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는 배송 중
산타는 배송 중
  • 김일경 기자
  • 승인 2022.12.22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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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 김일경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살다 보니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들이닥쳤다. 흘러가는 세월의 속도는 나이와 비례한다지만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광속을 달리고 있는 듯하다. 흩날리는 봄꽃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두터운 겨울 외투를 내려놓는가 싶었는데 화살촉 같은 한 여름 햇볕이 땀구멍 마다 내리 꽂혔다. 변화무쌍한 세상사와는 담을 쌓으며 변함없는 매일 매일을 살았는데 발걸음마다 서걱거리는 낙엽이 밟혔다. 그러다 보니 며칠 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 달이 되었고 성탄절이 다가 온다. 도무지 따라 잡을 수 없는 광속의 세월은 눈가에 잔주름을 조각하고 온 몸의 관절을 무력화하기에 이르렀다. 조각된 잔주름을 장착하고 삐걱거리는 관절을 달래야 할 나이가 되었건만 아직도 나는 미련하고 눈치도 없고 어리바리하며 뒤뚱거리는 삶을 살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산타를 기다린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 하고 얼굴에 거뭇한 기미가 가득한 나를 산타가 찾아 올리는 만무하겠지만 말이다.

한 때는 내게도 산타가 찾아 왔었다.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보지 못했다고도 할 수도 없다. 우리 집엔 굴뚝이 없었지만 왠지 굴뚝을 타고 내려 왔을 것 같은 느낌으로 희뿌연 연기에 휩싸인 어렴풋한 형체를 느끼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게 편지도 남겨 주었다. 눈에 익은 글씨체이긴 했지만 나의 행복을 진심으로 빌어주는 마음 씀이 느껴졌었다. 머리맡에 소담스럽게 놓여 진 선물꾸러미가 어느 해엔 양말이었고 어느 해엔 연필이기도 했다. 내겐 신을 양말이 있었지만 새 양말을 놓아 주었고 필통엔 쓸 만한 연필이 있었어도 새 연필을 놓아 주었다. 정말 갖고 싶은 학용품이나 입고 싶은 예쁜 옷들은 절대 놓아주지 않아서 조금 섭섭하기도 했다.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을 왜 모르는 걸까 궁금했다. 아마도 우리 엄마처럼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거나 갖고 싶은 것들에 대한 나의 절박함이 산타에게 전달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하긴, 전 세계 아이들에게 전달할 선물을 준비하려면 돈이 엄청 들기도 할 것이다. 연필이든 양말이든 해마다 잊지 않고 찾아주는 게 어디냐 싶어서 내년엔 정말 갖고 싶은 것을 콕 집어 열심히 기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끔은 산타가 찾아오지 않은 친구들도 있었다. 그런 친구들은 평소에 착하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내 눈엔 착해 보였지만 산타의 판단 기준엔 어딘가 부족했기 때문에 성탄 전야의 방문 목록에서 제외됐을 것이라 생각했다. 공부도 못하고 동생도 잘 돌보지 못해서 늘 엄마에게 꾸중만 듣는 내게도 찾아오는 산타가, 그렇게 마음 좋은 산타가 오지 않았으니 혹시 나쁜 마음을 가진 친구들일까 싶기도 했다.

부모님이 산타 대행 역할을 한다는 믿지 못할 소문도 돌았다. 잠든 사이에 엄마나 아빠가 머리맡에 선물을 놓아두는 것을 보았다는 두더라 통신이 나를 화나게 했다. 증권가 지라시나 소위 카더라 통신이 온갖 헛소문을 양산해 내며 피해자들이 속출하는 경우가 있듯, 친구들이 말하는 놓아 두더라의 두더라 통신에 현혹되지 않으려고 무지 애를 썼다. 산타를 본 경험담도 말하고 편지도 받았다며 한껏 변명해 보았지만 두더라 통신을 이길 수는 없었다. 오히려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나이에 맞지 않은 덜 떨어진 정신연령을 갖고 있다며 놀림도 받았으니 분명 두더라 통신의 피해자임이 분명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산타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해야 했다. 현실과 상상을 구분 못하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두더라 통신의 피해자라며 애면글면 하는 것이 기가 찾는지 어느 날 엄마는 산타의 부재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산타의 부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요, 눈 쌓인 길을 조심조심 걷다가 뒤로 자빠져서 코가 깨지는 상황에 버금갈 만한 황당무계한 사건이었다.

