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탐방기] 평창국제평화영화제 1화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인사이드 아웃 포스터
'인사이드 아웃' 포스터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행복은 기쁨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머릿속에 기억의 구슬이 존재한다는 설정이 있다. 기쁨, 소심, 분노 등의 감정으로 구분된 구슬들은 소중할수록 장기 기억의 창고에 저장된다. 주인공인 11살 ‘라일라’의 머릿속은 단순한 감정으로 이루어진 구슬들로 평화로운 세계를 유지해왔다. 좋고 싫음이 명확하고, 이를 든든한 가족 안에서 보호받으며 안온한 일상을 보냈다. 울타리인 줄 알았던 가족이 내 선택권을 침해하는 벽으로 둔갑하는 건 순식간이다. 원하지 않았던 이사와 동시에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라일라의 내면에 비상이 걸린다. 복잡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더니, 행복한 기억을 몽땅 잃어버리기까지 한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기쁨을 담당하는 ‘조이’는 슬픔이 구슬에 번지는 일을 막으려 분투한다. 라일라를 위해 기쁨이 담긴 구슬들만 모아 보관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사실 슬픔 덕분에 그 뒤의 기쁨이 더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장기 기억으로 저장된 핵심 구슬엔 슬픔과 기쁨이 공존하고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성장할수록 단순한 감정은 복잡해지고, 그 속에 숨은 행복을 찾는 일은 어려워진다.

 

인사이드 아웃 스틸컷
'인사이드 아웃' 스틸컷 ⓒ위클리서울/ 다음영화

영화가 은유한 기억과 감정의 메커니즘은 해를 거듭할수록 깊이 와닿는다. 내 기억 구슬 중 어릴 적에 만들어진 것들은 라일라가 그랬듯 여행을 가서 행복했다거나 부모님께 혼나 슬펐다는 식의 단순한 감정이다. 사춘기는 진작에 통과하고 감정의 극단도 경험해본 지금은 구슬의 색이 시시각각 변한다. 연인과 행복했던 기억은 이별 후 슬픔으로 덮이고, 세상에 분노했던 기억은 술자리에서 들려줄 법한 재밌는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2022년을 돌아보는 지금, 장기 기억 창고에 보존될 기억은 아무래도 폭우가 쏟아지던 6월의 평창이다. 내 머릿속에선 그 무엇보다 다사다난하고 알록달록한 구슬이었다. 본래 순서대로 탐방기를 쓴다면 한참 뒤 순서지만,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편을 먼저 당겨서 쓰는 이유다.


합격은 언제나 관할 밖의 영역에 있다

기억의 시작은 돈이었다. 8월에 열릴 정동진독립영화제에 반드시 놀러 가고 싶었다.(영화제 탐방기 중 정동진독립영화제편 참고.) 낮엔 수영을 하고 밤엔 영화를 보는 그 낭만을 아득바득 참았던 팬데믹이 끝나가고 있었다. 올해는 기필코 가리라 다짐했지만, 주말 아르바이트 수입은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만으로 빠듯했다. 방학 중 기존 스케줄에 지장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단기여야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 안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온갖 어플과 사이트를 전전하다 문득 영화제 단기 스태프가 생각났다. 보통 영화제는 짧으면 3일, 길면 10일간 열려 내 조건과 딱 맞았다. 문제는 그 정도의 단기 업무는 무료로 자원봉사자를 활용하고 스태프는 최소 2,3달 정도의 근무 기간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다. 영화제는 구조상 수익을 내기 어렵고 늘 허리띠를 졸라매며 운영하기 때문이다. 좌절이 이어지던 차에 유일하게 평창국제평화영화제가 손을 내밀어줬다. 딱 5일만 일을 하면 급여를 준다고 했다. 적은 금액도 아니었다. 이게 웬 떡인가 싶어 헐레벌떡 지원서를 넣었다. 속셈을 들켰는지, 아니면 나 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면접을 본 후 단박에 탈락했다. 뜨뜻미지근하던 면접관의 목소리와 자격증 하나 없는 내 서류를 떠올리면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기쁨에서 체념으로 얼룩진 구슬은 그대로 버려질 운명이었다. 장기 기억 창고에 보관할 만큼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때 갑작스런 추가 합격 소식이 날아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무조건 할 수 있다고 외치고, 다시 스케줄을 비워 급히 짐을 쌌다. 왜 떨어졌고 왜 합격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에 배정된 분야가 처음 지원한 곳과 달랐고, 지원한 곳에 훨씬 어리고 활발한 친구들이 모여있는 걸 후에 보며 자연스레 납득했다. 나름 영화제 관련 경력이 쌓였다며 자신했건만, 열정이나 새로운 세대의 유입 같은 가치가 우선된 것 같았다. 영화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팀원들을 보며 처음 불합격했던 일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제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영화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에 일조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 관점에서는 너무나 타당하고 옳은 선택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소망일 뿐,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따지자면 내 부족함을 셀 수나 있을 것인가. 확실한 것은 역시 합격 같은 건 운이고 우연이라는 점이다. 능력도 중요하겠지만 면접관의 개인적 취향에도 맞아야 하고, 지원한 분야와 내가 딱 맞게 떨어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불합격도, 추가 합격도 당시엔 납득하기 어려워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올림픽 메달 플라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올림픽 메달 플라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어느새 나이가 들었다

