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엔 다양한 처방이 필요하다
우리 삶엔 다양한 처방이 필요하다
  • 김혜영 기자
  • 승인 2023.03.21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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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탐방기] 9회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픽사베이
ⓒ위클리서울/ 픽사베이

마음을 전하는 일엔 이유가 있다

2월 14일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집 앞 편의점에 부담스러운 리본 디자인의 초콜릿들이 여전히 비치되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백화점의 명품 매장을 지날 때처럼 전혀 상관이 없는 세계를 보듯 지나쳤을 텐데, 이상하게 눈에 걸리고 마음에 걸렸다. 이미 지나간 밸런타인데이는 화요일이었다. 평소 기념일을 챙기는 편이 아닌 데다, 주말도 아니니 눈 감고 지나치기에 딱 좋았다. 아마 H는 내가 밸런타인데이인지를 정말 몰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제야 달콤한 악마들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렸다는 것이다. 정말 이렇게 지나갈 거야? 그 재촉에 예전의 회사생활이 떠올랐다. 그땐 3월 3일의 삼겹살 데이 같은 비주류 행사도 줄줄이 꿰고 있었다. 매일 똑같은 출퇴근이 반복되는 일상에선 작은 이벤트도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어쩌다 깜빡 잊어도 누군가 간식이라도 돌리면서 함께 즐거움을 나눴다. 대학원생이 된 지금의 나와 달리 직장인인 H의 회사에서도 그런 일이 생길 법했다. 옆 사람이 연인에게 받은 선물을 자랑하거나 누군가 작은 초콜릿을 모두에게 전하는 일 말이다. 온종일 초콜릿 냄새가 진동하는 하루였다면 그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최근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은 H가 연인에게 초콜릿도 받지 못한 불쌍한 사람마저 되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게 뭐라고 죄책감이 들었다.

연애에서 사회적 요소를 제거하기란 불가능하다. 사실 내겐 오래 지켜온 연애 루틴이 있었다. 기념일은 챙기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선언이 그 시작이다. 이벤트보단 평소에 잘하는 게 낫다는 신념으로 포장했지만, 실은 번거로움과 부담이 컸다. 그럼 한때 ‘그'였던 그들은 자신도 그렇다며 맞장구를 쳤다. 나는 또 운이 좋게도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안심했다. 철이 없었다. 연애 초기엔 무슨 말이든 아름답게 들리거나 거짓으로라도 공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다 막상 당일이 되면 초콜릿 하나 주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냐며 서운했겠지. 새삼스럽게도 그 가능성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래서 연애를 거듭할수록 지속 기간이 짧아졌던 걸까. 우스운 통찰과 회한도 뒤따랐다. 이대로라면 H와의 연애도 같은 수순을 밟을 수 있다. 남들 다 한다고 나도 그래야 하느냐는 치기를 부리기엔 상대는 이미 사회생활 중이다. 무엇보다 가까운 사람과 함께 펼쳐볼 추억을 만드는 일은 언제나 가치가 있으며, 연인 사이에는 일상 속 책갈피 같은 이벤트가 더더욱 필요하다. 마음으로 엮인 관계에서 마음을 전하는 일에 무심했던 것은 내 어리석음이 맞다. 이제는 인류가 오랫동안 지켜온 지혜를 존중해야 할 때였다.
 

처음 도전하는 일의 설렘

그로부터 며칠 뒤 합정에서 5시 30분에 H를 만나기로 했다. 시간 약속을 중시하는 그는 전날에 야근이 생길 수 있음을 미리 일러줬다. 딱히 스케줄이 없던 내가 종일 집에 있다가 출발한다는 사실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보통 추가 근무가 생기는 요일은 아니지만, 절대 길거리에서 기다리지 않게 하겠다는 단단한 의지였다. 전날 온 동네의 슈퍼와 편의점을 들러 미리 초콜릿 재료를 사둔 나는 그런 말이 하나도 중요하게 들리지 않았다. 조금 늦어봤자 내일은 초콜릿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달콤한 날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동안 총도 없이 전쟁에 나가던 내 손엔 이제 바주카포가 들려있다. 예상 못 한 선물에 당황할 그의 얼굴을 상상만 해도 즐거웠다. 말이 새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했지만 웃음은 어쩔 수 없었다.

