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디저트 로망
나의 디저트 로망
  • 김은진 기자
  • 승인 2023.03.15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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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진의 생각하는 일상]
ⓒ위클리서울/ 김은진 기자

[위클리서울=김은진 기자] 내가 작은 꼬마였을 때 우리 집에는 오래된 책 전집이 하나 있었다. 아마 어머니가 결혼 전에 구입하신 책이었을 것이다. 백과사전처럼 키가 좀 컸던 그 책들은 권마다 주제가 달랐는데, 요리와 테이블 매너, 뜨개질과 바느질 같은 내용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결혼한 여성에게 필요한 지식들이라고 당시에 생각했던 것을 모아놓은 전집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본 책을 번역한 책이지 않았나 싶다. 이렇게 내 기억이 분명하지가 않은 것은 나는 그중에서 요리책만 보았기 때문이다. 그 요리책이 어린 내게 특별했던 것은 안에 예쁜 사진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는 흔치 않았던 온갖 서양 요리들의 사진이었다. 커다란 닭구이가 다리 쪽에 빨간 리본을 달고 하얀 접시에 멋지게 놓여있던 사진 속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책에서 나의 호기심을 가장 자극했던 것은 케이크, 파이, 쿠키 같은 예쁜 외국 디저트들이었다. 10대가 된 후에도 나는 책 속에서 그런 디저트들을 만나는 것을 참 좋아했다. <빨간 머리 앤>이나 <작은 아씨들>, <키다리 아저씨> 같은 내가 좋아하는 서양 소설 속의 삽화 속에 나오는 온갖 디저트들은 늘 낭만의 대상이었다. 우리 집에는 없는 ‘오븐’이라는 곳에서 설탕과 유제품의 달콤한 냄새를 풍기며 구워져 나오는 예쁜 이름의 과자와 빵들은 상상만 해도 나를 행복하게 했다.

 

