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무조건 싫고 연애는 무서워서 못 하고
결혼은 무조건 싫고 연애는 무서워서 못 하고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3.02.06 10: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얼마 만에 맞이하는 찬란한 태양인지 모르겠다. 벌거벗은 매화나무 가지에 꽃처럼, 새처럼 내려앉은 눈 위로 이른 아침 태양빛이 찬연하게 내리꽂힌다. 태양은 빛나지만 아직 바람은 매칼해서 눈이 녹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게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꿈속인 것만 같다. 믿기지 않는다. 어찌 이렇게도 고요하게 서정적인 아침을 맞이하고 있단 말인가. 그토록 심한 바람이 불었는데도 아직 매화나무를 떠나지 않고 찰싹 붙어 있는 저 눈꽃송이들은 대체 무슨 에너지를 내장하고 있는 것인지, 너무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다.

설 명절 집안 행사를 끝내고 한숨 푹 자고 난 뒤부터 시작된 눈보라는 목불인견이요 아수라장 그 자체인 것만 같았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이런 사태는 생전 처음이라는 듯 비명을 질러대며 집안으로 날아든다기보다 그냥 바람에 휩쓸려들고 있었고, 감나무 가지가 우둑우둑 부러져서 지붕을 강타하는 것이어서, 집이 통째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릴 것 같기도 하고, 눈 속에 푹 파묻혀버릴 것 같기도 했다.

금세기 최대의 화두인 기후위기 아니 기후변화라는 거, 그것이 이렇게 오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 와중에서도 나는 아 참 다행이다, 안 가도 되겠구나, 안 봐도 되겠어, 하는 안도의 한숨을 은근히 내쉬고 있었다. 그런 나 자신이 조금은 한심하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지만 뭐 어쩔 것인가. 일은 이미 벌어져 있어버린 것을.

사람이 잘난 체를 해도 어지간한 소재를 갖고 해야지, 아무 것이나 덥석 물면 큰일 난다는 것을 나는 철없게도 이제야 알았다. 알아도 크게 알았고, 깊이 알았다. 알았다 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알면 알수록 문제는 더욱 커져 가는,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참으로 난감한 앎이다.

그것은 명절이 지나고 나면 으레 달려와서 나를 쩔쩔매게 한다. 그것은 때로 웃는 얼굴에 칼을 든 잔혹한 채권자 같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 올가미를 내 목에 걸어놓고 슬슬 잡아당기는 사냥꾼 같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저항을 할 수 없고, 저항을 하고자 하지도 못한다. 어떤 경우에도 나는 그냥 웃어야 한다. 웃는 얼굴로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요새 젊은 녀석들이 말이야, 아 그것 참, 하고 짐짓 내 생애 최대의 난제를 만났다는 표정을 지어야만 한다.

그게 벌써 육 년? 칠 년? 하여튼 꽤 됐다. 최소한 육 년 이상을 나는 명절만 됐다 하면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런 세월을 살아 왔고, 살고 있는 셈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처음 그런 얘기를, 부탁을 들었을 때는 그거 재미있겠다, 해볼 만한 일이기도 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별 고민도 없이 그럽시다, 알아봅시다, 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마 잊었을 것이다. 완전히 잊었다 하기는 어려워도, 최소한 내 의식의 지평에 중매라는 두 음절의 단어가 우뚝 서서 나를 감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스쳐가는 바람처럼, 농담처럼 그 얘기가 슬쩍 나왔었고, 나 또한 별 생각 없이 흘려듣고 말았던 셈이었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객원기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그때가 아마 그녀의 큰딸이 이십대 나이를 훌쩍 넘어 삼십대를 한참 달리기 시작할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친구와 그리고 두세 명의 남자가 함께 어울려 무엇인가를 먹던 자리였다. 가벼운 회식 자리란 게 으레 그렇듯이 이런저런 온갖 소재의 이야기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함께 어지럽게 떠돌았다.

그때 어느 순간 그녀가 “우리 딸 시집 좀 보내줘”, 하고 외쳤다. 농담이 아니었고, 농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지도 않았다. 그때 그녀의 그 소리는 말이 아니었다. 외침이었다. 절규였다. 누군가 옆에서 잘못 건들면 금방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절박한 표정이기도 했다. 그녀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하다가 그렇게 급변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시끌시끌하던 좌중은 일순간 침묵모드로 전환되었다.

침묵이 너무 낯설고 불편했던 것인지, 남자 하나가 짐짓 호기로운 목소리로 최고급 양복 한 벌 준비됐느냐 어쩌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그녀는 즉각 양복이 문제냐, 승용차라도 한 대 뽑아줄 수 있다고 받아쳤다. 그것은 명백하게도 농담이 아니고, 너스레도 아니었다. 그 말을 하고 있는 그녀의 표정과 억양에 진지, 두 글자가 오롯이 드러나 있었다.

