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없는 새가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면
발 없는 새가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면
  • 김혜영 기자
  • 승인 2023.02.01 08: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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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탐방기] 평창국제평화영화제 2화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망망대해를 함께 헤쳐 나갈 동료를 찾다

룸메이트인 J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지난 편에 쓴 것처럼, 그녀가 살아온 단편적인 이야기를 듣는 잠시 동안에도 어떤 주인공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키가 작고 동그란 큰 눈을 지닌 그녀가 씩씩하게 자신의 길을 헤쳐나오는 모습을 즐겁게 상상했다. 보통 자전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을 땐 상대를 세심하게 고려하지 못하고 부담을 주거나 거만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일부러는 아니고,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쉽게 심취하게 돼서 그렇다. 이렇게 낯선 영화제에 올 때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누군가의 감정적인 이야기를 잔뜩 듣게 될지 모른다고 미리 예상하곤 한다. 반면 J의 이야기는 발랄하면서도 담백했다. 나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닮고 싶은 화법이었다. 그녀는 쉽게 구겨지지 않는 단단한 밝음을 지녀 곁에 있는 사람을 미소짓게 만들기도 했다. 흔하지 않은 데다 부러운 능력이었다. J는 대화가 끊기고 정적이 흘러도 불편한 티를 내지 않았고, 쉬고 있을 땐 눈치 빠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덕분에 즐겁게 어울리다가도 각자의 쉬는 시간을 갖는 일이 가능했다. 처음 만난 사람과 5일간 같은 방을 써야 한다는 사실이 꽤나 부담이었는데, 이런 룸메이트를 만난 것은 분명한 행운이었다.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대화가 술술 풀리니, 어느새 J의 고향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녀는 울산, 나는 서울에서 자라 우연히라도 마주친 적 없는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신기한 것은, 그럼에도 겹지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몇 년 전에 근무한 영화제의 동료 P가 그녀와 같은 대학의 동아리 후배였다. P와는 사무실이 달라 많이 가까워지지는 못했지만, 스쳐 지나갈 때마다 역시 밝고 단단한 인상을 준 사람이었다. 그 동아리는 사람의 인상과 성격을 많이 보는 곳인가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의 분위기는 닮아있었다. 세상엔 아직도 밝고 건강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반가운 마음에 P에 대한 대화를 이어갔다. 마치 소개팅에서 어떻게든 공통분모를 찾아 인연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 같았다. 실은 우리 모두 P와 가깝다고 말할 수는 없는 사이라는 사실은 뒤에나 고백했다. 같은 일을 했던 동료, 같은 동아리였던 후배 이상의 관계로는 발전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상관없었다. 한창 취업 준비에 열을 올릴 시기에 홀로 이탈해 이곳 평창까지 와있는 우리는 이 여정에 동료가 더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함께 대화 나눌 수 있는 겹지인이 있다는 것 자체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훗날 다른 스태프와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처음 보는 이가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인사를 건네왔다. 아무리 인사성이 밝아도 굳이 걸어올 필요는 없는 먼 거리였기에 의아한 상태로 인사를 받았다. 그는 한참 내 얼굴을 바라보며 고민하더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일한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해는 아니었고 작년에 일했다고 답하자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았다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는 특이할 것 없이 흔한 인상이라 그가 타인과 착각했을 확률이 높았다. 전주에선 최대한 혼자 다니며 조용히 일을 했기에 나를 본 것 같다는 그의 말을 쉽게 믿지 않았다. 그래도 역시 반가운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장국영이 하얀 나시를 입고 춤을 추는 장면으로 유명한 영화 <아비정전>에는 발 없는 새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늘 날아다니다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쉬는 새는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바로 죽을 때다. 극단적 예시이긴 하나, 영화라는 망망대해를 헤매던 나도 굳세지 못해 고독하거나 지치는 때가 많았다. 발이 없어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날기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동료의 호의가 섞인 인사에 문득 뒤를 돌아보니 나도 모르는 새 이곳저곳에 내 작은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전국의 어느 영화제를 가도 익숙한 얼굴 한두 명은 마주칠 수 있는 날이 어느덧 현실로 다가왔다. 아직 갈 길이 멀고 완벽하게 충만한 날이 올 순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충분했다. 성큼성큼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이들을 이렇게 가끔이라도, 오래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화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우리가 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점심 식사로 돌아가서, J와 메밀 막국수를 다 먹어가는 동안 친구 H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내일 이곳 평창에 놀러 오기로 한 터였다. H는 규모가 큰 상업 영화의 연출부로 갑작스레 들어가게 되어 여행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설마 될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원서를 넣었다가 덜컥 붙어버린 것이다. 그는 눈치를 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지만,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무조건 극장으로 달려가게 만드는 감독의 복귀작이라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실감이 난 후에는 너무 잘됐고 영광이라는 말을 반복하며 내가 더 신이 났다. 안심한 H는 당장 내일부터 출근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개막식을 앞두고 서로의 첫 근무가 겹친 날이었다.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며 대책 없이 사는 우리가 그래도 열심히 잘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친구의 기쁜 소식이 나에게도 큰 위로가 됐다. 당장은 막막해도 그냥 이렇게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길이 열린다는 말이 진실인 것 같았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것보다 감상하는 일을 좋아하는데, H는 꼭 감독을 하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공부하는 중이다. 나보다 더 어려운 길을 가는 친구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건넸다. 다른 건 몰라도, 성실하고 끈기 있게 하는 사람은 꼭 될 거라고. 너는 될 거라고.

