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의 검문, 쿠르드의 도시
네 번의 검문, 쿠르드의 도시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2.12.15 09: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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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디야르바크르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쿠르드의 도시

디야르바크르로 가는 길에는 네 번의 검문이 있었다. 총을 멘 군인들은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를 검문소에 세웠고, 사람들의 신분증과 여권을 가져갔다. 검문을 받기 위해 여권을 내어 놓을 때마다 혹시 여권을 돌려받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군인들은 차분하게 네 번 모두 나의 여권을 돌려주었다. 가져가서 무엇을 확인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길어지면 10분 넘게 기다려야 하기도 했고, 터키 현지인들은 귀찮지만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졸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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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남동부에는 쿠르드족이 살고 있다. 쿠르드족 비율이 상당히 높고, 어떤 도시들에는 거의 쿠르드족만 있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족의 수도라고 불리는 도시였다. 현무암으로 만들어졌다는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고,, 그 성벽의 기원을 따져보자면 기원전까지 내려가는 오래된 도시였다. 로마 시대를 거치며 성벽의 기틀이 대충 완성되었다고 하는데, 나는 성벽보다는 어쩐지 이 도시를 지나쳐 가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디야르바크르에 갔다. 쿠르드, 라는 말에서 어쩐지 새로운 무언가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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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널리 퍼져 살고 있다. 터키 남동부부터 시리아 북부, 이란 등지에 이르는 지역에 오래 살아 왔다. 이란계 산악 민족이라고 하는데, 작은 단위로 쪼개져 오스만 제국 내에서 살아오다가 개별 국가들이 성립될 때 자기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그렇게 각 국가에 편입되어 소수민족으로 살며 각 국가에 어느 정도는 동화되었지만 그들 민족의 정체성은 여전히 잊지 않고 있다. 1970년대에 쿠르드족의 독립을 주장했던 무장단체 PKK가 디야르바크르 근처에서 생겨났고, 지금도 여전히 독립이나 자치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세력이 있다고 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문제다. 내가 네 번의 검문을 받아야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전히 몇몇 쿠루드족 사람들은 터키의 중앙 정부와 싸우고 있다. 더 동쪽으로 가면, 국경에 닿을 만큼 동쪽으로 가면, 무장 단체가 남아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죽고 죽이는 역사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소수로 남아 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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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야르바크르가 터키의 여느 도시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는 길에 검문이 있고 도시 군데군데 군인들이 보인다고 해도, 위험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최근 들어 발생한 소요 사태 같은 것은 없었다. 혹시 몰라 있는 군인들이 있을 뿐, 일상의 사람들은 똑같은 일상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현무암으로 지어졌다는 오래된 성벽과, 아마도 같은 바위로 만들어서 검었을 몇몇 건물들 때문에 디야르바크르는 내게 검은 도시로 기억된다. 어쩌면 바위의 색깔보다는, 구시가지의 골목길에 들어갔을 때 그림자로 꽉 차 있던 그 풍경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시는 검은색이었고, 특산물은 거대한 수박이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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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검지 않았다

이곳의 사람들은 다른 터키 사람들, 쿠르드 사람들이 그랬듯 우리에게 친절했다. 그러나 동양인 여행객들이 자주 오는 것은 아니어서 그런지, 우리를 조금은 어색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구시가지의 안쪽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 음습한 냄새가 났다. 사람들의 눈빛이라는 것은 참 신기해서 조금만 날카로워져도 티가 났다. 그들은 우리를 아주 약간 더 노려보았고, 옷을 입지 않은 아이들은 더러운 물이 고인 골목을 뛰어 다녔다. 못 사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했다. 그렇게나 오래된 도시에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그 오래된 자리에 붙박인 채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여행객의 마음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했으나 어떤 아저씨가 진과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 들을 수 없었으나 최소한 우리가 무례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진과 나는 골목을 나왔고, 동양인을 처음 보는 아이들이 경계와 호기심이 섞인 눈빛으로 우리의 뒤를 조금 쫒아왔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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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야르바크르의 상징이며 명물이라는 성벽의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았다. 서 있기는 한데, 전쟁이 난 이후에 아직 복원하지 못한 것처럼, 혹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보살핌을 받지 못한 사람의 얼굴처럼 상해 있었다. 직접 다가간 성벽은 생각보다 더 검었다. 성벽 위로 오르고 싶어 오르는 길을 찾아 성벽 주위를 돌았는데, 성벽 위로 올라가는 길은 조금 더 부서져 있었다. 조금 들어가 보니 위로 올라가는 길은 완전히 부서져 있고, 중간에는 누군가 불을 피운 자국들이 있었다. 까맣게 탄 자국과 쓰레기들. 청소년들이나 젊은 애들이 밤에 몰려와 놀았을 장면들을 상상했다. 무서운 애들이겠지. 혹은 다른 게 무서워서 스스로 무서워진 애들이거나, 무섭지 않아도 밤에 만나면 무서울 수 있는 애들이겠지. 검은 성벽에 검게 탄 자국. 진과 나는 성벽에서 나왔다. 진은 생각보다 실망한 눈치였다. 진은 오래된 것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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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지 디야르바크르라는 곳에 와보고 싶었을 따름이므로 별다른 실망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도시는 평화로웠다. 터키 서부와는 다르게 중동 쪽 양식으로 되어 있는 뾰족한 모스크가 시내에 있었다. 사람들은 모스크의 카펫 위에서 누워 졸았다. 날씨가 건조하기 때문인지 그늘진 모스크의 내부에 들어가면 시원하고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살짝 시원한 공기 속에 부드러운 카펫 위에 누우면 잠이 왔다. 진과 모스크에 누워 졸았다. 우리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여행하다가 화장실이 급하면 모스크를 찾았다. 역시 모두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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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는 유명하다는 맥주 집에 찾아 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중정 같은 곳에서 테이블을 깔아 놓고 맥주를 마시며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젊은 애들이 다 모여든 느낌이었다. 중정 사이에 나무가 있어서, 저녁이었지만 나무 그늘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어색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단단한 돌로 된 중정에서, 사람들이 계속 활발했다. 진과 나는 그 사이에 껴서 지나온 날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따금씩 궁금했던 것들은 이렇게 쉴 때 물었다. 사람들의 표정은 여전히 밝아서, 이때 도시는 검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는 체리를 한 무더기 샀고, 진과 나는 그 체리를 한참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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