그때부터 분위기는 매우 진지해져 갔다. 세상이 너무 이상해져 간다고, 큰일이라고 걱정하는 말들이 어지럽게 떠돌던 어느 순간 누군가 나를 지목하고 나섰다. 털털거리는 고물차나 끌고 다니고 있으니 새 차가 필요하다는 게 첫째 이유였고, 여기저기 다니는 데가 많으니 아는 사람도 많을 거라는 게 둘째 이유였다.

안 된다고, 못 한다고 손사래를 칠 분위기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의 표정이, 나를 쳐다보는 그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너한테 이런 부탁을 하고 싶었어, 그렇지만 못 했어, 못한 이유는 너도 알 수 있지?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대충 그냥 그럽시다, 알아봅시다, 하는 식으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을 뿐이었다.

그 뒤로 두 달인가, 세 달 뒤에 그 비슷한 얘기를 또 들었다. 이번에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큰아들이 서른 살을 넘어 마흔으로 치닫고 있는데 결혼은커녕 연애조차도 안 해서 그 부모가 죽을 맛이라고, 어디 적당한 데 있으면 중매 좀 서 달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때의 그녀가 떠올라 왔다. 나이를 대충 계산해보니 남자가 두세 살 더 많았다.

유연 치고는 공교롭구나 싶었다. 공교로운 우연을 필연으로 전환시킬 수만 있다면, 그러면 나도 좋고 너도 좋고 모두가 좋을 것만 같았다. 나는 짐짓 엄숙한 기분으로 그러나 중매와는 무관하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투로 남자의 이력을 대충 파악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란 단순한 게 아니어서. 하나를 알고 나니 다른 궁금한 게 자꾸 생겼고, 그래서 계속 물어보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날의 그 엄숙한 질의응답 자체가 나에 대한 신뢰랄까, 확신이랄까, 하여튼 나를 휘어잡는 올가미로 작동하기 시작했던 것을, 그때는 당연히 그런 불길한 상상 같은 건 해보지도 못했다.

어쨌든 예비 신랑의 이력을 파악한 뒤에는 예비 신부의 인적사항 및 경력 파악에 나섰다. 가족들에게 직접 듣는 것만으로는 신뢰성 문제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노골적으로 나대면 실패했을 경우 난감하겠다 싶기도 해서 틈날 때마다 동네 사람들에게 한 마디씩 툭툭 던져보는 방식의 이를테면 탐문을 했던 것이지만, 그런 잔꾀가 비밀완수를 보장해 줄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어리석게도 나는 양쪽 다 부모들이 내가 그동안 해온 탐문 활동을 모르고 있을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 벼락처럼 깨달았다. 나를 대하는 양쪽 부모들의 태도가 일반적인 친절의 차원을 크게 넘어서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낀 것이었다.

그 이전에도 나와 그들의 관계는 그럭저럭 제법 좋은 편이기는 했다. 그 동네 앞을 지나갈 때면 생각나는 얼굴 중에 하나였고, 길에서 우연히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고 헤어지면 뒤를 한 번 정도는 돌아보는 뭐 그런 관계였다.

아주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관계가 언제 이렇게 찰싹 붙어버린 거지? 하고 의아해 한 계기는 빵이었다. 그 명칭만으로도 유명하고, 비싸기로도 유명한 빵집 앞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예전처럼 반갑게 인사나 하고 헤어진 게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만나보기 어려운 사람이라도 만난 듯이 그녀는 활짝 핀 해바라기처럼 웃는 얼굴로 “빵 좋아하시죠? 좋아하신다는 거 알아요.”하면서 내 팔을 붙잡고 빵집으로 끌어들였고, 나는 얼떨결에 끌려들고 말았다.

