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화두는 작은 것, 못생긴 것, 느린 것, 낮은 것입니다. 아내는 가끔씩 그런 화두만 가지고 살아가면 뭐하냐고 타박을 하지만 온전히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런 화두를 가지고 살아갈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겠지요.

최근 몇 년 꽃들과 만나면서도 늘 네 가지 화두를 가지고 그들을 만나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한 속내는 예쁜 것을 만나면 좋고, 못생긴 것을 만나면 그냥 심드렁했습니다.

희귀종을 만나면 특종을 잡은 냥 기뻐하고,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꽃을 만나면 마냥 좋았습니다. 지천에 피어난 꽃들, 그 중에서도 꽃처럼 느껴지지 않는 꽃들을 만나면 그냥 의무적으로 그들을 대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안될 것 같았습니다. 꽃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그렇게 자연을 차별적으로 대하면 안될 것 같아 사람들의 눈길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찾아보았습니다.

▲ 좀보리사초
ⓒ2005 김민수
바닷가 갯바위 틈에서 피어난 좀보리사초, 사초과의 꽃들은 "그것도 꽃이야?"하고 반문할 정도로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꽃이고, 꽃이 지고 나면 열매맺는 것을 보면 그들은 오직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벼꽃이 필 무렵에 벼메뚜기가 날기 시작했습니다. 메뚜기를 잡으러 논둑길을 걷다가 한 걸음 한 걸음 논으로 들어가다 보면 "이놈들! 벼꽃 떨어진다! 들어가지 마라!" 호통치시던 어른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옵니다.

참새떼 보다 더 극성인 아이들, 고함소리를 피해 조심조심 벼꽃이 피는 논에 들어갔다 나오면 까만 쫄바지에 노란 벼꽃이 묻어있었습니다. 벼꽃이 떨어진 만큼 벼도 덜 열었을 것입니다.

좀보리사초를 보니 그 옛날에는 구황작물로도 사용했을 것 같습니다. 단단하게 익어 가는 모양새가 정말 보리를 닮았습니다.

`존재의 이유가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때로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무례함으로 인해 생겨난 변이종까지도 인간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것이니 그도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요.

좋은 것은 좋은 대로 나쁜 것은 나쁜 대로, 예쁜 것은 예쁜 대로, 못생긴 것은 못생긴 대로 다 존재의 이유가 있는 것이니 서로 감사하며 살아가야겠죠.

▲ 천일사초
ⓒ2005 김민수
사초과의 꽃들은 꽃 같지도 않은 꽃을 맺으면서도 열매만큼은 단단합니다. 열매, 흔히 우리가 씨앗이라고 부르는 것들입니다. 과일과는 달리 그 자체가 열매이기도 하고 씨앗이기도 한 그들, 그 하나마다 수십 배의 열매들을 맺는 것을 보면 삼십 배 육십 배의 열매를 맺는 비결을 알게 됩니다.

내 삶에 주어진 것들, 그것들을 통해서 나는 과연 얼마나 의미있는 열매들을 맺고 살아가는 것인지 돌아봅니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안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맺고 있는 열매들을 돌아보면 내가 어떤 나무인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 법이니 좋은 나무가 되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어제는 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막내아들에게서 수신자부담전화가 왔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오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전화를 끊고 나서 그렇게 전화통화를 한 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는 것이 많은지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다는 것, 볼 수 있는 눈과 전화버튼을 누를 수 있는 손가락이 있다는 것, 뛰어 놀고 싶을 때 숨차게 뛰어 놀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를 가졌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중 하나라도 평생소원이요, 이루지 못할 소원일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밤에 잠든 아이의 심장소리를 들으며 또 얼마나 행복한지, 행복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에 감사의 물결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내 새끼니까 그렇게 예쁘게 보이는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사람들의 눈에는 못생겼을지라도 그들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열매인지, 예쁜 꽃인지, 그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는 것 같아 그 못생긴 것들이 고마웠습니다.

▲ 꿩의밥
ⓒ2005 김민수
어린시절부터 보아오던 그것의 이름이 `꿩의밥`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재미있는 이름을 가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눈에 익도록 보아왔으면서도 그것의 이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았더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꽃 이름인 제비꽃, 양지꽃, 패랭이꽃, 나팔꽃, 민들레처럼 익숙한 이름으로 간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그저 못생긴 것들 중의 하나로 지나친 것이겠지요.

이른 봄 양지꽃과 함께 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래, 겨우내 배고픈 꿩들의 밥으로 넌 피어난 것이구나!`했습니다. 꿩이 정말로 먹든지 아니든지 그것은 관계없습니다. 이른 봄 양지에서 피어나 새들의 먹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 실재로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들의 모양에서 `꿩의밥`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들의 눈썰미가 재미있습니다. 이름이 더 예쁜 것 같은 존재입니다.

▲ 새섬매자기
ⓒ2005 김민수
모내기를 포기한 논에 지천으로 피어난 `새섬매자기`라는 생소한 이름의 잡초(?)입니다. 어쩌면 잡초라는 것도 사람들의 관점에서 나눠놓은 것이겠지요. 저는 굳이 야생초라는 근엄한(?) 이름을 붙여주지 않으렵니다. 그냥 잡초라고 부르겠습니다.

`잡것들`이라는 말을 사람들에게 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잡`이란 `쓸모 없는`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겠지요. 그런데 그 잡것들이라 불리는 그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이듯이, 잡초라고 불리는 그 풀도 역시 여느 풀과 같은 풀입니다. 사람이 사람이듯이 말입니다.

▲ 새섬매자기
ⓒ2005 김민수
오늘은 관심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던 것들을 관심의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 보았습니다.

역시, 그 무관심의 영역에 있는 것들을 껴안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 할 것만 같습니다. 정말 자연을 사랑한다면 인간에게 잡초라고 밀려 있는 것들도 껴안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사람을 사랑한다면 잡것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껴안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세상에 잡것, 잡초는 하나도 없습니다.모두 예쁜 구석들이 있습니다. 그 예쁜 구석들이 많이 살아나고,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