오늘 기분이 좋은가 보네. 그의 말을 흘려듣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통화를 마무리했다. 이미 레시피를 참고할 자료를 찾았음에도 몇 개의 영상과 글을 더 챙겨봤다. 이래서 마음을 전하는 일이 좋은 거구나. 주는 사람부터가 행복한 일이구나. 뒤늦게 느껴보는 감각에 마음이 부풀었다. 얼기설기 계획을 세워놓고 모든 게 완벽하다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도파민에 취한 탓이었다. 흡족하게 단잠에 들고, 당일 오후 3시가 되어서야 느긋하게 초콜릿을 만들기 시작했다. 영상 속 우아한 모습과 깔끔한 손놀림은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온 부엌에 검은 흔적을 남기며 잠시 영혼이 나갈 뻔했지만, 달콤한 향이 힘을 내라며 등을 떠밀었다. 잠시 뒤에 일어날 악재를 모른 채 행복하기만 한 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두 손은 초콜릿에 잠식당해 까맣고 찐득거리는 늪에 빠졌다. 그 탓에 H로부터 온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 작은 걸 만드는 데 시간이 이렇게 많이 걸리는 줄 몰랐다. 계획과 달리 어느덧 4시가 지났다. 급히 포장을 마무리하고 확인한 문자는 퇴근이 늦어질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조금 당황했지만,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 준비를 하면 약속에 늦을 수도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괜찮다는 답장을 보냈다. 그때 중고 거래 앱에서도 반가운 알림이 떴다. 도수 없는 안경을 사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다. 더는 필요 없는 물건이 누군가에게 새롭게 쓰인다는 사실에 좀전의 설렘이 되살아났다. 이미 계획이 틀어졌고, 일정이 꼬일 수도 있다는 걱정은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 오늘 당장 만날 수 있다는 구매자의 적극성에 반해 서둘러 약속을 잡았다. 5시에 신촌에서 거래를 하고 합정까지 천천히 걸어가면 언제일지 모를 그의 퇴근 시간과 대충 맞물릴 것 같다는 계산도 섰다. 그가 늦어봤자 한 시간가량일 것이라 짐작한 것이다. 지금에서야 든 생각이지만, H에게도 바뀐 계획을 알리거나 얼마나 늦어질 것 같은지를 꼼꼼히 확인했어야 했다.
 

운동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친절한 구매자와 풍성한 거래를 마치고, 슬슬 출발할 요량으로 H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아직 집에 있는 것이 맞냐고 물으며 자신은 8시에나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잠시 생각이 멈춰졌다. 8시? 지금은 5시였다. 그 정도의 연장이 발생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건만, 지금부터 세 시간을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한층 솟아있던 입꼬리가 빠르게 하강했다. 아직은 추운 날씨였다. 급히 근처 극장들의 상영시간표를 찾아봤다. 죄다 6시 이후에나 시작해 러닝타임은 두 시간을 넘겼다.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에 맞춘 일정인 듯했다. 5시의 백수는 서러웠다. 망망대해의 부표처럼 신촌의 빨간 잠망경 앞에서 생각을 정리했다. 함께 일행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어느새 삼삼오오 모여 반갑게 인사하고 행선지로 발을 옮겼다. 홀로 남아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바쁜 현대인의 표본인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간신히 만났다. 오늘은 몇 시간이나 함께할 수 있을까. 속상한 감정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번졌다. 한껏 꾸민 복장과 엉성한 초콜릿이 괜스레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가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탓할 것은 즉흥적으로 계획을 바꾼 나와 그에게 추가 근무를 선사한 회사였다. 담담한 척, 괜찮은 척 답장을 보냈다. 이미 차오른 감정은 내가 해결해야 할 몫이었다. 1편에서도 이야기했듯, 기분이 울적할 때마다 걷는 습관이 있다. 몸을 움직여서 생각과 기분을 멈춰야 한다는 뇌과학적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랬다. 이번에도 일단 걷고 보자는 생각으로 하릴없이 길거리를 헤맸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익숙한 하수구 냄새와 검은 물웅덩이, 담배 연기와 꽁초들이 반겼다. 신촌이 어떤 곳인지를 잠시 잊고 있었다. 골목을 벗어나 큰 도로로 나가니 수많은 사람들과 자동차, 신호등이 기다렸다. 수많은 장애물을 경계하며 부딪히지 않으려 애를 쓰다 보니 생각이란 걸 멈출 수 없었다. 기분이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였다. 집 앞의 조용한 천변을 걸을 때와는 달랐다.

걷기가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던 내 말은 섣불렀다. 운동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삶을 구제해주진 않는다. 집 근처에 조용하고 안전한 길이 없는 이들에겐 턱없이 좁은 이야기였을 테다. 운동을 할 수 있는 시간, 장소, 몸의 컨디션 등 저렴해 보이는 운동에도 무수한 조건이 따른다. 내 이야기는 오직 나에게만 한정될 수 있다는 명제를 종종 잊는다. 그날만 하더라도 어떤 선택부터가 잘못된 것이었는지를 따지기엔 너무 많은 선택을 대충 쌓아 올린 하루였다. 짧은 고민과 대책 없는 결정의 태도가 이전에 쓴 글에서도 묻어날까 두려워졌다. 요가가 삶의 낙이라던 문장은 또 얼마나 많은 오해를 야기할 수 있는가. 후회가 꼬리를 무는 동안 걷기 말고도 생각을 멈춰줄 다른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고민 끝에 자주 들리던 중고 서점으로 피신했다.
 