J에게도 기쁜 소식을 전한 뒤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그녀 또한 기대하며 기다리던 영화에 지인의 지인이 참여한다는 소식을 흥분하며 들었다. H와 계속 잘 지낸다면 언젠가 그 감독님을 직접 뵐 날도 오지 않을까. 어떤 영화의 어떤 지점을 좋아한다고 말씀드리면 팬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쓸 데 없는 망상을 나눴다. 우리의 웃음소리가 커지는 만큼 해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팀복과 식권을 받기 위해 잠시 광장에 모였을 땐 커다란 그늘 안에 있어 더운 줄 몰랐다. 추위에 지친 지금은 기억도 가물가물한 2022년의 6월 22일. 여름은 여름이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J가 후식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애타게 찾는 동안 나는 로켓처럼 빠른 배송을 자랑하는 사이트에서 햇빛을 차단해줄 쿨토시를 구입하고 이온 음료 여러 개를 숙소 냉장고에 쟁여두었다. 냉장실에 뒀다가는 밖에 나간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냉기를 잃고 뜨거워질 기세였다. 음료수만으로 냉동실을 가득 채운 후에야 안심하고 침대에 누워 숨을 돌렸다. 캐리어를 챙겨 집을 떠난 지 몇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이미 녹아버린 몸은 적응을 마친 듯했다.

문제는 마음이었다. 슬프거나 우울할 일은 없었다. 그저 마음이 시차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 살다가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 시대에 온 사람마냥, 빠른 기차를 타고 먼 장소로 이동하는 일에는 영 적응이 되질 않는다. 걷거나 말을 타고 중간중간 쉬어가며 천천히 여정을 보내야 이런 부작용이 없을 것만 같다. 시간을 꼭꼭 씹어 삼키지 못하면 체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해야 하나. 첫 근무 전날이라 긴장이 온몸을 감도는 것도 한 몫을 차지했다. 평소 돌발 상황을 피하고 예측 가능한 테두리 안에서 일상을 계획하고 보내기를 좋아한다. 좁은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기 딱 좋은 성향이라 일부러 타지에서 열리는 영화제에 스스로를 던지곤 한다. 차이가 있다면, 보통의 영화제들은 도착하자마자 바쁘게 일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바로 업무에 투입되면 정신없이 일을 하다 자연스레 적응이 된다. 암사자가 절벽으로 몰아넣은 새끼 사자처럼 군소리 없이 강해진다. 그러니 내일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간이 흐르길 기다려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훨씬 어려웠다. 차라리 일을 시켜달라는 심정이었다. 내일 갑작스레 자신이 없거나 해본 적 없는 업무를 맡을까봐 걱정돼 상상만 늘었다. 미리 시물레이션을 돌리며 준비하고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마음을 다스리는 일뿐이었다. 룸메이트가 있어 향은 피우지 못하고 조용히 가져온 책을 꺼내 읽었다. 익숙한 작가의 익숙한 글을 읽으며 심장 박동이 느려졌다. 이런 순간을 늘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잠에 들었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폭우가 쏟아졌다

다음날, 일찍 눈이 떠졌다. 숙면을 취하지 못해 피곤했지만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아침을 챙겨 먹어야 체력을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마침 일어난 J와 함께 근처 백반집으로 향했다. 뜨끈한 국물과 든든한 고기반찬을 기대했건만, 이른 시간이라 식당은 닫혀있었다. 어쩔 수 없이 영화제가 열리는 올림픽메달플라자 근처의 아무 분식집에 들어갔다. 다른 손님은 없었고, 기술팀으로 보이는 스태프들이 식사 중이었다. 같은 영화제에서 근무하지만 교류할 일이 없는 분야라 어색하게 목례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J는 가장 유명해 보이는 김밥을 시켰다. 촬영 현장이든, 영화제이든 이놈의 김밥은 피할 길이 없다는 생각에 입맛이 달아났다. 원래 김밥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일할 때 먹는 김밥은 식사를 대충 때운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마침 시간도 여유 있겠다, 절대 김밥은 먹지 않겠다는 의지로 제육 덮밥을 시켰다. 