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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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닿지 않은 나의 목소리

튀르키예 동부 끝을 함께 여행했던 중국인 여자애 단은 재빠르게 국경으로 떠났다. 튀르키예에 머물 수 있는 비자가 딱 하루 남았기 때문에 서둘러 다른 국가로 빠져 나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비자 기간을 초과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몰랐지만, 단은 서둘러 떠났던 것 같다. 추정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와 나누었던 마지막 인사가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과, 함께 걸으며 했던 이야기는 또렷이 생각나는데, 마지막이 기억나지 않는다. 숙소에서 헤어졌었나, 아니면 버스 타는 걸 보면서 헤어졌었나, 단은 내 기억 속에서 어느 출구로 나갔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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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SNS 아이디라도 공유했다면, 그 후에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소식을 나눌 만한 별다른 수단을 나누지 않았다. 잠깐 겹쳐 있다가, 편하게 훌훌 사라지는 사이가 된 셈. 여행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는 이런 관계가 아쉽다거나, 아깝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때 만난 그 사람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살아가고 있을지. 단은 여전히 작은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지. 그런 게 궁금하고, 여행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의 소식은 의외로 계속 접하게 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났던 루마니아 누나의 일상과 소식은 계속 접하게 되고, 튀르키예 반에서 만났던 지크란이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면도 가끔 본다. 소설이 끝나고 덤으로 얻게 되는 후일담 같은 소식들을 보며 나는 종종 그들을 생각한다. SNS 시대에 복이라면 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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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아닐 때도 있었다. 나는 이제 거의 페이스북을 하지 않는데, 여행을 할 때까지만 해도 종종 사용하곤 했었다. 그때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과 페이스북 친구를 맺기도 했고, 페이스북 메신저로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러다 점차 쓰지 않게 된 페이스북을 나는 핸드폰에서 지워버렸고, 1년 넘게 접속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확인할 일이 있어 페이스북을 켠 나는 내게 와 있는 음성메세지를 발견했다. 1년 전에 내게 보낸 메세지. 인도 푸쉬카르에서 만난 라비가 보낸 메세지였다. 라비는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 종종 언제 다시 인도에 올 건지 물어봤는데, 이번 메세지도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데 다른 때보다 훨씬 침울했고, 방금 막 무슨 일이라도 겪은 것처럼 슬픈 목소리였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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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올 거야. 민기. 친구. 나는 푸쉬카르. 나는 너를 보고 싶어.

무심코 누른 버튼에서 흘러나온 그의 음성을 듣고 있자니, 마치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친구의 목소리가 유물처럼 내 앞에 튀어나온 기분이었다. 우주선을 타고 가다가 지구에서 보낸 목소리가 노이즈에 섞여 겨우 들리는 것처럼, 그게 이미 너무 늦은 목소리가 되어버린 걸 알기에 슬픈 것처럼, 나는 갑자기 조금 울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나는 여기에 있다고, 한국에 있다고, 언젠가 기회가 되면 너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음성메세지를 남겼다.

방금 확인했을 때, 그는 나의 메세지를 아직 읽지 않았다. 나의 목소리가 언제 그에게 닿을지는 모를 일이다. 그와 이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될 일은 없었는데도, 여행은 왜인지 슬프고 그리운 사람들을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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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 산책

진과 나는 튀르키예에서 조지아로, 예전에는 그루지야라고 불렀지만 러시아와의 전쟁 이후 영어식 표현인 ‘조지아’로 이름을 바꾼 조지아로 넘어가려고 했다. 동쪽 끝의 시골 도시인 카르스에서 조지아로 바로 넘어갈 수 있는 교통편은 없었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흑해와 접해 있는 튀르키예의 북쪽 도시 트라브존을 거쳐서 조지아로 들어가는 듯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 방법을 택하기로 했다. 시골이라서인지, 교통편의 문제인지 카르스에서 트라브존까지 한 번에 가는 방법은 없었다. 버스표를 팔았던 곳에서는 우선 리제 행 버스를 탄 다음, 그곳에서 기다리면 트라브존까지 가는 버스가 올 거라고 했다. 방법이 없던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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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하루 나절을 달려 리제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저녁에 가까웠다. 버스 기사에게도 확인했지만, 내린 곳에 정말 버스가 오기는 오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우리가 내린 곳에는 정류장도 없고, 그저 도로만 있고, 그것도 꽤 큰 도로였다. 타기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트라브존가는 버스가 오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진과 나는 시간이 갈수록 걱정이 늘어났고 배낭은 조금씩 무거워졌다. 우리가 서있던 도로는 해안에 접해 있어서 바로 뒤로 바다가 보였다. 이 바다가 난생 처음 보는 흑해라는 것도 잊은 채로, 그저 버스를 기다렸다. 얼마나 되었을까, 그렇게 가만히 서 있다가 결국 커다란 버스 한 대가 우리 앞에 멈췄다. 트라브존에 가냐니까 타라고 했고, 한시름 덜었던 우리는 한 시간 만에 트라브존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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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과 나는 미리 잡아둔 숙소에 집을 풀고 무엇을 했나. 우리는 흑해를 보며 걸었다. 트라브존은 꽤 큰 규모에 도시여서, 해안가로 나가니 멀끔하게 정비된 방파제 뒤로 흑해가 보였다. 저녁에 보는 흑해는 정말로 검었지만, 원래 바다는 밤에 보면 검다. 이름 때문에 괜히 더 검게 보이기도 했는데, 흑해는 그저 방위에 따라 붙은 색 이름이라고 했다. 흑해는 튀르키예의 북쪽에 있고, 북쪽의 색이 바로 검은색이라고. 이렇게 방위에 따라 색을 붙이는 것이 튀르키예 사람들이 동쪽의 유목민 출신이라는 걸 보여준다고, 따로 말해준 사람은 없고 나는 아마도 인터넷에서 주워들었을 이야기를 진에게 했다. 진은 바다를 보며, 여긴 나의 고향 부산 같은데? 하며 부산 생각을 했다. 바닷가에 오면 해산물을 많이 먹어 둬야 해. 여행하면서 해산물 먹기가 은근히 힘들 거든. 진의 말에 나는 끄덕거리며 바닷가에서 난 것들을 먹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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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에 유명한 음식은 ‘함시’라고, 멸치보다 조금 큰 정어리에 가까운 생선을 튀겨 파는 음식이었다. 바다 근처라 해산물 파는 식당이 많았다. 우리는 함시튀김과 고등어구이를 시켰고, 진은 공깃밥 없이 고등어를 먹는 걸 어색해했다. 함시튀김은 정말 큰 멸치를 튀겨 먹는 맛이었고, 진은 기장멸치축제에 있을 법하다고 평했다. 기장멸치축제도 안 가봤는데, 흑해를 앞에 두고 생선을 먹는 기분이 오묘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는 흑해의 밤에 맥주를 사서 마셨다. 공원에서 맥주를 먹고 가자는 진의 말에 나는 여기선 그게 불법일 거라고 대꾸했지만, 분위기상 괜찮을 것 같아 그냥 공원 벤치에 잠시 앉았다. 맥주를 홀짝이며 아무 이야기나 하고 있던 흑해의 밤, 경찰관들이 우리를 혼내러 왔고, 잠자코 혼난 우리는 다시 찰랑거리는 맥주 캔을 들고 숙소로 돌아갔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닌 것 같아, 진이 말했고 나는 이게 민주주의가 아닌 건 아니지, 대답했다. 주위가 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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