내가 빵을 좋아하긴 하지만 찐빵이나 호빵, 단팥빵 정도였지 그렇게도 비싸고 모양도 화려한 빵은 구경조차도 처음이어서, 깊은 잠속에서 갑자기 깨어난 기분으로 이게 뭐지? 뭐지? 수도 없이 물음표를 던지다가 아하 그렇구나 하는 순간을 잡았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객원기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내가 은밀하게 탐문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 이후로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만나면 뭔가를 자꾸 주고 싶어 했고, 가능한 한 십 분이라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마주앉아서 하는 이야기란 구십 퍼센트 이상이 자신들의 아들, 또는 딸에 관한 일종의 자랑이었다. 아들이 며칠 전 퇴근길에 극장에 가서 혼자 영화를 봤는데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서 그 영화 이야기를 한 시간도 넘게 들려주었다는 둥. 큰딸이 미국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찍은 사진을 보내 왔는데 내 딸이지만 너무도 아름다워서 자다가 꿈에서도 보았다는 등등 뭐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나중에야 눈치를 챈 일이지만, 양쪽 다 부모들이 내게 바라는 것은 단순한 중매 차원의 것이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탐문 행각으로 알아낸 것은 남자, 여자, 두 사람 모두 결혼 같은 것엔 일체의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남자는 남자 친구만 있었고, 여자는 여자 친구만 곁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남자는 혼자서 영화 보는 걸 매우 즐기고, 여자는 여자 친구 두세 명과 어울려 차를 몰고 다니다가 밤이면 자동차를 중심으로 작은 축제를 즐기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부모들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그나마 관심을 갖고 있는 내가 나서서 무엇인가 방법을 좀 찾아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부모들의 그런 마음이 너무 안타까웠달까, 애잔했달까, 어쨌든 나는 무모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안 될 경우는 생각도 말고 된다는 생각만으로 대범하게 한 번 진행해 보자, 하는 생각으로 일단 사진부터 한 장씩 달라는 요청을 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 사진을 상대편 부모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었다. 눈부시게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당사자도 아닌 부모들에게 사진을 보여서 뭘 하겠는가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본인들이 결혼에 대해 지금은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영점 일 퍼센트라도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가 여부를 알아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을 직접 만나보고자 했지만, 세상에, 삼 년, 사 년, 오 년이 흐르도록 그림자조차 볼 기회가 없었다.

예전에는 휴가철 여름날에 부모를 찾아와서 이삼일씩 머물기도 했다지만 언제부터인지 저녁 늦게 와서 아침 일찍 떠나버리기를 되풀이하고 있었고, 명절 때면 어김없이 내려오긴 하지만 그때는 나도 역시 명절이라 동생이며 조카들과 어울리느라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겨우 어떻게 짬을 내서 지금 출발할 수 있겠다고 전화를 걸고, 그리고 달려가서 보면 당사자는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는 이유로 이미 떠나버린 뒤였다.

같은 일이 두 번 이상 되풀이되면서 나는 겨우 깨달았다. 부모들의 표정과 태도가 터무니없이 부드럽게 싹싹해진 것을 본 애들이 눈치를 채고 달아나 버렸다는 것을.

희한하게도 양쪽 다 같거나 비슷한 스토리를 이유로 나를 따돌리고 있었다. 요것들 봐라. 너희들 혹시 서로 아는 사이 아니냐?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같거나 비슷한 레퍼토리를 그들은 사용하고 있었다. 하긴 비슷한 나이에 같은 서울 생활을 해 왔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는 했다.

어쨌든 나는 이제 그만 포기하기로 했다. 하지만 포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진까지 내 손에 건네준 부모들의 타는 속을 내가 이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칼로 무 자르듯이 싹둑 잘라버릴 만한 강단은 내게 없었다.

딸을 둔 그녀의 입술은 검게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결혼에 관심이 없다는 딸의 입에서 나온 폭탄발언 때문이었다. 그녀의 딸은 정규직이 되기 위해 어학연수도 다녀왔고, 학위가 있어야 한다 해서 야간 대학원에서 석사도 했지만, 마흔이 다 되도록 프리랜서 신분을 면하지 못했다. 딸의 입장에서 볼 때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 또한 비정규직으로 자본가의 노예 생활이나 하다가 말 텐데 그런 그림은 상상으로도 싫다고, 그래서 결혼 같은 건 아예 꿈도 꾸지 않으니 그렇게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엄마를 설득하고자 나를 애를 쓰더라는 거였다.

아들을 둔 부모의 입장은 약간 해학적이었다. 엄마가 아들에게 너는 왜 연애조차도 안 하느냐고 물었더란다. 그때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 연애를 하면 어느 순간 정이 들어서 별 생각도 없이 결혼을 하게 될 텐데 그 뒤가 무서워서 비슷한 또래의 여자와는 아예 말도 섞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부모가 자식의 결혼 문제를 포기할까? 아니었다. 자식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부모들의 속은 검게 타들어간다. 그 모습을 내가 보고 있는 것이니, 걸려도 크게 걸린 셈이었다.

어쨌든 올해 설 명절은 눈보라 덕분에 자식들의 결혼 관련 얘기는 꺼내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전화로 간단하게 별 일 없느냐는 식의 인사치례나 하고 말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조금은 얄밉기도 하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 뉴텍미디어 그룹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07108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 인터넷 : 서울, 아 52650 (등록일·발행일 : 2019-10-14)
  •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영필
  • 편집국장 : 선초롱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목로 72(신정동)
  •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전무이사 : 황석용
  • 고문변호사 : 윤서용(법무법인 이안 대표변호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 위클리서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weeklyseoul.net
저작권안심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