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적, 청각적 자극을 지휘하는 리드미컬한 창작자 '패션 사진가 박정우'
시각적, 청각적 자극을 지휘하는 리드미컬한 창작자 '패션 사진가 박정우'
  • 우정호 기자
  • 승인 2022.11.15 08: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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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패션 사진가 박정우 인터뷰-1

[위클리서울=우정호 기자] 어떤 하나의 감각이 다른 영역의 감각을 일으키는 일을 ‘공감각’이라고 한다.
싱어송라이터 빌리 조엘은 글자와 음악을 색깔로 인지한다. 알파벳이나 음계에 따라 푸른색이나 녹색, 붉은색, 오렌지색이 보인다고 한다.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는 특정 색채나 채색된 물건을 보고 소리나 곡조를 떠올렸고, 이를 작품에 녹여냈다.
패션 사진가 박정우의 사진은 공감각적이다. 담백하지만 소란스러운 톤의 패션 화보의 한 장면에서는 스카 오케스트라의 화려한 사운드가 후두부를 울리고, 투명한 햇살이 잔뜩 내리쬐지만 어딘가 반항적인 청춘의 한 장면에서는 템포 빠른 8비트 리듬이 우뇌를 자극한다.
패션 사진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사진가 박정우를 신사동 ‘박정우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사진가 박정우 ⓒ위클리서울/ 박정우 제공

음악과 패션 사진의 상관관계

저마다의 멋과 소음을 발산하기 위해, 에너지를 한없이 범람시켜대는 금요일 저녁의 신사동. 어둡고 시끄러운 거리와 수술실처럼 밝지만 고요한 스튜디오의 대비는 거의 초현실적이었다.

스튜디오 안, 세 명의 어시스트와 한 명의 포토그래퍼는 금요일 저녁 여섯 시에도 마치 월요일 오전 열한 시 같은 컨디션으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큰 키만큼 긴 기장의 타탄체크 코트를 휘날리며 지시 중인 사진가 박정우는 일종의 지휘자이자 상황주의자 같았다.

압구정동과 청담동 어귀 지하에 위치했던, 제목 그대로 거대한 ‘BIG 스튜디오’를 운영해온 이 사진가는 최근 자연광이 내리쬐는 지상 꼭대기의 스튜디오로 본거지를 옮겼다.

“지상 스튜디오는 구현하려던 계획 중 하나였어요. 사진 작업에 쓰는 조명기기는 자연광에 가까울수록 그 퀄리티가 높다고 판단하거든요. 그런 자연광의 이점을 누리고 싶기도 했고. 해외에선 스튜디오들이 대부분 지상에 있거든요. 그런데 왜 한국에는 유독 지하 스튜디오가 많은가. 굉장히 현실적인 이유에요. 지상보다 지하가 월세가 싸서.”

“한국 패션 포토 스튜디오의 조건은 패션 브랜드와 미디어들이 몰려있는 강남에 위치해야 하거나 그와 최대한 가까워야 하고, 적어도 45평 이상의 규모가 되어야 하죠. 이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은 대부분 지하밖에 없어요.”

모니터 화면 속 시골길에서 색소폰을 불고 있는 소녀의 사진으로 시선이 향했다. 장이머우 감독 영화 속 시골 소녀의 순수함을 닮은 색감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사진 속 소녀의 세련된 페이스와 색소폰이라는 현대적 오브제가 협화음을 만들었다.

“최근에 찍은 개인 작업이에요. ‘쿼텟(quartet)’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아, 이건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장르에 각각 다양한 구성의 4중주 음악이 있지만, 재즈 4중주는 느낌이 조금 달라요. 넷의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묘하게 공존하거든요.”

“거기서 출발해 봤죠. 재즈를 좋아하는 네 명의 친구가 쿼텟을 하는 거예요. 근데 이 아이들은 일종의 아웃사이더들이면서, 각자 캐릭터도 달라요. 그렇지만 넷이 모이면 협화음과 불협화음이 모여 음악이 되는 거죠. 열네 살에 트럼펫 경력이 10년이 넘는 매력적인 트럼펫 연주자 곽다경 양을 찍은 이 사진들이 그 작업의 첫걸음이에요.”

윙크하며 한쪽 팔을 들어 O.K 사인을 보내는 ‘록스타’ 할머니, 기괴한 피로감을 내비치면서도 반항적이고 펑크록스러운, ‘수트’라기보단 ‘양복’을 입은 직장인들. 현대예술 작품을 앞에 서서 ‘도대체 어디서 무슨 의미를 찾아야 하나’ 20분씩 고민하듯 박정우의 사진을 고민스럽게 읽어낼 필요 없이, 그의 사진 속에서 음악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진들은 음악과 무조건 관련이 있죠. 그걸 빼고는 상상할 수 없고요. 자세히 보면 제 개인 작업 사진들은 음악 제목이 많죠. 예를 들어, 얻어터진 얼굴의 모델을 찍은 ‘FIGHTING FISTS, ANGRY SOUL’은 일본 펑크록 밴드 ‘하이스탠다드’의 노래 제목이에요. 제 사진을 보는 사람이 나와 같은 음악을 들었다면, 더 많은 걸 볼 수 있겠죠.”
 

