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있다
  • 김혜영 기자
  • 승인 2023.05.09 08: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영화제 탐방기] 평창국제평화영화제 3화

[위클리서울=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중요한 건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

얄궂게도 비는 계속 내렸다. 이미 닦은 의자에도 금방 빗물이 고였다. 광장의 지붕만으로는 사방에서 들이닥치는 비를 막을 길이 없었다. 댐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아 큰 재해를 예방한 어느 소년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 아이도 대단한 효과를 기대하기 전에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을 것이다. 물론 영화제를 준비하던 우리가 선견지명이 있는 영웅과 비슷하다는 뜻으로 꺼낸 이야기는 아니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그 마음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는 오랫동안 준비하고 누군가는 설레며 기다려 온 축제가 하룻밤의 날씨 때문에 재난의 현장으로 탈바꿈되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같은 마음인 듯 바삐 움직였다. 이게 맞는지, 이렇게 하면 해결되는 게 맞는지 물어보거나 답을 들을 겨를도 없었다.

한참 빗물을 닦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허리를 펴서 주변을 둘러봤다. 군데군데 모인 스태프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던 일을 제쳐두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 상황을 확인했다. 바닥에 깔아둔 인공 잔디 카펫과 그 아래의 아스팔트가 물을 흡수하지 못한 채 침수되고 있었다. 원래 지반이 낮았던 쪽은 사람 보폭보다 넓은 웅덩이도 생겼다. 위험할 정도는 아니고 불편을 끼치는 수준이었지만, 이곳은 영화제에 초대받은 게스트들이 개막식을 지켜볼 수 있도록 조성한 공간이었다. 영화에 수고하고 기여한 손님들이 먼 곳까지 와준 것이기에 준비를 돕는 입장에서는 더 편안한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스태프 이전에 영화와 영화제를 아끼는 관객으로서 내가 호스트인 것 마냥 속상해졌다. 다른 곳에는 지붕이 없어서 장소를 옮길 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답답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먹구름처럼 들어찼다.

그때 기술팀에서 가로등처럼 생긴 긴 가스난로들의 불을 켰다. 밤에 기온이 떨어지면 쓰려고 미리 설치해 둔 것 같았다. 그런 걸로 무슨 효과가 있을지 반신반의했지만, 놀랍게도 주변에 고여있던 비가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다. 여름의 한복판이었던 6월 23일, 습도를 낮추기만 해도 효과가 생기는 무더운 날이었다. 그래도 개막식은 무사히 치를 수 있겠다는 희망이 솟아올랐다. 비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여전히 우산을 써도 소용이 없게 바람이 불었지만, 행사 진행을 걱정할 단계는 지나갔다. 그즈음엔 서울도 비가 오고 전국이 흐렸다. 사무국이 미리 날씨를 체크하며 대책을 세워둔 덕분에 모두 재빠르게 조치를 취했다. 다행히 개막식은 지체 없이 시작됐고, 우리의 중요 임무는 끝이 났다. 다시 팀별로 뿔뿔이 흩어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지금을 위해 모두가 달려온 것일지도 몰랐다

MC들의 밝고 힘찬 인사로 개막이 선언됐다. 빗방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에너지에 덩달아 힘을 받았다. 궂은 날씨에 먼 곳까지 와준 게스트들이 입장하는 동안 일이 끝난 스태프들은 열심히 박수를 쳤다. 축하 공연도 이어졌다. 영화 <올드보이> 주제곡에 가사를 붙인 ‘기로’,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눈물샘을 자극하던 ‘Dreams’, 선교사와 원주민이 음악을 통해 경계를 푸는 장면으로 유명한 <미션>의 ‘Nella Fantasia’였다. 리허설 때 수십번 들었어도 여전히, 아니 더 황홀했다. 많은 사랑을 받은 영화 음악을 노래해 준 그룹 유엔젤보이스 덕분에 관객과 스태프 모두 진심으로 즐기며 감상에 빠져들었다. 말 그대로 선물 같은 축제의 현장이었다.

