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5월
괴로운 5월
  • 김수복 기자
  • 승인 2023.05.17 10:04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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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인간은 어디까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어디에서 왜, 언제 들이닥치는가. 화려한 소풍의 계절 5월이 오면 나를 문득문득 괴롭히는 이런 우울한 질문은 민중가요 한 소절로부터 시작됐던 것으로 기억한다.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에 젖-가슴.”

언제 어디서 맨 처음 들었는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내용이 주는 충격이 하도 커서 다른 기억은 죄다 삭제돼 버렸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충격을 당하기 전까지의 5월은 내게 여기저기 아무 데로나 쏘다니기 좋은 계절이었다. 가진 것은 없어도 나름 행복을 노래하고 있었던 셈이다.

 

ⓒ위클리서울/ 김현수 객원기자

뭘 몰라서 가능했던 행복이 나를 떠나 버리기까지는 글쎄,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돈수처럼 한순간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날 이후 밤마다 악몽이 찾아들었다. 발가벗겨진 여학생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꿈틀, 꿈틀 죽어가는 꿈이었다. 가끔은 전철 안에서 졸다가 그런 끔찍한 환상을 보고 와락,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광주의 5.18 당시 나는 서울 시민이었던 까닭에 직접적인 경험이 없었다. 직접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초기에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텔레비전과 신문이 보여주는 그림 몇 개와 폭동이라는 단어 하나가 내 기억을 장악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텔레비전과 신문이 보여주는 그림 속에 무장한 군인은 보이지 않았다. 화염병을 들고 뛰어가는 학생과 시민으로 가득 차 있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폭동, 불평불만이 많은 자들의 폭동인 셈이었다.

폭동을 강조하는 언론의 선전, 선동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아마 곧이곧대로 믿지는 못했을 것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믿어 넘기기에는 허술한 점이 너무 많았다고나 할까. 이른바 육하원칙이라고 하는,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설득당할 준비가 돼 있는 사람조차도 이해가 안 되는 강력한 주장만 난무할 뿐 가슴으로 파고드는 정서적 논리가 전혀 없었다.

그런 어느 하루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 ‘광주 폭동’ 관련 비디오를 보았다. 거기가 어디인지, 누가 주최했는지, 나는 그곳을 어떻게 알고 찾아갔는지 등등 세밀한 기억은 지금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알전구 하나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희미하게 차가운 빛을 뿜고 있었다는 기억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 사람의 머리가 마치 조각상처럼 놓여 있었다. 앉아 있다거나 서 있다는 느낌이 없이 그냥 놓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람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가끔 들리는 잔기침 소리와 훌쩍이는 소리 그리고 한숨 소리가 아니라면 그 자체가 하나의 몽타주로 인식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으스스한 침묵 속에서 천장의 알전구마저도 꺼지고, 여성성의 목소리가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하고 낮게, 비장하게 선언하는 순간 동영상이 떴다.

개인화기 장총에 대검을 장착한 군인들이 수십 명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달리면서 좌로 우로, 중앙으로 산개해서 계속 달린다. 그러다가 한 장면이 크게 확, 마치 보는 사람을 찔러 죽일 듯이 크게 비쳐진다. 군인 한 명이 들고 있던 개인화기 장총 개머리판으로 남학생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다른 군인 한 명은 역시 들고 있던 개인화기에 장착된 대검으로 그 학생의 옆구리를 푹, 찌르는 그림이었다. 소리는 없었다. 맹렬하게 처절하고 잔혹한 느낌을 주는 움직임이 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거의 미쳐서 지냈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온통 그것뿐이어서 다른 말은 들리지도 않고, 다른 그림은 보이지도 않고, 책이나 잡지도 다른 주제는 읽히지가 않아서 그것만 찾아다니고 있었으니, 미치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자체도 신기한 일이긴 하다. 우선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게 신기하고, 하도 오래 돼서 폐업한 여관방 한 칸을 얻어 자취하는 상황이라 전화도 없었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다닐 수 있었는지도 신기하고, 광주의 광자만 꺼내도 잡혀가는 시절에 관련 세미나와 전시회, 상영회 등등을 그렇게도 많이 찾아다녔건만 한 번도 잡혀가지 않았다는 것 또한 불가사의다.

어쨌든 그렇게 인사불성의 상태로 헤매 다니던 시기의 어느 하루 만난 사람이 광주의 그날, 그 시기에 그 현장에 있었던, 누나들 셋과 함께 살다가 둘을 잃어버리고 눈에 핏발이 선 채로 헤매는 고등학생이었다. 내가 만났을 때 그는 물론 고등학생 티를 벗어난 지도 한참이었다.

