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책 읽는 일기] '밀크맨'/ 애나 번즈, 홍한별 역, 창비,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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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오랜만에 만난 L에게 처음 이 소설을 추천받았다. 날씨는 조금씩 추워지고 있었는데 아직 충분히 춥지는 않았고, L을 배웅하기 위해 기차의 플랫폼에 함께 서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며 L은 내게 소설 몇 개를 추천해주었다. 나는 L을 많이 만나오지는 못했지만, L이 추천한 책은 거의 다 읽었다. 우리는 7년 전에 처음 만나 그 이후로 드문드문 만났다. 3년 전쯤, 또 한동안 안 보다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책을 추천해 주었는데, 몇 년이 지나 다시 우연히 만났을 때 오직 나만 추천한 책을 다 읽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게 좋았다.

최근에 이 책을 여러 사람한테 추천했던 것 같다. 처음부터 잡아들고 읽는데 무엇보다 재미있어서 좋았다. 첫 페이지를 피자마자 서술자가 날 것 그대로 사람들한테 속으로 쌍욕을 퍼붓고, 자신의 시선으로 본 어딘가 잘못된 사람들을 웃기게 그려 낸다. 읽다 보면 점점 더 웃을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도 하는데, 적어도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냉소적 에너지만큼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이어지는 편이다. 다 읽고 나면 기괴하고 슬픈, 그러나 무엇보다 '개 같은', 너무 개 같아서 만화적으로 웃기게 그리지 않으면 좀 버티기 힘든 어떤 사회를 하나 통과해 나온 기분이 든다.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조각나 버린 북아일랜드의 어느 도시. 아일랜드가 영국에서 독립하고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남았지만, 북아일랜드에는 영국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는 남았다. 거리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나누어져 버린 곳.

1970년대 북아일랜드 분쟁이 있던 벨파스트에서, 불어나는 자신에 대한 유언비어를 다 겪어내야 했던 18세 여성의 냉소적 목소리가 소설에 담겼다. 어느 날 반란군 지도자 '밀크맨'이 소녀에게 접근하고, 걸어 다니며 책을 읽는 괴짜 같은 방식으로 겨우 일상을 지켜 나나고 있던 소녀는 일순간에 반란군 지도자와의 불륜 파트너로 이름난다. 밀크맨은 조금씩 더 접근하고, 그가 은밀하게 다가올수록 소녀의 삶은 그곳을 살아가는 어딘가 모난 인물들과 함께 점차 무너져 간다.

끝도 없이 줄줄이 이어지는 문장들이,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하나의 목소리 안에서 폭력의 풍경을 삽화처럼 엮어 낸다. 아주 차가운 방식으로. 살아남기 위해 무감해진 목소리로. 불어나는 뜬소문, 지지부진한 사람들, 감정을 적출당한 것 같은 기괴한 인물들, 그 인물들의 기괴한 행동들, 차가운 냉소, 웃기는 비웃음, 드러나지 않아서 더 큰 흔적으로 남는 불안, 감정 없이도 내내 감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이어지는 문장들. 억압되어 보이지 않는 마음들을 복합적인 억압만을 그리면서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소설이었다. 모든 것이 '정치'가 된, 광포한 권력 분쟁 속에서 일상의 사람들이 어떻게 고장 나 살아가는지 슬프고 웃긴 삽화들이 선연하다.

 

애나 번즈의 '밀크맨' ⓒ위클리서울/ 창비

500페이지쯤 되는 긴 소설이지만, 한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초반부는 금세 읽었다. 다만 그 이후로 좀체 빠르게 읽을 수는 없었다. 분명 읽을 때는 재밌는데, 금방 빠져나오게 만드는 책이었다. 조금씩 빠져서 읽다가 다시 조금씩. 재밌는데 왜 빠르게 읽히지는 않지? 이상한 느낌이었다. 아마도 한 명의 이야기로 끝까지 이어지는 책인데다가, 그 안의 언어들이 과포화되어 있어서 그런 듯하다. 날 것으로 말하는 소녀의 화법은 직설적이고 웃기지만, 그 안에는 어떤 섬뜩한 마음이 있다. 저주하는 마음. 상처 받은 사람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감정을 적출하고 가시 돋친 냉소를 배운 마음. 그 마음을 천천히 따라가며 읽었다. 소설은 누군가의 감정을 투명하고 깊이 드러내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떤 ‘감정 없음’을 날 것으로 드러내 보인다. 되레 그런 방식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이런 소설도 있다.

이 소설의 서술을 바탕으로 '서술자'인 소녀를 생각하면, 밖으로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표현도 안 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고, 그러나 다른 속내가 있어 보이고 싶어 하지는 않고, 그러나 무언가 이상한 게 티가 나 '상도를 벗어난' 사람으로 취급받고, 아무튼 말은 거의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언어'가 끝없이 쓰인 것이 바로 이 책이라는 것은 또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소녀의 서술은 자기 속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감정 표현이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람들의 사건들에 대해서, 그 사건이 자신을 침범하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액션이 없고, 리액션만 있는 사람처럼. 행동 없이 반응으로만 세계를 조심조심 기어가는 사람들처럼. 그 사람들이 서로 소문을 내고, 행복을 믿지 않고, 행복을 '견디지 못하고', 압착되고, 억압되고, 모든 것이 정치화되고, 죽음은 오로지 정치적인 죽음만이 가능하고, 사람들은 정치적 목적을 찾아낼 수 없는 살인을 보고 혼란에 빠지고. 이 모든 것들이 언어라는 수렁 속에서 미끄러져 묶인다.

이 책이 맨부커 상을 받은 이후에 작가인 애나 번스 역시 갑자기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린 듯하다. 한 달 만에 4쇄를 찍었다. '사뮈엘 베케트가 북아일랜드 독립투쟁에 관해 산문시를 썼다면 이와 상당히 유사했을 것이다'라는 '데일리 메일'에 평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 평 때문인지, 읽으면서 자꾸 ‘고도를 기다리며’를 썼던 베케트와 베케트의 문학적 친구들을 생각했다. 소설의 내용 자체보다는, 내용을 말하는 방식이나 내용을 대하는 태도 때문에.

이 책을 읽은 이후로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읽었다. ‘밀크맨’이 곧바로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삶의 허망함을 꼿꼿하게 응시하는 어떤 시선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자꾸 베케트가 보였다.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극으로도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차에 어떤 일본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 속에 연극 장면이 그대로 들어가 있었다. 그 영화도 결국 삶의 고통에 대해서 말했다. 우리는 고통 받을 것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을 것이고, 그러나 고통 받는 이들은 잠시 마주 기대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그러나 고통 받을 것이고, 그러나 계속 살아갈 것이라는 말이 영화에 있었다. 고통을 없는 셈 치지 않고, 그렇다고 고통 속에서 그저 고개를 푹 숙이지도 않고, 힘겹게 찌그러져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살아가기.

좋은 문학은 그런 말을 건네준다. 정확하게 바라보고 그럼에도 살아갈 것. 너무 정확하게 바라봐서 좌절할 때도, 너무 살아가고 싶어서 눈을 가릴 때도 있겠지만, 그 사이에서 삶을 헤쳐 나갈 것. 그 사이에서 건져 올린 언어는 때로 문학이 된다. 밀크맨의 소녀가 끝없이 무언가를 말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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