올해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레이디 가가의 영화 <탑건: 매버릭>, 리한나의 <블랙팬서: 와칸다 포에버> OST 축하 무대가 있었다. 외국 시상식에서나 보던 영화 음악 무대를 우리나라 영화제에서 라이브로 감상할 수 있어 감사했다. 이렇게 특별한 체험은 영화제에 방문한 이들과 지역 주민들에게만 한정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이런 공연이 많아질수록 영화와 음악이 더 폭넓은 사랑을 받고, 다양한 장르의 예술인들에게 무대가 주어지며, 문화생활의 기회가 없던 이들이 즐길 수 있는 선순환이 이뤄질 것이다. 각종 시상식에서 서로가 멋쩍어지는 아이돌의 축하 무대 대신 연관성이 있는 분야의 예술 공연을 올리는 것부터 시작하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제의 훌륭한 프로그램을 경험할 때마다 시청률이나 대중성을 잡겠다는 핑계로 놓치고 있는 소중한 기회와 순간들이 더욱 아쉬워진다.

서로를 축하하고 고마워하는 여러 순서가 지나고 나니 벌써 끝에 다다랐다. 뭔가 허무해지려던 찰나, 화려한 폭죽들이 밤하늘을 가득 밝혔다. 행사의 모든 요소를 아는 건 아니라서 예상하지 못한 깜짝 선물이었다. 오늘이 마지막인 듯 아낌없이 반짝이는 불꽃들을 보며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은 벅차고 아름다운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이 짧은 순간을 위해 모두가 달려온 것일지도 몰랐다. 떠들썩하게 기뻐하며 개막식을 지켜보던 스태프들 모두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만 바라봤다. 알랭 드 보통은 어느 예술서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일에 대해 쓴 적 있다. 구름은 북적이는 우리의 삶과 떨어져 있어서, 우리는 구름을 보는 동안 걱정 근심을 덜고 자아의 불평을 잠재우는 드넓은 곳에서 안식할 수 있다고 한다. 거대한 자연이나 현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풍경은 그래서 아름다운 것 같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는 사람들과 짧게 반짝이는 불꽃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꿈이 지나가고 현실이 남았다

신기하게도, 개막식이 끝나자마자 폭풍이 휘몰아쳤다. 전에 온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장대비였다. 심상치 않은 기류에 개막식이 끝나자마자 이어서 시작하려던 야외 상영은 실내로 변경됐다. 기존 스태프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개막작 상영과 게스트들의 이동은 문제없이 해결했다. 그동안 빗줄기는 한계 없이 거세졌다. 우비가 아무런 효용이 없을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불었고, 서커스에서 쓸법한 두터운 천막이 찢어졌다. 다행히 라운지로 준비하고 비워뒀던 공간이라 누군가 다치는 사고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케이터링 서비스와 물품을 더 젖기 전에 옮기고, 행사 장소와 시간을 변동하면 됐다. 축하 무대와 불꽃놀이 등 장소를 옮길 수 없는 주요 행사들은 이미 끝났으니 천만다행이었다.

베테랑 스태프들이 빠른 판단으로 현장을 지휘하는 동안 우리는 비가 들이친 컨테이너를 정비하고, 미리 세팅해 둔 물품을 전부 옮겨서 닦았다. 이제는 안전 문제를 대비해야 하는 수준이어서 이벤트를 위해 준비했던 부스도 철거했다. 날씨를 봐서 내일 아침에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나와 다시 세팅하는 것이 불가피했다. 원래 공간 조성을 해두면 영화제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사용하지만, 한 번도 쓰지 못한 채 모든 스태프가 늦은 시간까지 남아 일일이 철수했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은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다른 일을 하다가도 천막이 찢어지면 우선적으로 달려가 보수를 하고, 지원이 필요한 업무가 있으면 손을 보탰다. 폭죽은 한여름 밤의 꿈이었다. 꿈이 지나가니 막막한 현실이 남아 기다렸다.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던 병아리 같은 동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날씨였다. 혹시 영화제가 취소되거나 그동안 준비한 것들을 하지 못할까 걱정이 들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을 총괄해야 하는 팀장님과 매니저님들이 훨씬 힘들었을 것이다. 잠깐 와서 일을 시작한 우리보다 오랜 시간 준비해 왔기에 더욱 속상하고 충격적이었을 테다. 그 와중에도 미소를 잃은 적 없는 팀장님은 빨리 퇴근을 시켜줘야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우리를 걱정하셨다. 당장 벌어질 수 있는 안전 문제를 대비하느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날씨가 벌인 일이라 모두가 당연하게 납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어쩔 줄 몰라 하며 미안해하셨다. 단기 스태프들을 불러 모아 원래 행사용으로 준비했던 음식들을 마음껏 먹고 쉬도록 챙겨주시기도 했다. 긴장했던 스태프들은 다시 활기를 되찾고 서로를 챙기며 한 마음으로 일했다.