황학동 만물시장에서였다. 없는 것이 없어서 북한이 개발한 독침도 구할 수 있고, 돈만 있다면 권총도 구할 수 있다는 황학동 만물시장을 나는 언제부터인지 취미처럼 드나들던 참이었다. 독침이나 권총을 구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당연히 없었고, 그만한 돈을 갖고 있지도 않았지만, 독침이나 권총을 구할 수 있다는 풍문 자체가 내게는 그 어떤 희망으로 인식되고 있었다고나 할까, 다리가 아파서 더 이상은 못 다니겠다 싶어질 때까지 헤매 다니다 보면 가슴을 짓누르는 돌덩이가 같은 것이 없어진다는 느낌이어서 한 달에 두세 번씩은 달려가곤 했었다.

“형. 나한테 막걸리 한 병 사주면 안 되까?”

아직은 선선한 기운이 감도는 3월의 어느 하루 느닷없는 목소리 하나가 내 귀를 뚫었다. 나는 당연히 흠칫 놀라서 우뚝 섰다. 왜소한 체격에 키도 작은 청년이 나를 보고 있는데 그 눈빛이, 그 표정이 어찌나 살인적으로 절박해 보이는지 내 가슴이 그만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래 전에 헤어진,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잃어버렸던 동생이라도 만난 듯이 나는 한참이나 입도 뻥긋 못 하고 그를 쳐다만 보고 있다가 그래, 짧게 한 마디 뱉어내고 눈에 보이는 아무 데로나 가서 앉았다. 하늘을 가리는 포장도 없이 손수레에 연탄화덕 두 개를 얹어놓고 양배추와 곱창을 섞어서 볶아내는 뭐랄까, 내 인생만큼이나 피로와 가난의 냄새가 짙게 풍기는 간이주점이었다.

그는 그날 두 시간도 넘게 내 뒤를 따라다녔노라고, 자리에 앉자마자 수줍게 고백을 했다. 두 시간도 넘게 나를? 아니 왜? 어리둥절해 하는 내 얼굴을 그는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더니 입술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두 말이 필요 없이 울음을 참는 모습이었다. 다행히도 울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는 이미 울음에 포획돼 있었다. 울음에 젖은 그의 목소리가, 그 언어가 나를 기절초풍하게 했다. 내 뒷모습에서 자신의 셋째 누나를 보았다는 것이었다. 하는 짓이 선머슴아 같아서 시집가긴 다 틀렸다고, 부모님의 걱정을 무던히도 사던 자기의 셋째 누나를 생각나게 하는 뭔가가 내게 있다는 것이어서,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소리인가 하면서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않을 수가 없었다.

광주에서 완행열차 비둘기호를 타고 밤새 달려서 아침 일찍 용산에 도착했다는 말이 그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는 느낌이었다. 결혼한 큰누나 집에 가서 아침을 먹고 두 시간쯤 쉬었다가 나온 거라는 얘기가 그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나는 바싹 긴장해서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해마다 3월이면 황학동에 와서 군사용품을 구입하는 게 연례행사가 됐다는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너 뭐냐? 누구냐?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5.18 전야제 행사 소품으로 쓸 군사용품을 해마다 황학동에서 구입해 간다고 하는 그는 위로 형은 하나도 없이 누나만 여섯이나 두고 살아 왔다고 했다. 부모님이 아들 하나만, 아들 하나만, 빌고 빌던 끝에 자기를 본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집안의 왕 노릇을 해 왔던 모양이었다. 열여섯 나이로 시내버스 안내양을 시작해서 서울 사람이 돼버린 큰누나만 빼고 다섯 명의 누나들이 의무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경호원 내지 하녀 노릇을 해 왔고 그는 그것을 매우 자연스럽게 여겨왔다는 것이었다.

