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서갱유가 아닌 상선약수를 희망하며
분서갱유가 아닌 상선약수를 희망하며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3.05.02 16:4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사람을 만나면 열에 일곱 이상으로 전쟁 걱정을 한다. 독도는 이제 완전히 일본 땅이 되는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도 제법 있다. 어지럽다. 대통령의 발언 하나하나는 이렇게도 파급력이 높다.

“우리는 지금 정상적인 대통령을 두고 있는가?”

이런 심각한 질문조차도 이제는 식상해져 버렸다는 느낌이다. 하나마나한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져놓고 쩟쩟, 혀 차는 소리를 내고 있자니 황당무계한 의문 하나가 새롭게 떠올라온다.

그는 혹시 세상의 모든 사상을 불태워 버리고자 하는 것일까? 세상의 모든 상식과 자연스러움 같은 것들을 압수수색해서 땅속에 깊이 묻어버리고자 하는 의지로 충만해 있는 것은 혹시 아닐까?

나는 한때 분서갱유가 사자성어인 줄 알았었다. 한자의 뜻은 살펴볼 생각도 없이 그냥 책을 불에 태웠다는 말이 분서갱유인가보다 했었을 뿐, 책을 불에 태웠다는 뜻의 분서(焚書)와 그 책을 썼거나 공부한 학자들을 잡아다가 산 채로 땅에 묻었다는 뜻의 갱유(坑儒)를 나란히 붙여놓은 말이라고는 차마 상상도 못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 벼락처럼 원래의 뜻을 알았을 때, 너무나 부끄러워서 얼굴이 그만 활활 타버리는 것 같았다. 부끄러움 뒤에는 슬픔이 몰려들었고, 슬픔 뒤에는 분노와 공포, 우울 등등 온갖 감정이 한꺼번에 해일처럼 덮쳐 와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 나라의 왕이 자기 나라의 학자들을 산 채로 땅에 묻었단 말이야? 정말로? 하긴 자기 손으로 묻은 것도 아니겠지. 알량한 권력 하나 손에 쥐었다고 감히 그런 명령을 남발했던 것이겠지.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이 하도 이상해서인지 문득문득 그때가 떠올라온다. 생각하면 끔찍한 기억이다. 나는 왜 그런 바보 같은 인식의 틀에 갇혀 있었던 것일까. 내가 자의적으로, 혹은 창의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내가 아직 한자의 뜻풀이도 못 하던 시절에 누군가 분서갱유란 말을 했고, 그 말이 곧 책을 불에 태웠다는 뜻이라 해서 한동안 그렇게 알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사람의 경험은 역사가 되고, 역사는 고전이 되고, 고전은 상식이 되며, 상식은 사람의 말과 행동에 기준이 되면서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약속으로 인식된다. 약속이 깨지면 생체리듬이 깨지고, 리듬이 깨지면 불안과 우울, 분노 등등 혼란에 혼란이 중첩되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아져 버린다.

요즘은 날씨부터가 매우 불안정하다. 모기가 무엇인 줄도 모르고 살아온 시베리아 사람들이 창궐하는 모기떼로 어안이 벙벙해져 버렸는가 하면, 추위란 것을 모르고 살아온 아열대 지역 사람들이 눈구덩이에 파묻히거나 영하 십도 남짓 정도의 추위에 동사했다는 뉴스가 잊을만하면 들려온다. 거기에 옵션으로 항상 따라붙는 단어가 기후변화이고, 지구온난화이고, 탄소중립 등등이다.

이 모든 뉴스를 종합하면 인간의 무분별한 자원남용이 생체리듬을 파괴해서 지구라는 이름의 거대한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말은 곧 해서는 안 될 짓을 인간이 그동안 너무 많이 해 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한증식을 위해서라면 무한파괴도 불사하는 자본주의, 그것도 모자라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무한착취 이론까지 만들어낸 인간 세상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이란 게 있기나 할까?

해서는 안 될 짓을 유별나게 강조한 사람을 찾아내기로 하자면 아무래도 노자를 첫 손에 꼽아야 할 것 같다. 사람과 사람간의 약속은 물론이고 사람과 자연간의, 그러니까 존재와 존재간의 약속을 최상위 개념으로 제시한 그의 상선약수(上善若水)론은 너무나도 상식적이어서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가장 어렵다는 깨달음에 이르면서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된다.

내가 노자를 처음 접한 것은 최루탄이 일상화돼 있었던, 꿈도 희망도 비전도 전망도 없었던, 살아서 움직인다는 사실 자체가 치욕스러워서 문득문득 어금니를 깨물던 시기의 어느 하루 책방에서였다. 동양화풍의 표지에 ‘노자철학 이것이다’라고,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도올 김용옥 선생의 그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살짝 코웃음을 쳤었다.

