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서울=정민기 기자]

당신에게 폐허의 의미는
진과 나는 숙소에 조용히 쿠타이시의 밤을 보내고 있었다. 별다른 소리도 나지 않는 조용한 밤이었는데, 진은 무엇을 찾아보았는지 내게 폐허에 대해 말했다. 쿠타이시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버려진 폐허가 있다고, 한번 가보지 않겠냐고 진이 이야기했을 때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내일 가보자고 말했다.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별 다른 할 일이 없는 쿠타이시에서 조용한 일상을 하루 더 보내도 나쁠 것 없을 것 같았지만,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폐허라는 말이 마음이 동했다. 소련 시대에 유명한 요양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방문하지 않는다는 인구 만 명쯤의 작은 마을. 가봐도 좋을 것 같았다.

폐허라는 단어에 섞여 있는 어떤 거대하고, 비극적이며 동시에 낭만적이기도 한 느낌을 나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앙상하게 골조만 남은 건물, 그 사이 마구잡이로 돋아난 풀들, 그렇게 이어지는 버려진 건물들. 버려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갖게 되는 어떤 슬픈 웅장함. 버려진 한 채의 건물은 흉물스럽지만 버려진 도시는 왜 또다른 느낌을 갖게 만드는지, 텅 빈 건물들의 도시를 상상했다. 일종의 담력 체험으로, 모험심을 불러 일으키는 흥밋거리로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평소에 갈 일이 없는 곳에, 별다른 정보도 없는 곳을 헤쳐 나가는 모험은 지금도 내게 흥미롭다.
다만 나는 폐허에 가기 전부터 내가 왜 폐허에 끌리는지 계속 생각해야만 했다. 여행 중에 몇 번, 폐허를 지났을 때마다 나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기원전의 도시였던 에페스나 중세의 도시였던 아니까지, 그런 곳을 걸을 때마다 사람의 기운을 느꼈다. 너무나 긴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의 그림자가 무수하게 겹쳐져서, 이미 사람은 다 떠나고 없는데도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나는 폐허 혹은 유적에서 느꼈다. 한 사람이 아니라, 너무 많은 사람이 겹쳐 서 있는 그림자 사이로 걷는 기분이었다.


상식 속에서 시간은 오로지 현재만을 반복하며 지나간다는데, 이미 한참은 지나갔을 과거의 시간이 공간 속에 층층이 쌓이는 느낌. 갑자기 흔히 알던 시간과 공간의 바깥으로 던져져, 마치 시공간의 실상을 보는 듯한 감각이었다. 어쩌면 여행자 특유의 감상이었겠으나, 내게는 흥밋거리 이상의 흥미로움이 폐허에 있었던 것 같다.그러나 나는 폐허를 오로지 폐허라는 이름 속에서 보았을 뿐, 또 이미 한참 지난 시간 속에서만 보았을 뿐, 거기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는 것을 츠할투보에 도착하고나서 점차 깨달았다.
진과 처음 츠할투보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당황했다. 생각보다 너무 번듯했기 때문이다. 츠할투보는 그냥 평범한 소도시였을 뿐 우리가 생각했던 ‘버려진 도시’는 아니었다. 충분히 찾아보고 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츠할투보는 조금 혹은 많이 낡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그대로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도시처럼만 보였다. 폐허는 어디에 있지?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진과 나는 당혹을 느끼며 우선 앞으로 걸어보기로 했고, 그래서 버려진 폐건물들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구글맵에 의지해서 가는 폐허.

네 마리의 개들
유명한 폐건물이 있는 모양이었다. 검색으로 찾아보니 버려진 요양원이 있다고 했다. 이쪽 지방에는 미네랄 워터도 유명했지만 무엇보다 ‘라돈 목욕’이 유명했다고 한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방사선 물질인 라돈 가스로 목욕을 하는 방법인 것 같은데, 어느 유튜버가 체험하는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라돈탕 덕분인지 소련 시대의 사람들은 츠할투보로 몰려 들었고,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요양원은 사람들로 북적였던 모양이다. 겨우 겨우 찾아간 요양원은 꽤나 거대했다. 그러나 폐건물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서, 가까이에서 보자마자 이곳이 우리가 찾았던 ‘전형적인’ 폐허임을 알 수 있었다.

