면, 꼬맹이들이 그 뒤를 졸래졸래 따르며 맹감 따위 먹지도 못할 것을 잔뜩 따다가 누나들에게 먹으라고 들이미는 등 온갖 장난질을 벌이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 버섯이 거기 어디에 있을까?”

내 입에서 감개가 무량하다는 투의 소리가 흘러나왔고, 옛 친구는 몰라, 모르지 뭐, 소리만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 허탈한 소리가 내 감정을 건드렸다. 딱히 무엇이라 할 수도 없는 반감이 솟아올랐다. 모르는 일을 모르는 채로 묻어둘 수야 있겠느냐. 한 번 가보자. 가서 확인해보자. 이렇게 해서 우리는, 옛 친구와 나는 물속에 잠긴 마을 앞 닥나무 밭을 찾아 나섰다.

물론 닥나무가 거기 어디에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나선 길은 아니었다. 그냥 한 번 가보는 것일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곳으로 깊이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거대한 저수지 앞으로 뚫린 길을 지나갈 때 습관적으로 힐끗, 또 힐끗, 미운 사람을 보듯이 착 가라앉은 마음으로 흘겨본 게 전부였다.

기대하지 않았던바 그대로 닥나무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열심히 찾아보면 어딘가에 한두 그루 정도는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찾아내 본들 무엇 하랴. 추억을 제대로 환기시켜주는 것은 오직 하나 맹감 열매뿐이었다. 생강나무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새빨간 열매가 잠시 눈길을 끌었지만 우리는 금방 지나가 버렸다. 시뻘겋게 물들어가는 개옻나무 잎을 발견한 옛 친구가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한 마디 했다.

“우리도 이제 곧 저렇게 되어 가겠지?”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무덤 앞의 상석 하나가 눈에 띄었다. 꼴을 보아하니 오랜 세월 풀숲에 덮여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그 앞에서 묵념하는 자세로 한참을 서 있었다. 옛 친구도 나를 따라서 묵념 자세를 취한 채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명지묘
무명지묘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함부로 들어가지 마
함부로 들어가지 마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찰랑거리는 저수지의 물소리가 투명했다. 맑은 물이었다. 정말로 맑은 물이었다. 손을 내밀면 맑음 그 자체가 잡힐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물은 멀리 있었다. 실제의 거리는 오륙 미터밖에 안 되지만 다가설 수도 없이 멀었다. 다가설 수 없도록, 만질 수 없도록 설치해놓은 방책이 육중해서 감히 넘어설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게다가 무시무시한 경고문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것을 훑어보고 있는 우리를 멀리서 감시하는 카메라가 아주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다.

우리는 아무 짓도 못 하고, 해보자는 용기도 내지 못한 채로 깔끔하게 닦아놓은 방책 옆 아스팔트길을 말없이 걸었다. 깊은 산속 저수지에 아스팔트라니. 생각하면 좀 웃기기도 했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오래된 감나무에 열린 감나무가 저수지 쪽으로 기울여진 채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한눈에 언뜻 봐도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 같았다. 이제야 비로소 그 시절의 흔적을 찾았구나 하는 마음이었는지 옛 친구는 한참이나 그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옛 친구의 그런 모습을 훔쳐보고 있는 내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우리는 점점 말을 잃어갔다. 조용했다. 고요했다.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면서, 그 마음을 읽어내려 애를 쓴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루했다. 왜 이렇게 지루한 거지? 생각해보니 아스팔트 때문인 것 같았다. 요철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아스팔트, 이렇게도 편안한 길 위에서는 걸으면서도 졸음이 오기 마련이다.

그렇지. 맞아. 그래. 산은 산다워야 산이고, 골짜기는 골짜기다워야 골짜기지. 아스팔트가 뭐냐 아스팔트가 응?

물론 그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핵발전소는 깨끗한 물을 필요로 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으니 말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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