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서울뒤집기-출근길 한시간동안 만나는 세상


#안개낀 청량리 역전이에요. 아침부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보이네요. 옆에는 MT를 떠나는 대학생들 같아요.


현관문을 열고 나서니 눈앞이 뿌옇습니다. 왜 일까?? 잠깐 혼란스러워야 했죠. 공기 좋은 산골이라면 그런 혼란이 필요 없겠지만 기자가 사는 곳은 서울 한복판이거든요. 사시사철 서울 하늘을 뒤덮고 있는 오염? 봄에 찾아오는 황사? 밖으로 나와 십여 발자국을 떼고 나서야 실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안개였죠.

거리는 벌써 낙엽이 뒹굽니다. 환경미화원 아저씨들이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들에게 단풍이라든지, 낙엽은 결코 반가운 손님이 아니죠. 할 일만 많아지는 셈이니까요. 어쨌든 울긋불긋 색깔이 바래고 있는 가로수와 안개의 만남은 서울에서 자주 느낄 수 없는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내더군요. 어느 유럽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물론 그 길을 걷고 있는 기자는 영화의 주인공인 셈이지요. 기자의 쉼터가 있는 휘경동에서 청량리 역전까지는 걸어서 대략 30분 남짓 걸리지요. 청량리 역전에 도착했을 때였어요. 단풍 때문이었는지, 안개 때문이었는지, 유럽 영화 때문이었는지 갑자기 역전 광장을 한바퀴 둘러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마음 한 켠에는 춘천행과 정동진행 기차가 자리하고 있었고, 떠나고 싶다는 `망상`도 물론 있었겠지요. 왜냐구요?? 가을이잖아요. 안개도 그렇구요.


#아침부터 막걸리를 마시는 이 분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아세요??


혹 내 `망상`을 대신 실현해줄 이들은 없을까, 이리저리 두리번거린 게 한 일의 전부이지만요. 평일 아침의 청량리 역전 광장은 한가했어요. 떠나는 많은 이들이 항상 약속장소로 이용했던 아주 오래된 시계탑. 안개에 둘러싸인 모습이 아주 그럴싸하더라구요. MT를 떠나는 것인지 젊은 대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뒤늦게 오는 일행들을 기다리는 모습도 보였구요.
그리고 시계탑 아래서 또다른 그들을 보았어요. 몇몇의 어른들이었죠. 잔뜩 때묻은 옷, 헝클어진 머리…. 그들의 앞에 놓여있는 낯익은 물체들. 막걸리 병이었죠. 이미 몇 병은 다 마신 듯 아스팔트 바닥에 뒹굴고 있었구요. 글쎄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요.


위기의 한국남자들? 위기의 서민들? 노숙인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책?


전부 아니에요.

전날 저녁 지인과 만나 밤늦도록 퍼부어 댄 막걸리가 떠올랐지요. 갑자기 속에서 뭔가 불손한 게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침부터 술자리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하루종일 얼만큼의 양을 마시는 것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구요. 아마도 술이 덜 깬 탓이었을 거에요.


롯데백화점을 지나면 바로 옆에 이른바 청량리588이라 불리우는 그 유명한 윤락가가 있어요. 이른 아침 그곳을 걸어서 지나는데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해요. 특히 기자처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우엔 더욱 그렇죠. 용기를 내봤어요. 지난번에 그랬던 것 처럼요.   조용한 거리. 밤마다 `그녀`들이 꽃단장을 하고 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유혹했을 투명 유리문 안의 `전시관 같은` 가게는 대부분 텅 빈 채였죠.


#아침 출근 시간의 이른바 청량리 588 골목이에요. 왠만한 용기를 내지 않고선 이 길을 지나기 힘들죠.

그런데 지난번에 그랬듯 이번에도 몇몇 가게에선 그녀들을 볼 수 있었어요. 아직 채 화장을 지우지 않은 채, 호기심 어린 눈빛을 번득거리며 윤락가 한 복판을 지나는 기자에게 쾡한 시선을 던지면서요. 그래도 꽤 오랜기간 기자질을 해 온 기자는 어떤 게 의욕을 잃은 눈빛인지 잠깐만으로도 알 수 있어요. 그녀들의 눈빛이 바로 그랬지요.


문득 며칠전 제주에서 자살했다는 한 성매매 여성이 떠올랐어요. 30여년째 중풍에 걸려 병원신세를 지고 있는 아버지를 위해 몸까지 팔아 병원비를 마련해야 했던 그녀. 세상을 떠나던 날 어머니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엄마, 나 살기 싫어, 죽으면 고향에 묻어줘!"라며 눈물 흘렸던 그녀. 비록 성매매를 하며 생활했지만 한 가정의 소중한 딸이었고, 예쁜 동생이었으며, 자상한 누나였어요. 그녀의 꿈은 `좋은 남자 만나 결혼해 아이 낳고 평범한 가정을 일구는 것`이었어요.


#윤락가에서 길 하나를 건너면 바로 만나는 청량리 수산물 시장의 모습이에요.


그 꿈은 그녀의 보금자리였던 3평 남짓한 여인숙의 초라한 방안에 나뒹굴던 농약병들과 함께 그렇게 스러져버렸지요.
텅빈 윤락가 골목을 걷는 기자의 발에 안개가 걷어 채였어요. 유리 전시관 같은 가게 안의 그녀들을 보는 기자의 눈에 안개가 끼였어요. 마음에도요. 음울한 출근길이었어요. 정명은 기자 sljung99@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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