텔레비전이 심어놓은 선입견일까 건방짐이 그때의 내게 있었던 탓이었다. 두루마기자락을 휘날리며 우렁차게 걷고 있는 그의 모습이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등장하던 무렵이었다. 내가 볼 때 그것은 영락없는 혹세무민한 종교인의 모습이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우면 종교인들이 살판난다는 말도 있듯이, 광주의 학살 사건 이후 여기저기 사방 천지에서 새로 등장한 신흥종교가 순진한 사람을 유혹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노자철학 이것이다’는 표지부터가 전혀 종교 냄새를 풍기지 않고 있었다. 내가 못난 선입견 때문에 도올 김용옥이란 사람을 잘못 파악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그 책을 발견하는 순간에 있었다. 책방에 선 채로 한 시간여쯤 지났을 때 나는 그의 독자가 돼 있었고, 노자에 대해 갖고 있었던 나의 선입견 또한 여지없이 깨져 나갔다.

그때까지 내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던 노자는 도교의 교주였다. 도교란 현실도피를 바탕으로 영생불사 신선이나 꿈꾸는 망상주의자들의 집단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크게 잘못 알고 있었던가 보았다. 도교가 노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노자철학 전체와는 전혀 다른 이단자들의 집합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까지 아마 일 년 남짓 걸렸을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노자는 현실도피는커녕 매우 적극적인 현실주의자였고, 매우 강력한 정치철학으로 무장한 그야말로 선지자였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노자를 말할 때면 항상 따라붙는 상선약수, 이 짧은 한 문장 속에 노자 사상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상선약수는 또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자연과학 등등 인간 세상의 모든 이슈를 해석해낼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다. 그리고 상선약수는 연암 박지원 선생이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외친 “비슷한 것은 가짜다”와 맥이 닿아 있기도 하다.

요즘 말로 ‘짝퉁’이라 멸칭되기도 하는, 비슷하지만 가짜인 것은 대체로 억지스럽고, 과장되거나 축소돼 있으며, 필요 이상으로 화려하거나 친절 혹은 겸손을 가장하고 있기에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간 세상에서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작동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명품이라든가 유명, 유행 같은 수식어에 매몰돼서 자기가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 채로 그냥 무조건 믿어버리고, 정신없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속았다는 것이 확인된 뒤에서야 비로소 속았다는 것을 알고 자기 이마를 때린다.

노자는 사람들의 그런 일반적인 경향이랄까 속성 같은 것을 아마 오랜 시간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보고 있노라니 안타까웠고, 속지 않는 방법을 제시하는 차원에서 상선약수라고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개념을 끄집어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나는 해본다.

어쨌든 물이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 물이 아래로 흐름은 자연법칙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자연스럽고, 하나도 억지스럽지가 않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선언 상선약수는 그래서 설득력이 있고, 자연스럽기조차 하다. 이 자연스런 개념을 정치철학에 입혀놓으면 가짜와 진짜가 명확하게 드러나 보인다. 제아무리 정교한 속임수를 쓴 가짜도 자연스러움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에서 가장 공익적인 분야인 정치를 사적 욕망의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는 가짜는 언제나 있어 왔다. 정치가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광대하다는 반증이다. 사적인 욕망을 배면에 깔고 있으면서 공익을 위한다고 큰소리치는 가짜는 언제나 반짝 만행을 저지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곤 했지만, 영원히 사라지진 않고 좀비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인류사에서 정치를 개인적 욕망 달성의 수단으로 파악한 최고의 전문가를 찾기로 하자면 아마도 진나라 시황을 첫 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그는 터무니없게도 늙지 않고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묘약을 찾는다고 국고를 엄청나게 탕진했을 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거나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가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 못지않은 영화를 누리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었다. 무려 이십 년도 넘는 기간 동안 자신의 무덤을 축조하느라 희생시킨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그런 행동을 나무라거나 비판하는 신하 또는 학자를 잡아다가 산 채로 땅에 묻었고, 학자들의 말이 적힌 책은 모조리 압수해서 불에 태웠다. 그렇게 하면 학자들의 생각이, 사상이 사라질 거라는 착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인사불성, 안하무인, 앞뒤좌우 분간을 못 하는 왕이었던 셈이다.

만만찮은 내력이 있기는 했다. 자신의 생모가 여불위라는 상인의 애첩이었다는 것, 애첩이었을 당시 임신한 몸으로 왕자에게 선물로 바쳐졌고, 왕실로 들어가서 아이를 낳았는데 왕자가 나중에 왕이 되었다는 것, 이때부터 여불위는 상인의 길을 접고 정치를 시작해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한편 과거의 애첩이었던 왕비와 수시로 통정을 해 왔다는 것, 이런 등등의 비밀을 진시황이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사춘기를 지나면서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혐오감 플러스 잔인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뭐 그렇다. 괴롭고 슬프게도 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현 대통령을 보면 자꾸, 무슨 터무니없는 생각이냐고 스스로를 나무라면서도 자꾸 진시황을 소환해서 대비해보곤 한다. 현 대통령의 생장과정을 내가 모르는 까닭에 딱히 뭐가 닮아 보인다고 말하긴 어렵다 해도,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친하지 않은 사람은 국정의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거칠고 난폭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닮았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물론 내 개인적인 느낌일 뿐이다. 어쩔 것인가. 나의 이런 느낌이 분서갱유와 같은 끔찍한 현실로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추이를 지켜나 봐야지 어쩔 것인가.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보고 2023-05-11 16:04:52
옳으신 말씀 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