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출근길 한시간 동안의 서울 뒤집어보기

날씨가 덥습니다. 땀이 흐릅니다. 쉼터에서 일터까지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이지만 불과 며칠 전과 또 다릅니다. 바람이 불긴 합니다. 하지만 이마에, 등에 흐르는 땀을 식혀주기엔 역부족입니다. 그래도 걷습니다. 코끝이 매캐합니다. 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매연 때문입니다. 짜증도 날 법 합니다. 그래도 복잡한 전철을 타는 것 보단 낫습니다. 한 번 막히면 움직일 줄 모르는 버스를 타는 것 보다 낫습니다. 그래서 걷습니다.

경동시장 상인들은 여전합니다. 더운 날씨는 그들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요즘은 햇마늘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길바닥 여기저기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습니다. 반접, 그러니까 50개에 보통 5000원씩 합니다. 한접에는 1만원씩 하는 셈이지요. 사다가 식초에 절여놓으면 가족들 건강에 좋은 음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경동시장 사거리는 제기동 사거리라고도 부릅니다. 경동시장 맞은 편 쪽에 최근 거대한 건물 두 동이 들어섰습니다. 경동시장과 경동한약시장에 일터를 두고 있는 영세한 상인들에게 이 두 동의 건물은 괴물입니다. 언제든 자신들을 삼켜버릴 수도 있는…. 대기업체에서 지은 건물들입니다. 최근 완공되었습니다. 이름을 밝히진 않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게 아닙니다. 그 새로 들어선 거대한 건물 앞에 며칠 전부터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이색 구경거리(?)가 등장했습니다. 붉은 악마를 상징하는 빨간색 두건에 빨간색 월드컵 티셔츠를 입은 한 어르신입니다.



출근길, 두차례 그 어르신을 봤습니다. 처음 봤을 때 어르신은 귀에 이어폰을 꽂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건물 앞 공터를 이리저리 돌아다니시면서 훌라후프를 하고 계셨습니다. 눈길을 사로 잡은 건 단지 훌라후프만은 아닙니다. 훌라후프가 네 개였다는 것도 특이했고, 바로 앞에 놓여져 있는 사진 한 장도 눈길을 끄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은 어르신이 성화를 들고 뛰는 모습이었는데 설명에는 `88 세계 서울올림픽 성화봉송주자 김홍택`이라고 씌여 있습니다. 사진의 얼굴을 확인해 보니 그 어르신이 틀림없습니다. 어르신은 목에 하나의 훌라후프를, 허리에 세 개의 훌라후프를 돌리고 계셨습니다. 아주 능수능란하십니다.

처음엔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저 특이하다는 생각 정도였죠.

다음날 다시 그 자리를 지났습니다. 바로 곁에서는 전국노점상연합에서 `빈민추방` 결의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르신이 또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날씨는 흐렸습니다. 비가 한두방울씩 흩뿌렸습니다. 어르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날과 같은 모습으로 훌라후프를 돌리고 계셨습니다. 전날과 달라진 모습이 있다면 음악이 밖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날엔 이어폰을 꽂고 계셨거든요.

사진을 찍었습니다. 방해를 하기는 싫어서 간단하게 전화번호만 받았습니다. "오후 5시 넘어서 전화해야 받을 수 있을 거에요." 어르신 당부합니다. 낮에는 계속 여기저기 다니면서 훌라후프를 돌려야 한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저녁 무렵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어르신에 대해서 알게 됐습니다.

어르신은 놀랍게도 올해 84세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전혀 그렇게 돼 보이지 않으셨거든요. 의정부시가 댁입니다. 젊었을 때는 농사 짓는 게 주업이었다는 군요.

-왜 그 건물 앞에서 훌라후프를 돌리고 계시는 거죠?
▲그냥…이전엔 도봉산 약수터에서 늘상 했었거든, 그런데 요즘은 서울 시내 이곳저곳 공간이 있는데서 많이 하지.
-혹 건물주 측에서 고용하신건 아니구요?
▲아니에요. 건물이 들어선 뒤 지나가다 보니까 앞에 넓은 공터가 있더라구.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건데 나중엔 (건물주측에서) 월드컵 옷도 내주코더 전기선도 연결시켜 주더라고.

어르신이 훌라후프를 시작한 건 10여년 전. 그 전까진 마라톤을 했었다고 합니다. 88서울올림픽 성화봉송주자로 뽑힌 것도 다 그런 인연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그 때 경주에서 세계노장마라톤대회가 열렸는데 2위를 차지하기도 했을 정도랍니다.

-훌라후프하면 뭐가 좋아요?
▲건강에 좋지…이만한 운동이 없어요. 이전엔 시청뒤 무교광장에서 했었는데, 지금도 일주일에 몇 번씩은 거기서 하지요. 여러 사람들이 봐주는게 기분이 좋아서….
-음악을 틀어놓고 하시던데.
▲음악이 없으면 못해. 한번 시작하면 3-4시간 동안 계속하거든…. 음악이 떨어질 때까지.

어르신은 음악의 리듬에 맞춰 훌라후프를 돌립니다. 엄밀히 얘기하면 훌라후프를 연주하시는 셈이죠. 주로 사용하는 음악은 세계적 바이올리니스트 바네사 메이, 김덕수 사물놀이 연주곡, 경기민요 중요무형문화재 안소라, 트로트 가수 장윤정의 노래들입니다.

어르신은 여태까지 병원을 단 한번도 가 본적이 없다고 하시네요. 그럴 만도 합니다. 아들 하나에 딸 둘을 두고 있는데 간혹 아버지의 건강이 염려돼서 보약을 사주겠다고 하지만 그때마다 완강하게 거절하신 답니다. 필요성을 전혀 못느끼시는 거지요.

"기자 양반도 한 번 해봐. 소화에도 좋고 진짜 늙어가는 걸 모를 정도라니까."
참 많은 생각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만남이었습니다. 정명은 기자 jung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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