양다솔의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 ⓒ위클리서울/ 출판사 놀

글은 슬퍼야 깊이가 있다

평소엔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둘러보지만, 그날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좌석으로 직진했다. 힘이 쭉 빠진 탓에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다가 그대로 눌러앉을까도 고민했다. 그래도 서점에서 핸드폰만 보고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억지로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무언가 새로운 게 기분을 전환시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오늘 들어온 신간 코너에 갔다. 말이 신간이지 다 중고 서적이었다.

아는 책과 작가가 별로 없는 데도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언젠가 읽어보고 싶었던 양다솔의 에세이 <가난해지지 않는 마음>이었다. 이게 오늘의 행운이구나. 뜻밖의 선물을 발견한 기분으로 주저 없이 꺼내 읽었다. 작가소개부터 심상치 않았다. 연혁 대신 하고 싶은 말이 적혀있었다. 그는 말은 기뻐야 힘이 나고 글은 슬퍼야 깊이가 있다고 했다. 표현을 그대로 빌려오자면, 만날 때마다 우울한 소리를 하는 사람은 곁에 두기 힘들고, 쓰는 글마다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은 밥맛이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라서 감탄도 하기 전에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맞는 말이었다. 대화 중엔 끊임없이 하강하는 이야기보다는 자랑이 차라리 듣기 편하고, 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는 글엔 손이 가지 않는다. 같은 내용이어도 말과 글은 다르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갑작스런 고백으로 독자와의 밀고 당기기를 실패한 것 같다고 느끼던 차였다. 이전에 쓴, 운동이 인생을 구원한다거나 우울해서 운동을 한다는 문장 때문이다. 우울함이라는 말은 그 속성 때문에 괜히 무거운 느낌이 든다. 누구나 느끼는 정도의 가벼운 우울감을 공유하고 싶어도 듣는 입장에서는 자세를 고치고 말라버린 목구멍에 침을 삼키게 된다. 말하는 쪽도, 듣는 쪽도 부담을 덜어내기 어렵다. 그러니 덜컥 겁이 났다. 고민 하나 없는 낙천적인 사람이나 끊임없이 삽질을 하는 어두운 사람으로 보이는 건 그닥 상관이 없다.(둘 다 내재된 모습이기도 하다.) 그게 일시적인 감상에서 멈추지 않고 나에 대한 단정적인 판단으로 확장되는 것이 무섭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는다. 누군가는 내 인생도 충분히 힘겨운데 왜 다른 사람이 울어대는 글을 읽어줘야 하지? 같은 생각을 할 것 같다. 쉽게 우울을 느끼는 사람을 좋아하긴 어렵고, 좋아하지 않는 저자의 글을 읽기는 더 어렵다. 우린 대체로 여유가 없으니까 글을 쓰는 입장에선 조바심이 난다.
 

나에게 그랬듯, 너에게도 닿기를

그때 양다솔의 문장에서 큰 힘과 깨달음을 얻었다. 나만의 해석과 결론을 더 덧붙이자면 이러하다. 행복을 자랑하는 글도 최악이지만, 매번 우울하다는 글도 읽는 입장에선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럼 우울해서 노력 중이라는 글은 그나마 낫지 않을까. 원래 목표했던 방향의 정확한 이름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운동으로 잘난 체를 하거나 우울을 늘어놓는 글이 되지 않도록 경계하며 글을 쓰면 되는 것이다. 그게 어려울 때마다 땀이 빠르게 마르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몸을 움직여 머리를 비운 뒤 다시 용기를 내어 쓸 것이다. 그럼 목표에 도달하진 못하더라도 완주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결론으로 지난 1편에 약간의 부연 설명을 덧붙여본다. 운동은 모두에게, 언제나 통용되는 정답은 아닐 수 있다. 다만 가장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는 진통제에 가까운 것 같다. 바로 효과가 발현되지 않는 통증도 있지만, 아무런 약 없이 고스란히 고통을 느끼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우리 삶엔 다양한 처방이 필요하다. 좋은 문장 하나로 힘과 웃음을 얻는 것처럼 다양한 종류의 약은 실은 손을 뻗으면 닿는 자리에 숨겨져 있다. 그중 하나가 운동이 될 수도 있다. 그 작은 사실이라도 붙들어야 하는 날들이 있고, 한순간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이 글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 혹시 데이트의 결말을 궁금해하는 이가 있을까 싶어 몇 자 더 적어본다. 책을 읽고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뒤 시끌벅적한 홍대의 거리도 피곤함 없이 걸었다. 합정을 헤매는 동안에는 유명 기획사 앞에서 연예인을 기다리는 여자들을 구경하고 약속에 들뜬 사람들의 미소를 천천히 바라봤다. 그를 기다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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