소담한 선물 꾸러미 속의 양말, 새 연필 그리고 왠지 익숙한 글씨체의 편지가 이해되었다. 내 머리맡에는 절대로 놓아질 수 없었던 나의 위시리스트는 산타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산타는 떠났고 이후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내 아이들의 산타는 지켜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성탄 전야는 모두에게 설레는 밤이었다. 기어코 산타를 만나겠다며 버티다가 시나브로 잠이 들면, 나는 숨겨놓은 선물을 들키지 않고 머리맡에 무사히 배송했다.

하룻밤 안에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하는 산타의 고단함을 걱정하던 아이들이 초콜릿 과자와 오렌지 주스를 마련해 두기도 했는데 달달한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와 남편은 서로 떠넘기며 산타가 다녀간 흔적을 남겼다. 편지는 자판을 두들겨 프린트함으로써 필적을 남기지 않는 주도면밀함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보다 영리했고 현실을 정확하고도 빠르게 직시하였다. 산타의 선물이 대형마트에서 본 것과 똑같다며 의구심을 품기 시작하더니 몇 해를 버티지 못하고 정체를 들켜 버렸다. 엄마 아빠가 소곤거리는 소리를 다 들었다며 마치 기나긴 숨바꼭질 끝에 숨은 이들을 모두 찾아낸 술래의 의기양양한 모습이랄까. 산타의 부재가 청천벽력 같았던 나와는 달랐다.

이쯤 되면 아이들이 영리한 것인가 아니면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바리한 탓인가 고민하게 된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위클리서울/ 김일경

며칠 전, 지역의 동아리 단체들이 모두 모여 공연을 펼치는 행사가 있었다. 주관하는 문화재단측은 행사를 마칠 때 까지 참여하는 동아리들이 모두 자리를 지키며 즐기자는 의미로 마니또 선물을 준비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무작위로 추첨된 누군가와 교환하게 될 선물을 준비하는 일이 흥미진진하기도 했지만 조심스럽기도 했다. 뜨개질을 할 줄 아는 손재주가 있으니 작은 카드 지갑을 만들기로 했는데 상대방이 좋아해 줄지, 마음에 들어 할지, 꼭 필요한 물건이 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이 들었다.

수 년 째 나에게 수업을 듣는 난타 회원들에게도 전해줄 선물을 준비했다.

동아리 행사 때 마니또로 준비한 카드 지갑이 괜찮은 평을 들어서 똑같은 것으로 회원 수 만큼 만들었다. 미니 모자가 달린 예쁘고 앙증맞은 카드 지갑이 그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산타가 되어 다음 수업시간에 전달하려 한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복지관 어르신들께는 미니 모자를 떠서 작은 열쇠고리를 만들었다.

잠든 사이에 몰래 놓고 가는 풍채 좋은 산타는 아니지만 나의 소박하고 보잘 것 없는 선물이 그들의 마음에 작은 감동으로 선사되기를 바라며 준비했다.

엊그제는 갓 담근 김장김치를 들고 동생한테 다녀왔다. 김치는 꼭 있어야 할 한국인의 밥반찬이니 동생에게 김치는 산타의 선물이 되지 않았을까.

산타의 고단함을 걱정하며 간식거리를 챙기던 아이들에게도 머리맡에 선물을 놓아두는 산타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평소에 갖고 싶어 하거나 꼭 필요할 것 같은 것을 준비해서 산타의 마음으로 대놓고 전해줄 뿐이다.

누군가의 산타가 되어 깜짝 선물을 전해주는 내게도 산타가 다시 와주었으면 좋겠다.

눈에 익은 필채의 편지와 함께 양말이든 연필이든 소담스럽게 선물을 놓아 주던 나의 산타가 많이 그립다.

고맙고 소중한 사람들, 귀한 인연들에게 내 마음을 전달하고자 그들의 산타가 되어 열심히 배송중이다. 구주가 오셔서 기쁜 성탄을 맞이하며 우리 모두에게 많은 사랑과 축복이 넘쳐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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