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반도 재상륙작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일본의 한반도 재상륙작전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3.03.16 14: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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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내가 어렸을 때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이것도 좋은 것 같고 저것도 좋은 것 같고, 이것도 나쁜 것 같고 저것도 나쁜 것 같은, 상황이 너무 애매해서 선뜻 판단이 안 설 때는 왼쪽 손바닥에 침을 뱉어놓고 오른쪽 손가락으로 탁 쳐서 많이 날아가는 쪽을 선택하곤 했었다.

확실하게 이것이다 할 만한 것이 없어서 자신감이 떨어지면 하다못해 침에라도 의지하고자 하는 거, 아마도 인간의 이런 자신 없어 하는 심성에서 점성술은 착안됐을 것이고, 여러 갈래로 수정 보완되며 명맥을 유지해 왔을 것이다.

옛날에 유능한 왕들은 정책 결정에 어려움이 있을 경우 일단 왕 자신이 처절하게 고독한 성찰을 하고, 고민을 했는데도 답이 안 나오면 관련 학자와 대신들의 의견을 묻고, 물었는데도 딱히 이것이다 할 만한 해법이 안 나오면 백성들의 생각을, 요즘 말로 치자면 여론조사를 해서 의견을 취합하고, 여론조사마저 사분오열 식으로 갈라지면 최종적으로 점성술사를 불렀다고 한다.

 

        천지비괘(왼쪽)를 확 뒤집으면 지천태쾌{地天泰卦}가 된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천지비괘(왼쪽)를 확 뒤집으면 지천태쾌{地天泰卦}가 된다.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한자문화권에서 점성술의 으뜸은 아무래도 주역을 꼽아야 할 것이다. 주역은 생명의 근본 조건인 음과 양, 하늘과 땅, 암컷과 수컷으로 편의상 정해놓은 두 개의 효(爻)를 이렇게 섞고 저렇게 섞어서 64개의 이른바 대성쾌를 일단 완성해놓고 그때그때 적절한 방법으로 뽑아서 해석해내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난해한 철학이다.

여기서 핵심은 섞임이다. 64괘는 곧 섞임의 방식이 64가지라는 뜻이다. 어떻게 섞였느냐에 따라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해석은 하나같이 어렵지만 재미있고, 모르지만 곧 알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 마치 잘 지은 시라도 읽는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문학책을 읽듯이 주역을 옆에 두고 틈만 나면 들여다보기도 한다.

오랜 세월 주역을 공부해 온 사람들은 2022년 후반기부터 줄곧 천지비괘{天地部卦)를 뽑아서 대한민국의 오늘을 진단하며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안 좋음의 대표라 할 만한 이 괘는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어서 얼핏 질서가 정연한 것 같지만, 하늘은 하늘대로 떠 있고, 땅은 땅대로 눌려 있어서 섞임이 안 되는,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갈 길이 따로 있다는 식인 것이니 최악 중에 최악이라 할 만하다. 주역 연구자들이 뽑아놓은 이런 괘 앞에서 일희일비할 필요까지야 없다 해도, 대한민국의 현재 상황이 매우 불안정해서 아슬아슬한 느낌이 드는 것만은 객관적 사실이다.

불안정의 정체와 실체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마침표 하나가 꾹 찍혔다고나 할까. 2023년 3월1일 ‘연합뉴스’가 내보낸 한 장의 사진은 그 상징성이 매우 커서 한국 현대사회의 중대한 분기점으로 기록되지 않을 수가 없어 보인다. 아파트로 추정되는 건물 베란다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상하로 게양돼 있는데 하필이면 일장기가 태극기를 깔아뭉개고 있는 구도여서 보는 이의 가슴을 날카롭게 쭉 찢고 들어온다. 대통령의 삼일절 기념사를 듣던 중에 그 내용이 너무 좋아서, 너무 기뻐서 일장기를 걸었다고 당사자는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 사람은 아마도 일장기를 상시 비축해두고 특정한 날이면 남몰래 집안에서 흔들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장삼이사 필부도 아닌 대통령이 일본은 적이 아니라 동지라는 요지의 발언을 기념사에 넣었고, 한국인이 바보여서 영리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의 누이와 재산을 침탈하게 했으니 한국의 잘못이 일본보다 훨씬 크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폭탄선언을 해버렸으니, 그 사람은 더 이상 숨어 있어야 할 필요가 없구나 하는 자신감을 얻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일은 사실 오래 전부터, 일본의 항복 선언 직후부터 예정돼 있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미군정과 이승만 그리고 박정희로 이어지는 일본 친화적인 정책은 패전국 일본의 한반도 재상륙 가능성에 희망을 실어주었다. 일부에서는 64년 한일국교 정상화 직후부터 시작된 일본 문부성의 한국인 장학생 선발 제도를 시발점으로 보기도 하지만, 장학생을 이용한 식민사관 유포는 장기적인 프로젝트의 한 갈래일 뿐 본질은 아니고, 시작점은 더욱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군의 연구자들이 있다.

