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구시포 앞 가막도
구시포 앞 가막도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위클리서울=김수복 기자] 마음이 착 가라앉을 때면 습관적으로 찾아가는 곳이 내게 생겨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가면서도 간다는 생각이 없이, 아무런 의식이 없이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갔다가 돌아오곤 했던 까닭에 그런 습관이 내게 생겨 있었다는 것을 미처 알 수가 없었다는 것도 최근에 알았다.

거기 어디에 누가 있어서 나를 반겨주는 것은 아니다. 묘비나 무덤이 있어서 내 감정을 고양시켜주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딱 한 차례 만났을 뿐인 그 남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그때와는 지형이 크게 변한 까닭에 그와 만났던 장소를 특정할 수도 없고, 다만 위치를 대강 짐작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나는 간다. 뭔가에 홀린 듯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차를 몰고 달려간다. 달려가서 그와 어울렸던 곳으로 추정되는 방파제 위에 우두커니 서 있노라면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얼굴이 떠올라 오면서 무덤 속처럼 어둡게 가라앉은 내 마음이 생기를 찾는다.

아 참. 기묘한 것이로구나 인생이라는 것은.

돌아보면 그렇다. 이메일을 몇 차례 교환했고, 전화통화를 몇 번 했을 뿐인 남자였다. 언제 한 번 만나자, 만나자, 하면서도 못 만나고 세월만 보내다가 드디어 만났다. 구시포항 맞은편 가막도에 지금 와 있다고,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해서 갔다.

 

구시포 가막도 연결교량
구시포 가막도 연결교량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가을날이었다. 해가 떨어지면서 토해내는 노을이 기막힌 서정을 자아내게 하는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자정 즈음까지 여섯 시간 남짓을 함께 했다. 후반부 두 시간 정도는 그가 술이 취해서 꾸벅꾸벅 졸다가 기어이 드러누워 버렸으니 네 시 간 남짓이라고 해야 할까?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조차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의 그 짧은, 그 아쉬운 시간을 내 가슴에 새겨놓은 채로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는가.

빨래를 쥐어짜듯이 기억을 짜내보면 고향을 지키고 있는 형님 이야기 잠깐, 로스쿨과 연계된 조카 이야기 잠깐, 정규교육 과정에 싫증을 내기 시작한 딸내미 이야기 잠깐, 그리고 또 무엇이더라. 하여튼 그랬다. 어떤 소재이든 한두 마디 이상을 넘기지는 못했다. 그럴 만한 시간이 약속돼 있지도 않았다. 흡사 말을 타고 달리면서 바람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한 만남이었다.

아쉬움이 무더기로 남았다. 공유해 온 역사가 제법 있었다면, 주고받은 대화가 많았다면 아마 그렇게까지 큰 아쉬움의 덩어리가 나를 압도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린다고, 바람이 심하면 바람이 심하다는 이유로 나는 그곳을 찾아갔고, 점차 희미해서 가는 그의 얼굴을, 그 미소를, 그 목소리를 끄집어내서 마치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보듯이 고개를 푹 수그린 채로 헤매었던 것 같은데 글쎄, 언제부터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짓을 해 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런 인사불성의 시간에 자주 빠져들어 왔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해준 것은 찔레꽃이었다. 금년에는 아마 내 가슴에 청승까지 생겨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물주머니라고나 해석이 가능한 이 청승이 발동할 동기를 만들어준 것 또한 찔레꽃이었다.

 

장호리의 찔레꽃
장호리의 찔레꽃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자기가 태어난 곳이라고 그가 말했던 상하면 장호리 인근을 지나고 있을 때 아카시아 꽃 향기가 마치 사방에 꿀이라도 뿌려놓은 것처럼 강하게 공격적으로 콧속을 파고들었다. 아카시아 꽃 자체가 내 관심을 끈 것은 아니었다. 매우 거칠게 공격적으로 하늘을 가리며 쭉쭉 뻗어나간 아카시아 나무 아래로 주눅이 든 아이처럼 초라하게, 아니 소담하게 피어나 있는 찔레꽃 몇 송이를 발견한 순간 나는 즉각 차를 세우고 달려가서 쪼그려 앉았다. 장사익의 노래 ‘찔레꽃 향기는 너무 슬퍼요’가 절로 떠올라 오는, 그 단아하게 애처로운 찔레꽃 앞에서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형님, 거그서 뭇하요?”