성숙한 척했지만, 평창에 서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시작이 조금 꼬였다 보니 5일간의 여정을 미리 그려보고 기대하는 일은 없었다. 도시와 멀리 떨어진 한적한 마을에 아는 사람 없이 홀로 떠나는 일이라 긴장이 앞서기도 했다. 건강하게 완주해 무사히 돈을 받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으니, 어리면서도 늙은 마음이었다. 영양제, 구급약, 향초,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책 같은 걸 잔뜩 챙겼다. 웬만한 것은 현지에서도 살 수 있지만, 몸과 마음을 챙기고 치료하는 물건은 개인적 역사성이 있을수록 큰 도움이 된다. 먼 길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의 금송아지를 찾았던 것처럼 익숙한 편안함이 필요하달까. 더 긴 여정에도 배낭 하나면 충분했던 20대 초반을 떠올리면 그새 나이가 들어버린 것 같아 조금은 서글펐다. 집 밖에서 먹고 자려면 필요한 게 많은 까다로운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손목이 꺾이도록 무거운 캐리어를 집에서부터 끌고 나와 기차 선반에 올리는 동안 땀에 흠뻑 젖었다. 정말 사서 고생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도착지는 평창이 아닌 진부 기차역이었다. 영화제가 진행되는 마을이 진부역에 더 가까웠다. 최종 도착지까지 이동하려면 현장 스태프가 운전해주는 차를 얻어 타야 했는데, 여기까지 와놓고 운전을 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 창피하고 면목이 없었다. 면허가 있는 소수의 스태프가 먼 길을 여러 번 왕복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일을 하겠다고 나서 시작부터 민폐를 끼친 것 같았다.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함께 차를 탄 일행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한적한 도로를 굽이굽이 달리던 차에선 꽤 시끄러운 힙합 음악이 흘렀다. 그래도 숨이 막히도록 조용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운전대를 잡은 매니저님도 어색함에 진땀을 흘리며 괜히 노래만 틀었다고 한다. 서로 자신 때문에 상대가 불편할까 봐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딱 그 차에만 우연히 평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타 있었다. 사회생활 경력이 있다 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기쁨보다 조심성이 앞서는 것이다. 90년대생인 필자가 나이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도 우습지만, 새로운 세대가 등장할 때마다 노화의 속도는 빨라지기 마련이다. 우린 다른 대학생 팀원들에 비해 나이가 많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면허가 없다는 사실에 입을 꾹 다물었다.
 