오래 전에 작고한 천관우 선생이 일본 학자들의 ‘임나일본부’ 설을 보기 좋게 격파하는 것을 보면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방식의 공부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진 이 연구자 그룹은 이명박 정부 당시까지만 해도 전혀 그 실체가 드러나 있지 않았었다. 전국 도처에서 각개약진 형식으로 틈틈이 저마다의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만나 의견교환을 시작한 것은 이명박 정부 당시 출몰한 ‘뉴라이트’의 준동을 목도하면서부터였다.

 

지난 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강제동원 정부해법 강행규탄 긴급 시국선언 모습 ⓒ위클리서울/ 김현수 객원기자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어놓고 가끔 오프라인 모임을 갖기도 하는 이 연구자 그룹의 주장에 따르면 1945년 8월 이후 일본인들은 허둥지둥 본국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연출해 보였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연출일 뿐이었다. 몸은 가도 마음은 남겨둔다는 노랫말처럼, 때가 되면 반드시 돌아온다는 연인들 간의 약속처럼, 패배한 침략자들은 다양한 층위의 다양한 전문가들을 곳곳에 심어놓고 미래를 기약하며 떠났다.

남겨진 전문가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신분세탁이었다고 이 연구자 그룹은 분석한다. 일본식 이름을 한국식 이름으로 바꾸고, 일본식 복장을 한국식으로 바꿔 입으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언어는 내선일체를 강요할 당시부터 부지런히 갈고 닦았으니 한국 사람보다 한국말을 더 잘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능수능란했고, 사투리까지도 거침없이 소화해내는 그야말로 전문가들이었다.

신분세탁을 마친 전문가들은 거주지 교환에 나섰다. 신분세탁 목적이 자신을 감취기 위함이니 낯선 곳으로의 거주지 이전은 필수였다. 이를테면 부산이나 울산 쪽 사람은 대구나 안동으로, 대구나 안동 쪽 사람은 부산이나 울산으로 이사를 가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목포나 순천 쪽 사람은 전주나 군산으로, 군산이나 전주 쪽 사람은 목포나 순천 쪽으로 이사를 갔다.

끼리끼리 통한다는 말 그대로, 일본에서 한반도로 건너온 직후부터 줄곧 소통을 해 왔었으니 거주지 교환에 어려움은 영점 일도 없었다. 너는 이쪽으로 와, 나는 그쪽으로 갈게, 하는 내용의 전화나 편지 교환을 하고 다음날 바로 떠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주거지에 도착하면, 그날로 그들은 일본인 조상이 아닌 한국인 조상을 둔 한국사람 행세를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몸만 새로운 주거지로 이동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새로운 주거지 인근에 누가 있고 뭐가 있는지 등등 현황정보를 한 보따리씩 서로 교환해서 갖고 떠났다. 때는 바야흐로 혼란이 극에 달한 시절이었다. 훗날 적산이란 명칭으로 통용되는 일본인 재산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집이든 땅이든 공장이든 상점이든 한국 사람도 발 빠르게 이거 내 거, 하고 선언하면 그대로 그 사람 재산이 될 수 있는 시절이었다.

그런데 한국인으로 위장한 일본인 전문가들은 그런 억지 주장을 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공무원과 정치인을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아는 그야말로 전문가들인 그들은 일본인이 버리고 떠난 재산들을 법리적으로 따져서 합법적으로 자기 것으로 이전 등록해 나갔고, 그리고 그 지역의 새로운 자산가로 우뚝 서게 되었다.

