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이 내 삶을 구원헀다
운동이 내 삶을 구원헀다
  • 김혜영 기자
  • 승인 2023.02.08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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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탐방기] 8회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디자인=이주리 기자

무엇이 삶의 낙이 될 수 있을까

12월 27일, 송년회를 마치고 달뜬 상태로 시끌벅적하게 밖을 나섰다. 반가웠다, 또 만나자를 되풀이하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지고, 남은 여섯이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조용한 역사 내부에 목소리를 줄인 우리는 외선과 내선으로 나뉘어 이제는 넷이 됐다. 9명이 6명으로, 또 4명으로 줄어드니 이상하게 쓸쓸했다. 연말의 밤은 왠지 모를 멜랑꼴리도 있었다. 출입문 쪽에 옹기종기 모여 귀가하는 이들의 고요를 깨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누군가 근황을 이야기하면 진심으로 축하하고 위로했지만, 누가 언제 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깊은 대화를 시작할 순 없었다. 종종 불가피한 공백이 생겼다. 친구 Y가 불쑥 물었다.

“너는 요새 무슨 낙으로 살아?”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보는 질문이라고 했다. 셋은 말문이 막혔다. 영화 동아리에서 만나 서로의 삶보다 영화 취향을 더 많이 아는 사이였다. 우리끼리 한 번도 나눠본 적 없는 종류의 대화인 데다, 언제 어디서 맞닥뜨려도 어려운 질문이었다. 죽기 직전에 볼 영화를 반드시 하나만 꼽으라는 종용이 차라리 쉬웠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 채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그동안의 일상을 톺아보며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무얼 할 때 가장 행복했더라. 어떤 시간이 가장 기다려졌더라.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단어가 빛처럼 솟아올랐다. 나름 용기내 물었을 Y를 위해 얼른 운을 뗐다.

“나는 요가. 요가하는 시간만 기다리면서 사는 것 같아.”

상대를 웃기고 싶거나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을 땐 꼭 오버를 하게 된다. 요가를 좋아하지만, 요가하는 시간만 기다리면서 살지는 않는다. 오래된 친구들과의 약속, 개봉일만을 기다린 영화를 보러 홀로 극장에 가는 날을 더 좋아한다. 후순위인 요가를 꼽은 건, 불규칙한 이벤트를 낙으로 삼았다가는 일상의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바빠 약속이 줄거나 극장에서 볼만한 영화가 없을 때마다 인생의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순 없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 외부 요인이 아닌 오로지 나에게 달린 일이야말로 삶의 낙이 된다. 운동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체육관이 문을 닫아도 걷고 뛸 곳은 어디에나 있으니, 내가 마음만 먹으면 된다.
 

최악이어도 당신과 함께 하고 싶다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야기를 잠시 해보고 싶다. 홍콩의 대표적 액션 배우 중 하나인 양자경이 주연이고 손가락 쿵푸 같은 멋진 장면이 나오지만, 요가나 운동이랑은 관련이 없다. 여기서 악당 ‘조부 투바키’를 설명하기 위함이다.

영화는 허무주의에 빠져 자신의 삶과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조부 투바키와 그를 막으려는 ‘에블린’(양자경)의 갈등이 주요 골자다. 상대적으로 에블린이 대단한 영웅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 또한 삶에 대단한 미련은 없어 보인다.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의 기로 때마다 가능성은 나뉘고, 그에 따라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수많은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 영화의 다중우주 세계관이다. 주인공 에블린은 하필 가장 실패했고, 별로인 인생을 사는 버전의 인물이다. 우연히 세상을 구하라는 미션을 받아 당황스러울 뿐이다. 반대로 조부 투바키는 능력이 너무 뛰어나 다중우주의 모든 것을 경험해봤다. 그래서 허무하다. 더 이상 어느 것에도 감흥이 없고 인생에 기대가 없다. 다함께 멸망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다고 느낀다.

한 마디로 세계관 최강자와 최약체의 싸움이다. 가장 좋은 선택만 내려 온 우주에서 최고의 버전이었던 에블린은 이미 죽었고, 전 세계의 운명은 망해가는 세탁소를 운영하며 이혼 위기와 세금 문제에 처한 에블린에게 달려있다. 최악의 상태인 에블린이 최고의 상태인 조부 투바키를 막아내야 한다. 예상할 수 있듯, 승리할 확률은 아주 낮다. 기적적으로 성장한 에블린은 적수와 위대한 결투를 벌이고, 영화는 마침내 승부가 날 것 같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한다. 그때 에블린은 조부 투바키에게 그래도 같이 살아보자고 제안한다. 인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언제까지나 너와 여기에 있고 싶다며 설득한다.

평생 후회 가득한 선택만을 내려온 에블린이야말로 위로를 받아야 하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갖고도 포기하려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붙든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그녀가 자신처럼 인생을 내던질 것이라 생각했던 조부 투바키는 에블린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다. 겁을 느낀 조부 투바키는 도망간다. 에블린은 계속 쫓아 따라가며 끈질긴 애정으로 설득한다. 마침내 그녀만이 내릴 수 있는 모순적이고도 아름다운 결심을 믿어보고 싶어진다. 최악의 인생이어도 당신과 함께 하고 싶다는 절절한 고백은 그 어떤 절망과 허무주의도 꿰뚫 수 있는 단단함을 지닌다. 영화를 보며 펑펑 울고 싶었던 걸 보면, 단순한 진리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정해지는 건 어렵다

Y는 자신이 언제나 조부 투바키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다른 친구 M도 공감했다. 가끔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낼 때 말고는 평소에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최근의 문제는 아니고, 아주 오래 전부터 줄곧 이 상태였다고 한다. 나는 Y가 아니라서 그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섣부른 감정으로 무례하게 굴고 싶지도 않았다.