깨진 유리창, 얼기설기 돋아난 풀들, 젊은 애들이 들어와서 칠해 놓았을 낙서, 떠돌이 개들이 지나는 폐허의 곳곳을 돌아보았다. 밤에 왔으면 꽤 무서웠을 것 같은데? 진과 이야기하며 소련 시대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은 요양원을 걸었다. 수 십 년 전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질 듯했으나 이렇게 막 버려진 것 같은 폐허는 또 처음이라, 오히려 생경했다. 지난 역사가 아직 완전히 지워지지 못하고 잠시 유예되어 있는 것 같았다. 사라짐, 없음, 버려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요양원은 별달리 무너진 곳 없이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때 사용되었던 물건들이나 가구들도 곳곳에 있었다. 방 하나 하나를 가득 채웠을 요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마도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을 테니, 그중 누구도 살아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막 사라진 사람들의 흔적이 거기에 있었다.

요양원을 나와 진과 이곳저곳을 둘러 보았다. 요양원 말고도 몇 개의 버려진 건물들이 군데 군데 있었다. 이걸 두고 버려진 도시라고 사람들이 불렀겠구나, 싶어 이리저리 기웃대다가 한 건물에 올라갔다. 10층 정도 되는 전형적인 소련식 콘크리트 아파트였다. 건물은 겉에서나 안에서나 말 그대로 완전히 헤진 것 같았다. 아무렇게나 찢어져 있는 천쪼가리들, 굴러다니는 캔뚜껑들을 보며 여긴 버려진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2층에 올라가자마자 누군가의 티비 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사실 그곳은 누군가가 살아가고 있는 집이었다. 방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우리가 찢어진 천들이라고 생각했던 몇몇 천들은 그들의 빨랫감이었다. 버려진 곳에 누군가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아직 버려진 곳이 아닐 수 있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섣부른 무단침입에 죄송스러워하며 서둘러 건물에서 나왔다. 여행자의 경솔함이 부끄러웠다. 사람 하나 없다는 폐허의 낭만 뒤로는 여전히 일상을 사는 사람들의 생활감이 있었다. 누군가를 구경거리로 넘겨 짚어버리지 않는 여행자가 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다시 생각했다.

밖으론 나와 여느 조지아의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츠할투보의 길거리를 걷는데, 개 한 마리가 따라왔다. 아까 요양원에서 마주친 개 같았다. 눈꼬리가 쳐져서 순하고 슬퍼 보이는 개였다. 마치 우리가 산책 시키는 개인 것 처럼 개는 자꾸 우리를 쫒아 왔고, 따라 오려면 따라 오렴 하는 마음으로 같이 걸었다. 그러다가 개 한 마리가 더 나타났고, 연이어 한 마리가 더, 심지어 한 마리가 더 나타났다. 우리는 무려 개 네 마리와 함께 걸었고, 개들은 우리를 호위하듯 우리 주변을 빙 둘러싸고 나란히 걸었다. 이게 무슨 영문인가 싶었지만 동네 개들과 함께 걸어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나가던 조지아 사람은 우리에게 다가와 너희 개냐고 물었다. 설마 우리 개일까. 누가봐도 여행객 차림인 우리가 네 마리의 개를 데려왔을 리 없을 텐데, 그 사람은 참 넉살도 좋았다. 개 네 마리는 그 정도로 마치 우리의 개인듯 우리를 따랐다. 개와 함께 하는 건 즐겁구나, 작은 분수대에 도착했을 떼 개들은 땡볕 아래 퍼져 누웠다.
쿠타이시로 돌아가는 버스를 탈 때까지 개들은 우리를 따라 왔다.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보며 개들은 가만히 서 있었고, 여전히 츠할투보의 개들은 그곳을 지키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