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한 번 들어 주세요
손 한 번 들어 주세요
  • 김일경 기자
  • 승인 2023.05.24 09: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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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경의 삶 난타하기]

[위클리서울=김일경 기자] 내가 운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건 20대 후반 즘이었다. 그 전에는 튼튼한 두 다리와 대중교통이 최고의 이동수단이었고 운전은 남성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다. 차량을 운전하는 일은 기계를 조작하는 일과 같은 맥락으로 여겨져서 나와 같은 기계치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분야라고 치부하였다. 그 때는 여성 운전자의 비율이 높지 않았고 게다가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으며 설령 면허가 있다 하더라도 운전을 할 차량도 없었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 상황에 차량을 소유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였다.

 

ⓒ위클리서울/ 이주리 기자

그런데 언제부턴가 운전이라는 걸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아마도 목적지에 도달하는 시간이 대중교통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짧았고 출발지부터 도착지까지 앉아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에 큰 매력을 느낀 것 같다. 20대 후반의 나는 삶의 피로가 누적되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찌들어 가고 있을 때였다.

20대라는 시기가 그러하지 않은가. 불타는 열정과 넘치는 의욕으로 혈기왕성한 청춘에 걸맞게 눈코 뜰 새 없는 날들을 살았다. 직장생활과 함께 학업을 병행하면서 알바도 했다. 때때로 친구들을 만났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에도 진심을 다했다. 오라는 곳도 많았지만 가야 할 곳도 많았으니 그 모든 걸 버텨 낸 내 몸뚱이가 참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빠듯한 출근 시간에 지하철이 제 때에 오지 않아서 마음을 졸일 때면 운전하는 사람들이 몹시 부러웠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야근을 하고 퇴근길에 나서면 한 걸음 내딛기가 지치고 힘든데 운전하면서 퇴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편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늦은 밤, 한적한 도심의 도로위에서 운전을 하면 그 어떤 피로도 날려버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회식을 한 다음 날, 잔뜩 찌들은 숙취를 털어내며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 할 때에도 운전을 하고 출근을 하는 일은 정말 행복한 삶이라고 상상이 되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이 먼 나라의 일이라 여겼던 운전이라는 것에 관심이 생기면서 뚜벅이의 생활에서 탈피할 수 있다면 새로운 유토피아가 내게로 와 줄 것 같은 희망이 그려졌다.

유토피아로의 입성을 꿈꾸던 때 나는 그 선배를 알게 되었다..

대학 동아리에서 알게 된 선배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자가 운전자였다. 동아리 활동이 있는 날이면 선배는 대부분 자가 운전으로 출석하였다.

어느 날, 동아리 방에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사는 동네도 비슷한 지역이었고 심지어 서로의 근무지도 지척의 거리였다.

신기한 우연에 감탄하면서 선배는 카풀을 제안하였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붐비는 지하철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이며 편하게 앉아서 출퇴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에 이게 웬 떡인가 싶어 냉큼 수락을 했다.

카풀을 하면서 선배의 운전 습관을 눈여겨보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말해서 운전의 정석과도 같았다. 절대로 과속하는 법이 없었고 좌회전이나 우회전을 할 때는 반드시 방향지시등을 작동시켰다. 갑자기 급정거를 해야 할 때는 비상 깜박이를 작동시킴으로써 뒤따르는 차량이 위험을 감지할 수 있도록 알려주었다. 그것은 운전자들만의 소통 방식이라고 했다.

심지어 라디오나 음악의 볼륨도 높이지 않고 항상 적절한 데시벨을 유지했다. 카풀을 하는 동안 조수석의 안락함에 빠져버린 나는 운전자에 대한 배려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창문을 내린 채 음악을 크게 듣는 것을 즐기고 싶어 했는데 선배는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엔진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도 나는 운전을 하면서 음악을 크게 듣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엔진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선배가 떠오른다. 간혹 오픈카에서 도로가 들썩일 정도로 비트를 뿜어대며 지나가는 운전자를 보면 그것이 모두에게 민폐라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위클리서울/ 김일경
ⓒ위클리서울/ 김일경
ⓒ위클리서울/ 김일경

병목구간에서 끼어들기를 할 때에도 운전면허 학원에서 가르치지 않는 방법을 선배에게서 배웠다. 일단 방향 지시등을 켠 다음 창문을 내린다. 왼 손을 창문 밖으로 내밀어서 끼어들 것에 대한 양해를 구하였다. 가끔은 고개도 함께 내밀어 뒷차를 향해 겸연쩍은 웃음을 짓기도 했다. 끼어든 다음엔 백미러를 행해 오른 손을 치켜들었다. 끼어들기를 허락해 준 뒷 차 운전자에게 고마움을 전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손을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선배의 행동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나도 끼어들기를 할 때는 손을 내밀거나 머리를 디밀고 상냥한 웃음을 지어서 허락을 구하곤 한다. 가끔이긴 하지만 손을 내밀어서 내게 끼어들기 양해를 구하는 운전자를 만난 적도 있다.

기분 좋게 양보를 해 주었는데 끼어든 차량이 비상등을 두어 번 깜박여서 고마움까지 표현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마냥 안락하고 편할 것 같았던 선배와의 카풀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웬 남자와 출퇴근을 함께 한다는 광경을 종종 자주 목격한 회사 동료들은 애인이냐는 둥 사귀냐는 둥 소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동아리 활동을 갈 때도 늘 같이 출석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선배와 사귀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편하게 출퇴근을 해보려 했던 처음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주변의 분위기 탓에 선배와의 카풀은 조기 종영 되었지만 운전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아주 실감나게 경험한 시기였다. 그리고 뚜벅이의 생활을 벗어났다고 해서 유토피아는 오지 않았다. 도로의 교통 정체는 극심했고 오히려 제 시간에 도착하는 대중교통이 시간을 훨씬 더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면허를 취득하고 운전을 한 지가 어언20년이 넘었다. 나의 운전 습관은 함께 카풀을 했던 선배에게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면허학원에서 배우지 못했던 운전매너도 선배의 운전 모습을 보고 느낀 것들이다. 끼어들기와 같은 난감한 상황에서 양보와 배려를 주고받으면 참 좋으련만 요즘의 운전 환경은 대체적으로 목숨을 위협하는 수준인 것 같다.

손을 들어서 양해를 구하기는커녕 도로가 무법처지인 양 깜박이도 켜지 않은 채 끼어들겠다고 무리하게 다가오거나 주행 중 일명 칼치기 기법으로 갑자기 끼어드는 운전자들을 만나면 입에서 쌍욕이 나올 때도 있다.

간선도로에 진입하기 위해 끝차선에서 길게 줄을 선 차량들을 가볍게 무시하고 원활하게 뚫려 있는 옆차선을 달려 진출로 직전에 끼어드는 차량에게 양보를 하는 건 몹시 억울하다.

양보는 당연하다는 듯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양해를 먼저 구하는 것이 순서이고, 양보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양보를 할 당사자가 결정할 문제다.

물론 교통의 원활한 흐름과 우리 모두의 소중한 생명을 위해서 서로 양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당연함을 노리고 무례하게 양보를 요구하는 일은 옳지 않다.

오늘도 나는 깜박이 없이 끼어드는 차량을 만났다. 손 한 번만 들어서 양해를 구한다면 내 앞자리를 어렵지 않게 내어 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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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ru 2023-05-27 16:17:32
선배님이 선비님이셨네요. 참 희안한게, 도로 위에서는 사소한 비매너도 굉장히 화가 나고, 사소한 고마움의 표시도 굉장히 훈훈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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