딱 예상한 맛이었다. 그래도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근로 환경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배부르게 식사를 마쳤다. 평소 아침을 먹지 않는다는 J가 제 발로 나를 따라 나와 김밥을 다 비우는 것을 보는 것도 기분이 좋았다. 반대로 날은 점점 더 흐려졌다. 쿨토시와 이온 음료를 구비할 정도로 더웠던 날은 어디로 감춰졌는지, 안개로 가득했던 마을에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광장에는 어제 도착했던 인원이 복장만 바뀐 채 그대로 모였다. 벌써 친해졌는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장난을 치고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제 쉬기만 한 건 우리 방뿐인가 싶어 눈치를 살피니 같은 마음으로 긴장 중인 사람들도 보였다. 축제의 현장엔 어디서든 무리를 형성해 그 중심이 되는 인간형의 사람들이 많아 늘 텐션의 격차가 심했다. 혹 그러한 분위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먼저 다가가자는 선배의 마음으로 한명 한명을 살펴봤다. 완전히 시혜적인 의도는 아니었고,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과는 나도 친해지고 싶기 때문이었다. 통성명을 하고 서로의 룸메이트를 파악하며 어색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왠지 잘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친구와 괜히 더 말을 붙이는 동안 전체 총괄 팀장님이 도착했다. 오늘은 개막식이 열리는 날이기 때문에 기존 팀대로 업무를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한 팀이 되어 일을 하게 된다고 했다. 자리에 서 있는 대로 그때그때 인원수를 나눠 각각의 업무 지시가 떨어졌다.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해 먼지를 닦고, 게스트를 위한 대기 공간을 조성한 뒤 선물을 포장하는 식의 단순 업무였다. 모두 첫 근무에 의욕이 넘쳐 해야 하는 일보다 일을 하려고 나서는 사람의 수가 더 많았다. 적극적으로 팔을 걷어붙인 사람들 사이로 일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쭈뼛거리며 주변의 쓰레기라도 치웠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인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반팔 차림으로 이리저리 땀방울을 흘리며 돌아다니다 잠시 자리에 앉았다. 개막식을 위해 잔디에 플라스틱 의자를 일일이 조성하고 먼지를 닦는 일이 가장 고됐다. 이제 그 작업도 모두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수많은 게스트 이름을 정리하고 미리 전달받은 표대로 분류하는 동안 다른 스태프들과도 대화를 나누며 점점 친해졌다. 이대로라면 모든 것이 순탄할 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다.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맞아도 상관이 없는 수준의 작은 빗방울이었는데 이제는 우산을 써도 무용지물인 폭우였다. 모두가 당황해 하늘만 바라보던 차에 어디선가 총괄 팀장님이 나타나 우비를 찾아 입으라고 말해주고는 다시 바쁘게 사라졌다. 물품 상황을 잘 아는 기존 스태프들이 창고에서 우비 박스를 찾았고, 나를 포함한 단기 스태프들은 미리 합을 맞춘 사람들처럼 바로 박스를 나르고 하나씩 나눠 가졌다. 갑자기 기온이 떨어져 미리 받았던 기능성 바람막이를 입고 그 위에 우비를 걸치니 펭귄처럼 덩치가 커졌다. 이런 복장으로 어떻게 재빠르게 몸을 놀리나 걱정했지만 오산이었다. 기껏 먼지를 닦은 플라스틱 의자는 바람을 타고 날아온 빗방울로 다 젖어가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시 광장으로 달려가 휴지로 의자를 일일이 닦고 그 위에 종이로 된 게스트 명패를 붙였다. 우리가 비를 맞거나 껴입은 옷 때문에 둔해지는 일 따위는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간단히 고정만 시키면 되는 간단한 작업이 글씨가 번지지 않도록 고려해야 하는 불가능한 미션으로 탈바꿈했다. 하늘은 무심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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