'We Got The Jazz'_사진 박정우
사진가 박정우 작품 'We Got The Jazz' ⓒ위클리서울/ 박정우

‘록스타’ 꿈꾼 사진가

음악과 밀접한 패션 사진가가 새로운 종족 같은 것은 아니다. 시대의 아이콘이나 다름없는 패션 사진가 애니 레보비츠는 나체의 존 레논이 오노 요코를 감싸 안고 있는 롤링스톤지의 그 유명한 사진을 찍었고, 20대 시절을 롤링스톤즈의 믹 재거와 키스 리처드와 함께 ‘록킹하게’ 보냈다.

또, 폴 매카트니의 뮤즈로 알려져 있으면서, 지미 헨드릭스, 밥 딜런, 재니스 조플린, 비치보이스, 더 후 같은 로큰롤 거물들을 우리에게 친숙하게 만든 사진가 린다 매카트니도 있다.

그러나 박정우의 ‘음악적’ 사진은 더 직접적인 인과를 가졌다. 그는 크라잉넛, 노브레인을 필두로, 초창기 한국 인디음악 신을 구축한 몇 개의 펑크록 밴드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했고, ‘마이너 감성’이 훈장이나 다름없던 신에서 ‘팝’을 만들 줄 아는 몇 안 되는 뮤지션이었다.

“사진이요? 전혀 관심 없었어요. 어렸을 땐. 오직 락스타가 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어요. 사진을 직업으로 삼아볼 생각은 아예 해본 적도 없고. 홍대에서 열심히 밴드만 하다 의경으로 군대 갔는데, 1년쯤 지났을 때 휴가 나와서 속해있던 밴드 공연을 했어요. 그런데, 군대 가기 전이나 가고 나서나 홍대에서 밴드를 하던 그 열악한 환경 같은 게 아무것도 변한 게 없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어요. 이걸로 먹고 살 수는 없다.”

“군대로 복귀하자마자 바로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음악처럼 내가 생각하는 걸 구현해낼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그러다 내무실에서 누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를 읽고 있더라고요. ‘야, 그거 뭐냐.’ 하면서 봤는데, 잡지에 실린 사진들 보고는 ‘어, 되게 멋있다. 사진가라는 직업 멋있는데? 이런 거 나 잘 할 수 있을 거 같은데.’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게다가 밴드 음악과 달리 혼자서 할 수 있는 직업이기도 하니까.”

무언가 하겠다는 결심만으로 결과가 전부 이뤄진다면 자아실현에 실패한, 시기 질투를 직업으로 삼는 족속들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우는 ‘하고 싶으면 해내는 쪽’에 속했다.

“휴가 나와 집에 갔는데, 정말 우연하게 식탁에 ‘로모카메라’가 딱 있더라고요. 마침 아버지가 카메라 수집에 열을 올리고 계셨던 거예요. 그걸 가져가서 마음대로 찍기 시작했어요. ‘재밌다’는 생각 말고 저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했어요. 이걸 내가 제대로 한다면,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는 수준으로 잘 해야겠다.”

“군대에서 입시를 다시 공부했어요. 갖게 된 로모카메라로 틈틈이 사진 찍으면서 공부하고, 남는 시간엔 전부 수능 공부하고. 사진 실기 입시를 준비해야 했는데, 주위에 물어물어 어느 포토그래퍼를 소개받아 어머니와 함께 강남구청 쪽에 있는 그 분 스튜디오에 갔어요. 그런데 우리 어머니와 처음 대화할 때 그쪽에서 물어보는 말이 ‘말 안 들으면 때려도 돼요?’이러는 거예요. 강습비는 웬만한 직장인 두어달 치 월급을 한 번에 달라고 하지. 그래서 나오면서 ‘엄마, 걱정 마세요.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했어요. 그리고 정말로 혼자 입시 했지.”

그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에게 ‘막막함’이란 그런 것으로 보였다. 그냥 크게 한번 웃고 어이없어하면서 헤쳐 나가면 되는 것으로.
 

사진가 박정우 작품 'My beloved grandmother' ⓒ위클리서울/ 박정우

무모함과 추진력의 차이

“그렇게 사진과가 있는 학교에 들어갔어요. 사진과 관련된 기술적인 면을 잘 가르치는 걸로 알려진 학교였어요. 1년쯤 다니고 나니까 내가 어느 만큼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학교에선 다들 ‘좋아, 멋있어’ 그러니까 제대로 모르겠는 거예요. 밴드로 치면 공연을 해봐야 되는데 맨날 합주실에서 자기들끼리 좋다고 하는 것 같달까.”