 

ⓒ위클리서울/ 김혜영 기자

기적은 늘 일어나고 있다

급한 불들이 꺼진 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도 팀장님의 결정으로 단기 스태프들은 퇴근을 했다. 초과 근무를 했으니 내일은 늦게 출근하라는 공지도 있었다. 오늘 철수한 것들을 내일 아침에 다시 손을 보고 세팅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정말 쉽게 내릴 수 없는 힘든 결정이었다. 우리의 걱정을 뒤로 하고, 팀장님은 일일이 등을 두드리며 고생이 많았고, 얼른 가서 쉬라고 말씀하셨다. 여전히 남아 고생할 매니저님들을 보니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분야의 현장에서는 단기 스태프일수록 힘든 일을 맡는 것이 당연하다. 애초에 그러려고 따로 외부 용역을 고용한다. 아닌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내가 경험한 몇 개의 영화제에서는 일하는 기간이 짧을수록 업무량이 적으면서 더 많은 배려를 받았다. 상근 직원들이 새로 온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환경과 업무가 더 힘들 것이라며 걱정하는 따뜻한 문화가 있는 것이다. 집행 위원들은 스태프들을, 스태프들은 자원봉사자들을 챙기기 바쁘다. 앞으로 이곳을 책임져 나갈 귀한 후배들이 온 것으로 여기며 영화제에서 일하는 동안 모두가 행복하고 의미를 찾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린 결국 영화가 좋아서 이곳에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강력한 유대감을 느낀다. 업무 특성상 다양한 돌발 상황이 많이 벌어지지만, 에너지가 고갈되지 않은 채 온기를 나누며 일할 수 있는 이유다.

늘 느끼지만 영화제는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과정에 사람의 손길이 닿는다. 예를 들어 매일 진행되는 방송이라면 이미 모든 장비와 사용 값이 스튜디오에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내일도 같은 곳에서 촬영을 할 테니 모든 물품을 철수하고 다시 세팅할 필요가 없다. 매일 출근하는 스태프들도 오래 호흡을 맞춘 베테랑이고, 어쩌다 신입이 들어와도 사수로부터 직접 현장 교육과 실습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영화제는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다. 장소와 시간이 바뀌는 건 예사 문제고, 기술팀과 장비, 세팅과 스태프 등 모든 요소가 매번 바뀐다. 연례행사 특성상 불가피한 일이다. 새로운 환경과 조건 속에서 대규모의 축제를 문제 없이 진행한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그리고 그 기적은 모든 영화제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번엔 꼼짝없이 망했다고 느껴도 어떻게든 해결을 해낸다. 이게 또 되는구나. 모든 스태프 한명 한명의 수고와 노력이 경이롭다. 아직 본격적인 상영과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전인 개막식 날이었지만, 진한 희로애락을 느끼며 내가 이곳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주) 뉴텍미디어 그룹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서울 다 07108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 인터넷 : 서울, 아 52650 (등록일·발행일 : 2019-10-14)
  • 발행인 겸 편집인 : 김영필
  • 편집국장 : 선초롱
  • 발행소 :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목로 72(신정동)
  •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전무이사 : 황석용
  • 고문변호사 : 윤서용(법무법인 이안 대표변호사)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 위클리서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master@weeklyseoul.net
저작권안심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