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메스티아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그 남자는 메스티아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 정민기 기자
  • 승인 2023.05.05 08: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민기의 아시아 스케치] 메스티아

[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메스티아 걷기

우리는 산맥의 바로 아래 까지 온 셈이었다. 이 산맥을 넘으면 곧바로 러시아로 이어진다. 코카서스라고 불리는 넓고 긴 산맥. 누군가에게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가 되기도 하는 산맥. 조지아는 코카서스 산맥을 따라 바로 아래 이어진 나라였다. 유럽의 끝, 아시아의 시작. 혹은 아시아의 끝, 유럽의 시작. 혹은 유럽과 아시아라는 불투명한 경계 그 자체를 보여주는 땅. 조지아의 서쪽으로 들어온 진과 나는 동쪽의 수도 트빌리시로 향하기 전 우선 서북쪽의 메스티아부터 들렸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거의 반나절쯤 걸려서 도착한 메스티아는 정말, 메스티아 같았다. 어쩐지 판타지 게임에 나올 법한 마을의 이름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산골 마을 하면 어쩔 수 없이 한국의 가평을 떠올리게 되는 빈곤한 상상력의 나에게, 메스티아는 갑자기 서양 판타지의 세례를 입은 가평처럼 보이기도 했다. 산맥 사이에 조용하고 조그맣게, 널널하고 편안하게 자리한 마을. 조지아를 찾는 여행객들은 메스티아에 들려 트래킹을 하거나, 잠시 쉬어간다. 빙하를 볼 수 있는 트래킹 코스도 있는 모양이었지만 진과 나는 트래킹까지 생각하지는 않았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여행을 다녀온 이후 갑자기 운동에 꽂혀서 지금은 주말마다 등산을 다니거나 조깅을 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여행 당시에 나는 상상력만큼이나 체력도 빈곤했다. 버스를 오래 탄다거나 북적거리는 곳에서 버틴다든가 하는 지구력만 좋았을 뿐 다른 운동은 잘 못했다. 어쩌면 진은 트래킹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언제나 튼튼하고 탄탄했으니까. 그는 나와 여행하는 동안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다. 지금 몸으로 다시 메스티아에 간다면 제대로 긴 트래킹을 해보고 싶을 만큼 메스티아의 산세는 너르게 아름다웠다. 굳이 산에 직접 오르지 않아도, 산에 둘러 싸여 있는 마을의 기운이 편안했다. 위압적인 히말라야 산맥의 느낌도 아니고, 그저 아담한 동산 같은 느낌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오랜 터전이었을, 왜인지 그들의 시간이 그대로 느껴지는 산맥과 마을들. 메스타아는 산의 고장이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처음 메스티아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편안한 분위기에 한껏 취해 있었지만, 숙소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고역이었다. 진이 알아서 찾아 놓은 숙소는 중심가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는 길로 진은 자꾸만 걸어갔고, 그 뒤를 따라 걷는 나는 그날따라 무거운 배낭을 겨우 받치며 땀을 흘렸다. 왜 이렇게 먼 곳에 숙소를 잡았나, 좀 더 잘 찾아보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들을 하며 낑낑거렸다.

체력을 키워야지, 확실히 체력이 필요하구나, 내 움직이지 않는 몸을 원망하며 30분 동안 걷자, 2층 목조 주택이 눈에 들어왔다. 여행객이라고는 거의 없고, 동네 사람들이 소를 끌고 천천히 지나다니는 곳. 포장되지 않은 시골길. 띄엄띄엄 지어진 주택가 사이에서 개들이 천진하게 짖는 소리. 진이 찾은 숙소는 정말이지, 편했다. 그날 손님은 아직 우리밖에 없었다. 다른 가구 없이 침대만 놓인 2층에 짐을 풀고 발코니에 섰더니, 옆옆 주택 앞에서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마을에서 오래 지내며 글을 써도 좋겠다고, 혼자 생각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내가 비를 맞으며 돌아왔을 때