이게 뭔 소리냐.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살아서 돌아온 줄 알았다. 벌떡 일어선 나를 마치 간첩이라도 보듯이 요모조모 살피고 있는 사나이는, 어처구니없게도 그는 노름꾼으로 소문나 있는 후배 녀석이었다. 그 녀석이 피식, 웃는 표정으로 얼래리꼴레리 하고 놀리는 투의 소리를 했다.

“얼랠래 울고 있었네, 울고 있었어요 잉?”

이런 빌어먹을, 뭐냐 이거. 왜 하필 여기서 이 녀석이 나를 발견한 거야? 지독한 모욕감이 나를 덮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노름꾼 녀석은 남의 돈 떼먹기로도 명성이 자자한 녀석이었다. 나도 한 차례 당한 바 있었다. 수법이 어찌나 교묘하게 파렴치한지 당하면서도 당한 줄을 모르고 한참 뒤에나 알았다. 알았다고 해서 녀석의 뻔뻔함을 제압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사기꾼 세상이 되고 보니 사기꾼 따위가 나를 감히 조롱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구나 싶어 분통이 터질 지경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찔레꽃 앞에서 울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왜 울었지?

그러고 보니 장호리였다. 장호리에 아카시아 나무가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찔레꽃도 엄청 많이 핀다는 건 그날 처음 알았다. 예전에 나는 사실 장호리라는 마을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지금은 아는 정도가 아니라 손금이라도 들여다보는 듯이 환하다. 한 번 가고, 두 번 가고, 세 번 네 번 자꾸 갔으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다.

 

가막도의 서해안지질공원
가막도의 서해안지질공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장호리를 간다는 생각을 하면서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끔은 차를 세우고 내려서 단 한 명도 아는 사람이 없는 마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등의 정신 나간 짓을 꽤 오랫동안 해 왔다. 구시포 앞의 가막도를 가자면 빠른 길도 얼마든지 있건만 굳이 그 마을 앞으로 돌아서 가곤 했으니 이건 뭐랄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존재가 돼버린 그가 이 세상 사람인 나를 불렀다고 봐야 하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구시포 앞에 외로운 섬 가막도는 사실 내 어린 시절의 이상향이었다. 가보고 싶지만 갈 수가 없기에 안타까운 곳이었다. 모래밭에 앉아서 보면 금방 달려갈 수도 있을 것 같건만 물이 너무 깊어서 갈 수가 없으니 애가 타고 심지어는 억울하기조차 했다. 밀물과 썰물 등 지구의 운행원리에 대한 이해가 아직은 없는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기는 했지만, 어땠든 꼬맹이 시절의 내게 가막도는 눈앞에 두고도 가볼 수 없는 그리움과 원망의 대상이었다.

가보고 싶은 이유는 딱 하나 보물이 무진장으로 깔려 있다는 어른들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어른들이 가끔 주고받는 얘기에 따르면 일 년에 한 차례 물이 완전히 싹 빠지는 날이 있는데 그날 들어가면 엄청나게 큰 백합을 잡을 수 있고, 전복을 잡아낼 수도 있으며, 바위마다에 소라가 붙어 있는가 하면 돌멩이를 살짝 건들기만 해도 커다란 꽃게가 불불불 기어 나오고, 질퍽질퍽 빠지는 펄 속에 손을 넣으면 낙지가 저절로 잡힌다는 거였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 있다는 그날이 언제인지는 어른들 자신도 모르는 눈치였다.

 

용암이 식은 뒤의 포획암
용암이 식은 뒤의 포획암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내가 어른이 되면 반드시 그날을 알아내서 달려가리라, 다짐도 했던 것 같지만 글쎄, 머리통이 굵어지면서 다짐은 점차 희미해져 갔고, 마침내는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이다. 잊고 있었던 가막도를 다시 떠올린 것은 내 나이 중년에 접어든 지도 한참이나 지나서였다.

삼십 년? 사십 년? 하여튼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찾아간 구시포는 내 어린 시절의 구시포가 아니었고, 가막도 또한 그 시절의 그 외로운 섬이 아니었다. 가막도와 구시포를 직선으로 연결하는 다리가 이미 건설돼 있었고, 가막도의 면적을 넓히는 매립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어선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항구를 새로 짓기 위함이었다. 간만의 차이가 심한 바닷가에 변변한 항구가 없어서 그동안 많은 고초를 겪어온 어부들의 숙원사업이라고 했다. 썰물과 밀물의 구분이 너무나 명확해서 깜빡 시간을 놓치면 배를 띄울 수도 없고, 멀리 나갔던 배가 들어올 수도 없는 현실이 고려된 사업이었다. 숙원사업이긴 했지만 인구가 적어서 경제성 또한 없다는 이유로 예산이 찔끔, 찔끔, 그야말로 쥐꼬리만큼씩만 책정되는 탓으로 완공되기까지 이십 년 세월이 걸렸다.