평창은 정말 평화로운 풍경 속에 있었다

어느 래퍼의 목소리만 고요하게 울리며 도착한 마을은 올림픽메달플라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거창한 이름과 달리 휑한 황야에 올림픽을 기념할 수 있는 세계 국기들과 캐릭터 동상이 전부였다. 광장 밖에는 작은 경찰서와 백반집, 감자 창고와 집 몇 채가 이루는 소담한 풍경이 있었다. 그래도 올림픽의 영향인지 새로 생긴 것처럼 보이는 식당과 카페가 꽤 있었는데, 적은 주민들만으로 마진이 남는지 걱정이 될 정도로 한적했다. 평화 영화제인 만큼 정말 평화로워서 좋았지만, 먹고 사는 문제로 본다면 관광객 유치가 시급해 보였다. 지역 살림을 꾸려나가는 이들이 올림픽 이후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은 것 같달까. 영화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된다면 그보다 뿌듯한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미리 들었다. 나는 영화제를 이끄는 프로그래머도, 몇 달을 준비한 스태프도 아니었지만 영화제의 존재 목적에 대해 열심히 생각했다. 사색에 최적화된 마을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남겨져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전체 인원을 기차역에서 데리고 오다 보니 모두가 모일 때까지 시간이 걸렸다. 현장은 거대한 무대를 설치하는 중이었다. 웅장한 음악과 영상이 반복적으로 틀어져 바로 옆 사람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았다. 부산스럽고 소란한 와중에 축제의 한가운데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나 두근거렸다. 오늘은 어떤 업무를 받게 될지 궁금해하며 기다렸고, 마침내 모든 스태프가 모였다. 총괄 스태프 팀장님이 간단히 자신을 소개한 후 내일부터 사용할 옷과 식권을 나눠줬다. 대대적인 자기소개나 교육이 이뤄질 줄 알았는데 30분 만에 끝이 났다. 이대로 해산하고 내일 보자는 인사에 모두가 어리둥절했다. 진짜 숙소로 들어가면 되는지 믿을 수 없어 어물쩡거렸다. 영화제는 큰 축제이고 모든 요소에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터라 오히려 추가 근무를 각오한 상태였다. 개막식 전날이라 할 일도 많을 텐데 팀장님은 얼른 돌아가 쉬라며 등을 떠밀었다. 외진 곳까지 와준 스태프들에 대한 영화제 측의 사려 깊은 배려였다. 전체 인원의 숙소 비용도 막대하기 때문에 하루를 그냥 날려 보낸다는 사실을 더욱 믿을 수 없었다. 첫날 평창국제평화영화제의 인상은 단연 놀라움이었다.

 

올림픽 메달 플라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올림픽 메달 플라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영화제에는 어떤 사람들이 모이는가

숙소는 영화제가 열리는 플라자에서 작은 하천을 건너면 금방 나오는 호텔이었다.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조금씩 걸음을 옮겨 다 함께 숙소로 걸어갔다. 고즈넉한 전원적인 풍경에 호텔이 우뚝 서 있는 것도 신기했다. 관광객은 정말 없는지, 훈련을 온 운동선수들 말고는 투숙객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두 사람씩 방을 같이 쓰기로 되어 있어서 룸메이트가 된 친구와 함께 카드키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제 막 처음 만난 사람과 방부터 들어가는 것이 아무래도 어색했다. 티를 내면 하루 종일 어려울 같아 넉살이 좋은 척 먼저 말을 붙였다. 룸메이트가 된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밝게 화답했다. 아직 서로의 기본적인 신상정보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변죽 좋게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술술 불었다. 사람을 사귀기 위해 온 것 같았다. 방이 제각각 떨어진 게 아쉽다며 다 같이 모여 노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설마 우리 방이 만남의 광장이 되면 어쩌지. 조용히 쉬며 컨디션을 관리하고 싶던 차에 괜히 활발한 척을 했다는 후회와 걱정이 번졌다.

방에 들어가 짐을 풀자마자 밖으로 나가는 것이 편하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허기가 졌다. 룸메이트도 배가 고픈 듯했다. 식권을 사용할 수 있는 식당을 알아보니 메밀 막국숫집이 있었다. 강원도 출신인 조부모님의 영향으로 메밀면에 향수를 느끼는 편이라 반가운 소식이었다. 호텔에서 도보로 5분밖에 걸리지 않아 룸메이트도 만족스러워했다. 자신 있게 메뉴를 추천한 뒤 맛있게 먹는 노하우까지 일러줬고, 평소 식사량이 적다는 그녀는 연신 감탄하며 한 그릇을 다 비웠다. 밥을 먹는 동안 소개팅에 나온 사람들처럼 자신에 대해 소개하는 대화도 나눴다. 동안이라 훨씬 어린 줄 알았지만 동갑이었고, 영화 전공을 배운다는 공통도 있었다. 그녀는 원래 일반 대학을 다니다 미디어에 관심이 생기면서 입시를 다시 치렀다. 취업 걱정으로 불안해하는 또래들 사이에서 용감하게 예술 대학으로 진학한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다. 자신이 무얼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예민하게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탐구하는 일에 열심이다. 그것만으로도 매력적이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진로의 방향을 바꿔버린 결단력은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신입생이 되어 자신보다 2살이 어린 동생들과 동기로 지내면서도 그녀는 조급함을 느끼지 않았다. 졸업을 앞둔 당시에도 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어 기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평창의 영화제까지 왔다. 돈을 벌기 위해 온 나와는 달랐다. 그녀의 결핍은 경험에 기준을 두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느 주인공의 서사를 지켜본 느낌이 들었다. 역시 섣부른 편견이고 걱정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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