한때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잠에 들고 눈을 뜨던 날들이 떠올랐다. 인생에 너무 많은 사건이 벌어져 자극적인 감정들에 힘겨워하던 때였다. 그러고 보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권태에 외로움을 느끼거나,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자극적인 감정을 감당하는 식의 양극단을 경험한 날이 많았다. 너무 좋아도 불안한 것처럼 말이다. 적당한 감정을 느끼며 안온한 일상을 보낸 하루는 손에 꼽을 듯했다. Y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할 순 없어도 느슨하게 공감할 순 있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양극단의 날을 살아낼 땐 왜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행복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 흐르는 물처럼 붙들 수 없는 것이어서 가끔의 좋은 날이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 인생의 이유와 가치를 찾다간 더 큰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질문이다.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다정한 에블린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상태에 머무는 건 너무 힘이 든다. 부정적인 감정에도 꽤 큰 에너지가 소요된다. 인생의 배신을 겪어도 다정한 에블린이 되는 것이 그나마 해봄직하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를 차치하고도, 각자의 고통을 끌어안은 채 손 내밀어준 이들에게 보답하고 싶다. 세상엔 아직도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며 찰나의 마음이라도 붙잡아 그래도 인생이 아름답다고 믿고 싶다. 삶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세상이 더 아름다워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의 문제다. 아는 것은 조부 투바키가 훨씬 더 많아도, 믿는 것은 에블린이 더 많았던 것처럼 말이다. 당장은 삶의 낙이 없다는 Y의 이야기를 들고서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그 정도의 무게를 바란 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 무기력했다. 빠르게 달리는 지하철과 언제 내릴지 모르는 친구들을 보며 무수한 다중우주를 헤쳐 나가는 에블린의 마음을 가늠했다. 조급한 마음과 달리 시간이 흐르는 것 말고는 되는 일이 없었다. 에블린, 이 무섭고도 떨리는 순간을 어떻게 견디고 그렇게 현명한 방식으로 손을 내밀 수 있었던 거야? 묻고 싶었다. 다정해지는 건 정말 어려웠다.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우울해서 운동을 한다

나조차도 어려우면서 세상이 저절로 친절해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알면서도 그저 답없는 이상주의자가 되고 싶다. 다시 한 번 말하듯, 이건 믿음의 영역이어야 가능한 마음이다. 나만의 해석이지만, 너무 똑똑한 Y는 바보같은 인생을 사는 최악의 에블린이 되기 어렵다. 하기 싫은 일도 과제처럼 성실하게 해내며 살고 있으니 인생의 낙을 누리는 나를 신기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정적을 깨고 요가라는 답을 내린 나를 보고 Y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 뒤로 서로 몇 개의 질문을 주고받았다. 나는 한껏 다정해지고 싶어서 네가 너무 착하고 성실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Y는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경우의 수를 떠올려보고 세상에 답이 없음을 깨달은 현자의 한탄 같았다.

그동안 다른 친구들은 힘든 운동인 요가가 삶의 낙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신기해했다. 나는 그런 친구들이 더 신기했다. 게으름을 이기고 몸을 움직여 근육을 짜내고 땀을 흘려야 나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감각에 흠뻑 잠수할 수 있다. 솔직히 요가할 때 가장 행복한 건 아니지만, 요가를 해야 가장 행복한 내가 될 수 있다. 밥을 차리는 일이 귀찮아도 그렇게 챙겨먹어야 배고프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럼 수고스러움 없이 사먹으면 되지 않겠느냐는 반론이 가능하겠다. 아무런 정성을 들이지 않고 간단하게 돈으로 해결한 식사로 영혼의 허기를 채우기는 어렵다. 장인의 맛깔나는 솜씨를 누리거나 소중한 이와 함께 식사하는 행운이 매순간 찾아오진 않기 때문이다. 혼자 먹는다고 아무 음식으로 대충 때우다가는 언젠가 배탈이 난다는 뜻이다.

시간은 새해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흔들리는 지하철에서 친구들은 꿋꿋하게 서있었다. Y는 우리가 각자의 2022년을 버티고 이렇게 모인 것이 새삼스럽게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동안 버텨왔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그 말이 목에 걸렸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버틴 게 맞았다. 정확하게 솔직해지자면, 나는 대단히 잘 살고 싶어서 운동을 하는 게 아니다. 삶에서 우울을 제거하기 위해서다. 아직까지 운동 말고는 영구적이면서도 부작용이 없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물론 운동을 한다고 모든 일이 해결되는 건 아니다.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있겠는가. 운동은 봉합과 회복 전에 종양을 제거하는 일에 가깝다. 몸을 움직여 머리를 비워낸 후에 무엇을 정리하고 채워 넣을지는 또 다른 몫의 문제다. 그 과정을 다 해낸다고 면역이 생긴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일단 제거는 하고 봐야 한다. 그게 시작이다.

아직 짧은 인생이고 실험 횟수도 많지 않지만,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제거하는 방법 중 운동만한 것이 없었다. 이건 운동에 대한 예찬이면서도, 나의 성실함이 잘난 척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꾸만 자라나는 종양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쉽게 우울해지는 사람이라는 반증이다. 나는 하기 싫은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법을, 인생의 낙 없이 사는 법을 모른다. 뭐라도 해서 기분을 멈추고 생각을 바꿔야 살아있음을 느낀다. 운동이라는 나만의 방법을 터득하기 전까지는 우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보낸 세월이 꽤 길었다. 그렇다면 운동은 대체 뭐길래, 어떻게 내 삶을 구원했을까. 친구의 질문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를 그동안 겪은 나름의 우여곡절을 통해 하나씩 풀어볼까 한다. 감히 정답을 일러주겠다는 목적은 아니다. 때로는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된단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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