공사를 하는 중에 보물이 발견되었다. 도시에서나 어디에서나 대형 공사를 벌이면 가끔 발견되는 세월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차원이 달랐다. 사람의 손을 거친 것이 아니어서 돈으로 환산하기도 어려울 정도의 큰 보물이었다. 사람이란 존재가 아직 지구상에 존재하기도 전, 여기서 저기서 사방에서 땅이 흔들리고 펄펄 끓는 용암이 샘물처럼 솟아나던 시절의 흔적이었다.

연락을 받고 달려온 지질학자들은 이 흔적의 나이를 최소 십억 년에서 이십억 년으로 감정했다. 그리고는 부안군의 채석강과 적벽강을 함께 묶어서 서해안 지질공원이라 이름을 붙였다. 부안의 채석강이나 적벽강은 규모가 제법 있어서 공원이란 명칭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지만, 고창의 가막도는 글쎄 뭐랄까, 그 면적이 우리 집 마당 정도밖에 안 돼서 살짝 머쓱해지면서 귀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규모가 초라해서 선뜻 눈에 띄지는 않지만 아무 데서나 볼 수 없는 보물이라 보는 맛이 깊었다. 색깔이 다른 돌이 마치 황금 속에 꽂아놓은 루비나 사파이어처럼 일체를 이루고 있으니 일단 보고 나면 또 보게 된다. 돌 속에 다른 성질의 돌이 박혀 있는 이런 현상을 지질학자들은 포획암이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익살스럽게 해석한다. 사냥꾼이 함정을 파서 동물을 잡듯이, 용암이란 이름의 펄펄 끓는 함정 속으로 바위가 굴러 떨어졌다기보다 사로잡혀서 한 몸이 됐다는 것이다.

 

이십억 년 전에
이십억 년 전에 ⓒ위클리서울/ 김수복 기자

펄펄 끓는 용암 속으로 굴러 떨어진 바위덩어리는 아마도 약간의 생명체를 끌어안고 있었을 것이다. 바위들 사이에서 어렵게 생존을 도모하던 작은 나무와 풀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 사이 어딘가를 집으로 알고 살아가던 개미나 거미 등 작은 곤충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 작은 생명들은 자신을 보호해주던 바위덩어리가 갑자기 흔들리면서 불구덩이 속으로 굴러 떨어질 때 자기가 죽는다는 의식이 있었을까?

보면 볼수록 경이롭다. 수십만 미터 저 아래 마그마 층을 뚫고 액체 불덩어리가 지상으로 맹렬히 솟구쳐 오르고 있을 때 바위덩이들이 충격으로 흔들리다가 첨벙, 첨벙 빠진다. 대부분의 바위들은 강력한 열에 녹아서 용암과 한 몸이 되지만 일부는 외부 공기에 노출된 용암이 급격하게 식어버린 탓으로 녹지를 못하고 사로잡힌 형태로 굳어져 간다.

이십억 뒤의 지질학자들은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바위에 포획암이란 이름을 붙였고, 나는 그 바위를 본다. 보고 또 보고 있노라면 온갖 생각이, 온갖 상상이 끝도 없이 일어나면서 내가, 나라는 존재 자체가 매우 이상하게 여겨진다.

나는 내가 맞는가? 혹시 다른 누구와 섞여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가끔은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그 사람의 생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날의 그가 나를 사로잡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사로잡았다기보다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평소에는 가만히 있다가 어떤 날, 어떤 시간, 어떤 환경이 만들어지면 갑시다, 우리 집으로 갑시다, 하면서 나를 자기의 고향으로, 가막도로 인도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쩌면 그렇게도 자주 정신없이 그곳을 찾을 수가 있으랴.

그나저나 이런 생각, 이런 상상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는 제정신인가? 제정신이거나 말거나 내 몸이 살아서 움직일 수 있는 한 나는 아마 시도 때도 없이 가막도를 찾을 것 같다는, 그런 예감이 든다. 왜? 너무도 강렬한 추억이 새겨진 곳이니까.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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