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박석무 ⓒ위클리서울
박석무 다산학자 ⓒ위클리서울

[위클리서울=박석무] 다산의 유배살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으며, 얼마나 힘들고 고달펐을까요. 유학 경전 중에서도 세상에 어렵다는 『주역』에 대한 연구에 다산이 기울인 정성과 열정, 힘든 노력에 관한 이야기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위대한 진리탐구의 본보기 같아 한 번쯤 살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배 생활도 견디기 힘들 때 고독과 외로움을 이기고 『주역』 연구에 ‘전심치지(專心致志)’하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리듯 상세하게 설명한 내용이 연보(年譜) 47세 조항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808년 무진(戊辰)은 다산의 나이 47세로 그해 봄에 강진읍내의 생활을 접고 귤동마을의 뒷산인 다산(茶山)에 있는 윤씨들의 정자 다산초당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해 겨울 마침내 다산은 『주역사전(周易四箋)』이라는 24권의 주역 연구서를 탈고했습니다. “나는 갑자(甲子:1804)년 동짓날(1803년 겨울)에 강진 유배지에 있으며 비로소 『주역』을 읽기 시작했다. 이해 여름에 처음으로 요체를 뽑아 정리한 공부가 겨울에야 완료되었으니 모두 8권으로 「갑자본」이었다. … 그 다음해에 개찬했는데 또한 8권이니 「을축본(乙丑本)」이다. 그 다음해에 모두 다시 고쳐 봄이 되어서야 마쳤으니 모두 16권으로 「병인본(丙寅本)」이다. 그 다음해에 다시 고쳐 완료하니 24권으로 「정묘본(丁卯本)」이다. 그 다음해인 무진년 가을 다산은 다산에 있으면서 둘째아들 학유를 시켜 탈고했으니 24권으로 「무진본(戊辰本)」이다.”

『주역』이라는 책을 다섯 번에 걸쳐 고치고 또 고쳐 완성해낸 다산의 정성과 그 끈질긴 학구열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은가요. 다산 자신이 240권이 넘는 경학 연구서에서 오직 『상례사전』과 『주역사전』만은 성인의 뜻을 받들어 저술한 책으로 후세에 길이 남을 책이라고 자신있게 설명했던 책이 바로 그 책이었습니다. 유배살이 7년째에 모진 고난을 극복하고 『주역사전』을 완성하고는 그 책의 핵심내용을 요약하여 가장 친했던 친구에게 보낸 편지 「여윤외심영희(與尹畏心永僖)」라는 장문의 학술 편지에는 그런 연구과정의 고독과 외로움, 고통과 아픔을 참으로 소상하게 알려주는 내용이 있습니다. 

“7년 동안 유배 살며 문을 닫아걸고 칩거하노라니 노비들도 나와는 함께 서서 이야기도 하려고 안했습니다. 그러므로 낮에 보는 것이라고는 구름의 그림자나 하늘의 빛깔 뿐이고, 밤에 듣는 것이라고는 벌레소리와 바람에 부딪히는 대나무 소리 뿐입니다. 이런 정적의 생활이 오래되니 정신이 모여져서 옛 성인의 글에 전심치지 할 수 있어 자연히 울타리 밖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을 엿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산은 친구에게 자신이 터득한 주역의 진리를 빠짐없이 보고하면서 가슴 속에 감춰두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지만 몸에 중풍이 심하고 뼈까지 쑤시고 아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그래도 알아줄 유일한 친구 그대에게는 말하지 않을 수 없노라는 하소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윤영희는 다산과 함께 벼슬하던 홍문관 관인으로 교리(校理) 벼슬에 올랐고 학문이 높은 친구여서 그에게 자신의 연구업적을 소상하게 보고했던 것입니다. 종아이들조차 말도 걸어주지 않는 고독과 외로움, 보이는 것은 구름과 하늘, 들리는 것은 벌레소리와 대숲의 바람소리 뿐인 그 처절한 고독 속에서, 다산의 학문은 익어가서 끝내 그런 위대한 저서를 완성해낼 수 있었으니, 그의 천재성과 근면성이 합해져 훌륭한 창조가 이룩된 셈입니다. 

5년에 걸쳐 다섯 번이나 원고를 고치고 바꿔, 세상에 드문 진리를 터득해낸 다산, 그런 학자가 그리운 요즘입니다. 말로만 학자라 떠들며 연구는 제대로 안하는 우리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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