편안한 오전을 보냈다.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정확히는 별다른 가구가 없는 목조주택이, 그 바깥으로 나무와 숲과 산이 이어지는 메스티아의 장식 없는 수더분함이 좋았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근처 슈퍼마켓에 가서 식재료를 샀다. 슈퍼에는 주름이 멋진 아저씨가 웃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담고 싶어 사진을 요청했더니, 사진에는 어색하게 굳어버린 얼굴만 찍혔다. 물론 그 얼굴은 한국에 도착해 필름을 인화하고 나서야 볼 수 있었지만, 한국에 돌아와 아저씨의 딱딱한 얼굴을 보면 나도 모르게 그때 메스티아의 기운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어색함은 때로 진실함의 보증이 되기도 한다는 생각을, 메스티아에서 했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점점 요리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진 덕분에, 그가 요리한 음식으로 끼니를 챙겨 먹고 무얼 할까 고민했다. 좀 걸을까, 주변을 둘러볼까, 진은 검색해 보더니 근처에 간단하게 트래킹 할 수 있는 코스가 있다고 했다. 산 위에 있는 작은 호수로 이어지는 길이라고 했는데, 나도 오랜만에 몸을 더 움직여 걷고 싶었다. 이렇게 좋은 산을 안 가기는 힘들어서, 우리는 산에서는 구글지도보다 정확한 맵스미 어플을 나침반 삼아, 산 방향으로 걸어갔다. 낡은 집들, 살짝 무너진 돌담. 얼마나 오래 사람들이 지나다녔을지 모르겠는,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길들. 그 길을 걸으며 진에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체력이었다. 산이 가팔랐다. 내게는 너무 가팔랐다. 점점 진과 속도가 벌어져서, 진을 먼저 보냈다. 안 하다가 갑자기 무리를 하려고 해서 그런지, 영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가보다가 안 되겠으면 먼저 내려가서 쉬고 있겠다고 말을 전했다. 진은 문제가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남기고 성큼성큼 올라갔고, 나는 진이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고, 또 그렇게 내 속도대로 길을 걸었다. 뒤에서는 중국인 단체 여행객 아주머니들이 호탕하게 이야기하며 올라왔다. 그들이 한국어에 대해 짧게 물었던가, 나의 대답에 그들은 원래 웃던 그 모습 그대로 내 앞을 지나쳐 계속 올라갔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그렇게 오르다가 이번엔느 소떼를 만났다. 나무 없이 가파르게 이어진 언덕에 열 마리가 넘는 소들이 띄엄띄엄 서서 나를 응시했다. 분명히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나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는 것 같은 그들의 눈은 언제나 크고 투명하고 축축했다. 뭐랄까, 초현실적이다…. 40도 경사면에 열 마리의 소들이 동시에 나를 응시하고 있는 이상한 풍경이었다. 그들의 눈을 지나쳐 갔고, 그러자 하늘에서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심하지는 않았지만 급격하게 어두워진 하늘을 보니 쉽게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먼저 내려가야겠다, 진도 알아서 내려오겠지 생각하며 잠시 나무 밑에서 숨을 골랐다. 그때 무심결에 스마트폰에서 인스타그램을 켰고, 한때 친하게 지냈던 후배가 올린 새로운 연애의 시작을 알리는 커플 사진을 보았다. 비는 내리고, 힘은 들고, 질투는 나고, 그러나 그 질투를 나조차도 모른 척하고 싶고. 이상하게 꼬인 마음으로 비를 맞으며 왔던 길을 그대로 내려왔다. 천천히 내려가고 있으니, 비 소식에 돌아온 진이 금세 나를 따라잡아 그와 만나 같이 내려왔다.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위클리서울/ 정민기 기자

숙소에 도착하니 새로운 손님이 한 명 짐을 풀고 있었다. 고독한 동양인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자는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희었다. 혼자 짐을 챙겨 여행하는 중년의 아우라가 세서 쉽게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와 우리는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고 각자의 침대에서 할 일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밤이 되고, 한 번 이곳을 지나쳤던 사람의 멋진 여행기를 읽고 있다가, 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불쑥, 그 남자가 한국말로 말했다.

여기 참 좋죠?

나는 그의 사연을 이제 거의 잊었지만 그와 나누었던 티베트 이야기와 그가 말을 했던 태도는 기억한다. 그 남자는, 메스티아의 풍경과 잘 어울렸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 뉴텍미디어 그룹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07108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 인터넷 : 서울, 아 52650 (등록일·발행일 : 2019-10-14)
  •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영필
  • 편집국장 : 선초롱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목로 72(신정동)
  •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전무이사 : 황석용
  • 고문변호사 : 윤서용(법무법인 이안 대표변호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 위클리서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weeklyseoul.net
저작권안심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