당연한 얘기가 되겠지만 그들의 목적은 재산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들은 재산이나 탐내는 장삼이사가 아니라 국익을 최우선으로 치는 전문가들이었다. 전문가로서의 소임을 다하자면 재산이 있어야 하는 것일 뿐이었다. 일본이 아니었다면 한국 사람들은 오늘날 중국이나 소련의 노예가 돼 있을 거라는 둥, 일본이 있었기에 한국 사람들이 그나마 사람 행세를 할 수 있게 됐다는 둥의 선전 선동을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설득력 있게 하자면 돈이 필요했고, 정계나 관계 혹은 학계에 직접 진출하거나 잠입해서 고급정보를 빼 내기로 하자면 그 또한 돈이 필요하겠기에 일단 재산부터 확보해 나간 것일 뿐이었다.

이 전문가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요인이 있었을까? 연구자 그룹은 전혀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전문가들 자신이 워낙 은밀하게 활동하기도 했지만, 정계든 관계든 학계든 어디든 일본을 은혜롭게 생각하는 인사들은 들판의 풀처럼 널려 있었기에, 어디의 어떤 사람이 포섭 가능한 인물인지, 포섭해서 어디에 어떤 용도로 이용할 것인지 하는 성향분석만 은밀하고 치밀하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은밀성을 생명으로 하던 이 전문가들의 활동이 벚꽃처럼 화려하게 피어나기 시작한 것은 대통령 박정희의 이른바 ‘한일국교정상화’선언 직후부터였다. 이때부터 이 전문가들은 가면의 일부를 벗어던지고 민간외교관으로 나섰다.

민간외교 전문가로 변신한 이들이 해야 할 일은 엄청나게 많았다. 본국의 문부성에서 개발한 한국인 장학생을 선발해서 관리 감독하는 일도 이들의 몫이었다. 값싸게 일본 구경을 할 수 있다는 선전과 함께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한국인 관광객을 대량 끌어 모은 다음 친일파로 세뇌해 나가는 것 또한 이들의 일이었고, ‘임나일본본부’라고 하는, 한반도 남쪽은 고대로부터 일본 영토였다는 설을 광범위하게 퍼뜨려서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도 역시 이들 전문가 집단의 일이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출몰한 ‘뉴라이트’는 그러니까 어느 하루 갑자기 터진 온천수처럼 땅에서 솟아나온 게 아니라는 얘기였다.

어쨌든 세월은 시냇물처럼 잘도 흘렀고, 패전 직후 극비리에 남겨졌던 전문가 1세대들은 늙어서 죽거나 본국으로 돌아가고 2세대 3세대로 이어져 갔다. 그리고 그들은 약간 진화된 형태의 새로운 인물들을 배출해내기 시작했다. 자기 딸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면 하나도 슬퍼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했을 거라고 주장하는 여인이 등장하는가 하면,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뉴라이트’가 전국적인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뉴라이트’는 기세가 워낙 등등해서 금방 뭔가 일을 내고야 말 것 같았지만, 구성원들의 상당수가 ‘주사파’ 그룹이었다는 게 드러나면서 힘을 잃어 갔다. 세계사적으로 공산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북한의 주체사상을 제대로 잘 이용하면 한 몫 크게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주체사상을 신봉하던 이들이 공산주의의 몰락과 함께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자석에 끌려가는 쇳가루처럼 일본 공작원들에게 말려든, 한 마디로 말해서 힘이 있는 쪽이라면 어디든 달라붙겠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기회주의자들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분석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기회를 찾는 사람에게 기회는 언제나 어디서나 보이기 마련이었다. 일본 문부성 장학생 1호의 아들로 알려진 대통령 윤석열의 등장은 기회주의자들 입장에서 보았을 때 기회 중의 기회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니 일장기 아니라 욱일승천기를 양손에 들고 힘차게 흔들어도 부끄러울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기회주의자들에게 국익이나 민심 따윈 장애물일 뿐 중요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덕목이었다. 국익이나 민심을 아랑곳하지 않기로는 대통령 윤석열과 그 수하들 또한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그야말로 천지비괘,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가 돼버린 것이니,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멸망의 공포에 떨던 일본은 이제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일만 남은 셈이다.

그런데 천지비괘를 확 뒤집으면 지천태쾌{地天泰卦}가 된다. 형식상 땅이 하늘 위에 있고, 하늘이 땅 아래에 있어서 매우 안 좋은 것 같지만, 해석상으로는 64괘 중에 가장 좋은 괘가 된다. 땅은 속성상 아래로 향하고자 하고, 하늘은 속성상 아래로 향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둘이 골고루 잘 섞이니 안 좋을 수가 없다는 거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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