“학교 들어가서 1년 동안 찍은 사진을 프린트해 책을 만들었어요. 이왕이면 외국 나가서 한번 물어보자. 미국은 여건상 가기 힘드니까 가까운 일본을 가보자. 그래서 전자사전으로 일본어 번역해가면서 자기소개를 쓰고 ‘내가 어떤 사진을 하면 맞을지 당신들이 보고 판단해달라’고 썼어요. 일본에 사진과가 있는 학교들을 찾아 주소를 적고는 집에다 ‘저 일본 좀 다녀와도 돼요?’했더니 엄마가 ‘어, 다녀와’ 그래서 그길로 공항으로 갔어요.”

이렇게 거침이 없는 사람을 살면서 두어 명 정도만 본 것 같다. ‘추진력’이란 단어를 옮기면 바로 그 사람이 된 듯한 사람들을.

”그날 도쿄행 마지막 비행기를 탔어요. 근데 문제는 그거였죠. 내가 일본어를 못 한다는 사실. 공항에 딱 내렸는데, 다 한자로 쓰여있고 무슨 말인지를 모르겠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어딘가 연락을 하려면 일단 일본 휴대폰이 있어야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휴대폰 판매점에 들어갔는데 마침 판매원이 한국인이었어요. ‘숙소는 정했냐, 일본어는 할 줄 아냐’ 물어보더니, 제가 너무 무모해 보였는지 한숨을 쉬고는 신오쿠보에 한국인들이 많다고 지하철을 같이 타고 가서 저를 내려줬어요.“

”숙소를 잡고 나서는, 사진과가 있는 일본 학교들을 돌아다니며 리셉션에다 ‘한국에서 왔다. 교수님 좀 만나게 해달라’고 하니까 어이없어하면서도 만나게는 해주더라고요. 그땐 지금 같이 ‘파파고’ 같은 스마트폰 번역기도 없고, 전자수첩으로 한 자 한 자 다 써가면서 들려줬어요. 그렇게 만난 일본 학교 사진과 교수가 ’당신은 스토리 구상 능력이 좋고 예쁜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패션 사진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일본의 사진과가 있는 다섯 군데 학교에서 박정우에게 돌아온 대답은 전부 ’패션 사진‘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사실 제 꿈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 거였어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성남훈 선생님이라고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끝내주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중앙대에서 강의하시는 걸 들으러 갔어요. 다큐 사진가들이 굉장히 여럿 있는 자리였는데 그분들이 얘기해 주시더라고요. 다큐멘터리 사진은 돈 거의 벌 수 없고 고달프다. 생계유지할 수 있겠냐. 대놓고 하지 말라고 하시는 분도 계셨죠.”

“충무로 현상소 앞 카페에 앉아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는 결정했어요. 패션 사진을 해야겠다. 그러고는 그달에 나온 패션잡지를 전부 샀어요. ’오중석‘이라는 포토그래퍼 이름이 제일 많이 보였어요.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패션 잡지는 보그(보그 코리아)니까 편집부에 전화 걸었어요. ‘저, 안녕하세요. 사진 전공하는 대학생인데 혹시 오중석 실장님 전화번호 알 수 있을까요? 제가 꼭 좀 뵙고 싶어서요.’하니까 자기들끼리 한참 얘기하더니 알려줬어요. 원래 절대로 안 알려준다고. 나는 운이 좋았나 봐요.“

”그렇게 오중석 실장님께 전화드렸는데, 스튜디오에 한 번 와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바쁜 스튜디오는 그때 처음 봤어요. 전 스텝이 거의 뛰어다니듯 하고. 하릴없이 앉아서 기다리던 중에 1층과 2층을 오가던 실장님이 절 보고는 갑자기 제 옆에 앉으셨어요. ‘그래서,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하고 직구를 던지시길래 바로 받아쳤죠. ‘일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래? 내일부터 나와. 그때부터 바로 시작했어요. 어시스턴트 생활을.“

한 달 반의 어시스트 생활을 끝내고 학교에 돌아갔을 때, 박정우는 스튜디오에서의 그 시간이 학교에서의 1년보다 더 많이 배웠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고달팠다. 잠도 거의 못 자는 박봉의 생활이, 프로 사진가로의 기약 없는 생활이.

”이쯤에서 차라리 유학을 가야 하는 걸까 생각했어요. 그러면서도 내가 진짜 목적과 목표가 있어서 유학을 가고 싶은 건지, 어시스트 생활이 힘드니까 도망가려는 건지 생각해 보고 있었죠. 그러고 있는데 오중석 실장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너 일할래?‘, ’저 유학 가려고 준비하는데요.‘, ’그래? 일단 내일 나와봐.‘“

”전화 끊고는 생각했어요. 그냥 가장 힘든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다. 그리고 결정했어요. 록 밴드 노브레인 노래 ’청춘 98‘ 가사 중에 ‘맨땅에 헤딩하리라’라고 있는데, 진짜로 맨땅에 헤딩 한거죠.“

그날 이후 박정우는 4년의 어시스턴트 기간을 더 버틴 뒤 독립해 프로 사진가가 됐다. 그는 ‘맨땅에 헤딩했더니 바닥이 뚫렸다’고 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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