ⓒ위클리서울/ 김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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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저트에 대한 그런 환상을 가진 채로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때마침 한국인들의 식문화가 세계화되기 시작해서 다양한 외국 디저트들이 한국 시장에 선보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단맛을 그렇게 밝히는 사람은 아니다. 사탕같이 순수한 설탕 맛이 나는 간식에는 아기 때에도 지금도 거의 입에 대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사진과 그림 속 디저트에 대한 강렬한 기억은 나를 ‘나만의 디저트 기행’의 길로 이끌었다. 내 어린 시절의 로망을 현실 속에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빵집이나 카페에서 처음 보는 디저트나 빵이 있으면 웬만하면 꼭 구입해서 먹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한국 빵집들의 대표적인 메뉴들은 물론이고 때마다 유행하는 온갖 디저트는 거의 다 맛을 보았다. 크로플이 유행했을 때는 심지어 올케의 와플 기계를 빌려 집에서도 만들어보았고, 한동안 유행했던 크림 도넛들도 한 번씩 맛을 보았다. 나는 SNS에서 남들과 음식 사진을 공유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온갖 디저트들을 구입한 이유는 그저 정말 오로지 맛이 궁금해서였다. 여행을 할 때도 나는 디저트를 잊지 않았다. 유럽 여행을 할 때도, 북미 여행을 할 때도 맛집에 들러 대표 메뉴나 특이한 제품은 꼭 맛을 보았다. 만약 그 나라의 대표적인 디저트라면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을 들러보았다. 그 메뉴의 본토 맛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마카롱과 에클레어, 밀푀유를 사 먹었고 영국에 갔을 때는 고급 카페에 앉아 화려한 애프터눈 티세트를 혼자 다 먹어치웠다. 나의 이런 집착은 서양 디저트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에 가면 편의점의 단 음식들을 꼭 둘러보고 백화점의 전통과자 코너에서 난생처음 보는 과자들을 샀다. 지역 명물 과자 가게나 떡집도 잊지 않고 방문했다. 대만과 홍콩, 중국에서도 그랬다. 한국의 떡과 한과도 기회가 닿는 대로 다양하게 맛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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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런저런 방법으로 온갖 디저트를 먹어 본 나는 더 이상 디저트에 별로 궁금한 것이 없는 정도가 되었다. 이미 빵과 과자에 대한 책도 많이 보았던 터라 주재료를 보면 맛도 어느 정도 예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자기 소설에서 그토록 찬사를 아끼지 않던 마들렌의 맛이 사실은 그냥 수수한 버터 과자 맛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너무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디저트에 대한 나의 관심이 시들해질 무렵, 나는 남자친구를 만났다. 그 계기로 디저트에 대한 나의 오랜 로망은 방향을 틀게 되었다. 내 남자친구는 디저트가 식문화의 일부인 나라에서 왔다. 식후에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 자연스러운 집에서 자랐다. 그에게 생일 케이크는 항상 집에서 만드는 음식이었다. 그런 그와 함께 카페에서 케이크나 과자를 먹으면서 디저트를 보는 나의 관점은 서서히 바뀌었다. 개인적 로망을 체험시켜주는 즐거움에서 가정 디저트를 만들기 위한 공부에 도움이 되는 대상으로 말이다. 그러면서 나는 디저트 맛의 본질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위클리서울/ 김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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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온갖 디저트가 주는 맛을 경험한 나의 현재 결론은 이렇다. 사실 맛으로만 보면 서양식 디저트의 본질은 아주 단순한 것이다. 밀가루와 설탕, 그리고 우유의 맛이다. 이 세 가지 재료의 배합과 굽는 방식의 차이에서 물리적 형태와 식감의 차이가 생기고, 초콜릿이나 과일같이 세 가지 주재료에 어울리는 재료를 더하면 다양한 종류의 디저트들이 만들어진다. 지금까지 수많은 디저트 가게들을 들러보았지만 그중 진짜 맛집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가게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늘 똑같았다. 화려한 데커레이션은 잠시 눈을 즐겁게 하지만 맛은 언제나 정직하다. 재료의 본질을 지키는 맛과 재료를 다루는 손의 정성만이 먹는 사람의 마음에도 진정한 위안을 준다. 지금까지도 내가 기억하는 뛰어난 디저트 맛집들 중에 제품의 데커레이션이 아름다운 곳은 거의 없었다. 미국 여행 중에 내게 진짜 애플파이의 맛을 알게 해 준 가게가 하나 있다. 그곳은 지역주민 맛집답게 번화가에서 좀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들어가니 가게 안은 어두웠고 벽면에 좁은 바 테이블과 작은 의자 몇 개가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파이를 진열한 유리 쇼케이스도 없었다. 있는 거라고는 꽤 많은 종류의 파이 이름과 가격을 쭉 적어둔 기다란 칠판뿐이었다. 나는 당황한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애플파이 한 조각을 주문했다. 직원분은 뒤쪽 냉장고에서 커다란 파이를 꺼내더니 큰 칼로 시원스럽게 한 조각을 잘라 재생용지로 만든 수수한 종이 상자에 넣어 주었다. 그 파이를 나는 숙소로 가져왔다. 두툼한 모양이 먹음직스러웠지만 특별히 모양을 낸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꽤 크니까 반만 먹고 반은 내일 먹어야지’라고 생각하며 포크를 들었다. 하지만 막상 먹어보니 중간에 멈추기가 쉽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파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너무 아쉬웠던 나는 결국 다음날 그 가게에 다시 들렸고 다른 파이를 하나 더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일이 특별히 기억할 만한 일인 이유는 나는 그 여행 중에 뉴욕의 유명 베이커리들에서 산 바닐라 컵케이크와 치즈케이크, 르뱅 쿠키를 다 먹지 못하고 쓰레기통에 버린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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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국의 디저트 시장은 아주 급성장했다. 이제 서울에서는 웬만한 서양 디저트는 다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 디저트 가격은 웬만한 한 끼 식사 가격인데도 여전히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우리 입맛이 서구화된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디저트라는 메뉴의 특별함 때문이 아닐까 싶다. 디저트에는 밀가루와 버터와 설탕이 주는 달달한 위로가 있다. 사실 유제품은 심리적으로도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싶을 때 나도 모르게 찾게 되는 음식이라고 한다. 그리고 디저트는 애초에 한국인들의 식문화가 아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카페에서 차나 커피에 곁들여 먹는 예쁜 디저트는 여전히 친구나 연인과 함께할 수 있는 놀이이자 신선한 문화 체험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요즘은 눈으로도 즐거운 제품들이 인기가 많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막 어린 시절의 환상을 벗어난 나의 디저트 로망은 이제 세상의 유행과는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이제 나의 로망은 그냥 내 입맛에 딱 맞는 디저트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좋은 재료로 가급적 간단하게 만든, 그러면서 내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그런 디저트 말이다. 커피나 차에 애플 크럼블이나 단팥 과자 같은 꾸밈없는 디저트를 종종 곁들여 먹고, 누군가의 생일에는 항상 과일 쇼트케이크를 만드는 그런 디저트 생활이 지금 나의 꿈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빨간 머리 앤이 집에서 케이크를 만들 때 그랬듯이 여러 번 실패하는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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