산골짜기 농사꾼 아들이 광주 시내, 그것도 한복판 전남도청 뒤편에 집을 얻어 유학생활을 했던 것도 집안의 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절대로 산골짜기 중학교에 보낼 수 없다는 신념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고, 얼마 되지 않는 전답 중에 일부를 팔아서 방이 셋에 거실까지 큼직한 집을 빌린 다음 딸들에게 일종의 사전정비 작업을 시켰다. 방직공장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는 셋째와 넷째, 다섯째로 하여금 기숙사를 나와서 아들이 도착했을 때 불편함이 하나도 없이 하라는 엄명을 내린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그야말로 아무 불편함이 없이 광주에서 중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불편은 없었지만 우유 남기지 말고 다 마셔라, 양말 벗어라 등등 끝도 없이 들려오는 누나들의 잔소리로 인한 심리적 불편은 이루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는 사흘이 멀다고 쓰레기통 같은 것을 걷어차며 집을 뛰쳐나오곤 했지만, 성공한 가출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조건이었다. 의기양양하게 뛰쳐나오긴 하지만 십 분도 채 안 돼서 누나들의 다정한 손길이며 얼굴이 차례차례 떠올라 오는데 어쩔 것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복에 겨워 짜증을 내는 세월이 중학교 삼 년, 고등학교 일 년을 지나 이 년째로 접어들던 그 해의 그날 누나 둘이 한꺼번에 사라져 버렸다. 처음에는 물론 사라졌다는 생각도 해보지를 못했다. 사라졌다는 생각은커녕 퇴근할 시간이 넘어도 한참을 넘었는데 아직까지 안 돌아오는 이유가 뭐냐고 투덜투덜 온갖 짜증을 내다가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일러바치고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핸드폰은커녕 삐삐조차도 없이 달랑 유선전화 한 대만 있던 시절이었다. 방직공장은 동일한 시간에 일제히 출근해서 일제히 퇴근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한 개조가 출근하면 다른 한 개 조는 퇴근을 하는 구조였다. 그 무렵에 셋째 누나와 다섯째 누나가 같은 조였고, 넷째 누나는 다른 조여서 집에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넷째 누나가 출근을 하면 한 시간도 채 안 돼서 셋째 누나와 다섯째 누나가 퇴근해서 반찬거리 따위들을 사 들고 나란히 돌아왔다. 그것은 관행이었고, 약속이었다. 관행과 약속이 깨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누구도 해보지 않았다. 그런데 깨졌다. 밤이 깊었어도 누나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예감으로 치를 떤 것은 그날로부터 사흘인가 나흘이 지나 부모님이 달려오신 뒤였다. 사흘인지 나흘인지 알 수도 없는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고, 부모님과는 어떻게 연결이 돼서 달려오실 수 있었는지 또한 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일단 실종신고부터 하자고 하셨지만, 경찰서는 이미 기능을 상실해서 민원인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누군가 시체 안치소가 차려졌다는 얘기를 하면서 찾아가 보라고 했지만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 채로 전전긍긍하다가 결국은 발길을 잡았다. 다섯째 누나가 상무대 안치소에 발가벗겨진 몸으로 홑이불에 덮여 있었지만, 함께 있어야 할 셋째 누나가 보이지 않는 까닭에 슬픔도 분노도 그 어떤 감정도 없는 채로 다시 헤매 다녀야만 했다.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고, 삼 년이 지났어도 셋째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고, 알 만한 사람은 다 찾아다니며 물어보았지만 최종 행적을 안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어서, 그는 이제 셋째 누나를 찾아다니는 그 자체가 직업처럼 되고 말았다는 얘기였다.

그 사이에 아버지는 울화통을 견디지 못해 날마다 독한 소주만 들이키다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거리에서나 어디에서나 사람만 보면 무조건 달려가서 너 어디 갔다가 지금서야 오는 것이냐고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는 중증치매 상태가 되고 말았다.

그런 얘기를 들은 뒤로 사십 년, 거의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 채로 흘러가 버린 사십 년 세월 동안 나는 5.18 전야제 행사를 다섯 번 정도 찾아가서 그를 만났다. 그는 매년 3월이면 군사용품을 새로 구입해서 한 달 반 동안 집중적으로 공수특전단 지휘관 연습을 하곤 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그랬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그를 잊고 있었다. 세월도 무심하다는 말을 이 경우에 써도 괜찮을까? 아니다. 세월 탓이 아니라 내가 의식적으로 잊고자 해 왔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왜? 괴로우니까.

그런데 그는 그날 나의 어디에서, 나의 어떤 행동거지에서 자신의 셋째 누나를 보았던 것일까. 나는 그때도 지금도 그 점이 매우 궁금하지만, 굳이 물어보고 싶지는 않다. 알 것 같다는 느낌이 있어서가 아니라, 알고 싶지가 않기 때문이다. 궁금해 하면서도 알고 싶지 않은 이유 또한 모른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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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2023-05-18 16:33:31
오늘 43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입니다.
아침부터 내린 비는 지금 오후까지도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