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정명은 기자의 북한산 샅샅이 훑기-백련사→대동문→소귀천 화재현장→할렐루야 기도원

난리다. 세상이 뒤집힐 것 같다. 시청앞 서울광장은 대낮부터 분주하다. 커다란 무대가 설치되고, 수천 개는 족히 될 듯한 조명등… 조그마한 풍선 수천개를 모아 만든 태극기 애드벌룬이 떠오르려 하고 있다. 광화문도 마찬가지다. 집채 만한 크기의 태극전사들 모형이 줄을 지어 서 있다. 인근의 높다란 기업체 사옥 벽에는 태극전사들의 선전을 기원하는 대형 플래카드가 경쟁적으로 걸려 있다. 길을 지나는 행인들은 붉다. 눈이 시릴 정도로 붉다. 지난 13일 토고와의 일전이 있던 날 서울 중심사의 풍광이다. 그리고 이겼다. 그것도 역전승이다. 시작부터 예견된 승리였다면 덜 짜릿했을 것이다. 감동이 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역전했다. 전국민적 응원의 힘이 큰 뒷받침이 됐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꼭 강조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바로 기자의 노력이다. 이날 기자는 산에 올랐다. 물론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다. 평일날 산에 오르는 건 쉽지 않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른 건 또 하나의 이유가 있어서다. 바로 이날 밤 치러질 토고전 승리를 기원하고자 함이었다. 그 산에서 기도했다.

"억겁의 세월, 대한 겨레를 지켜오신 장하신 북한산이시여…오늘 밤 승리를 거두게 해주소서…."   

물론 많은 이들의 피눈물 나는 응원이 있었지만 단언한다. 기자의 노력, 큰 몫을 한게 틀림없다.

사무실에서 출발한 시간이 오후 3시. 우이동행 버스를 탔다. 수유리 4.19국립묘지 앞에서 내렸다. 3시 45분. 산을 오르기엔 늦은 시간이다. 그래도 올라야 한다…. 4.19 기념탑을 지나 걸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진달래능선→대동문→소귀천→할렐루야 기도원이다. 긴 코스를 잡을 수가 없다. 시간 때문이다. 그리고 꼭 들러서 확인해야 할 것도 있다. 잠깐 독자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때 기사 한 토막을 게재해 본다.

『서울 도봉경찰서는 지난 4월 28일 발생한 북한산 방화 사건의 용의자로 강모(39)씨를 체포했다. 경찰에 따르면 강씨는 이날 오후 8시40분쯤부터 1시간 동안 북한산 등산로를 따라 22차례에 걸쳐 불을 질러 잡목 등 임야 7600여평을 태운 혐의를 받고 있다. 강씨는 북한산 국립공원 소귀천매표소에서 대동문을 지나 정릉매표소까지 이동하면서 평균 70∼80m 간격마다 한 번씩 낙엽과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질렀다고 경찰은 밝혔다.
지난 5월 9일 도봉구 창동 해병전우회 건물 등 4곳에 방화한 혐의로 구속된 강씨는 당초 북한산 산불 발생 당시 “강북구 미아동 모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며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다 경찰의 추궁에 결국 북한산 방화를 시인했다.
경찰은 강씨가 산불 발생 당시 있었다는 술집을 찾아가 강씨가 당일 밤 11시쯤 TV 뉴스를 통해 북한산 화재사건을 보면서 자신이 저지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술집 주인의 진술도 확보했다. 강씨의 진술을 토대로 경찰이 북한산국립공원 내 정릉매표소 등을 현장답사한 결과 강씨가 22곳의 방화지점을 정확히 기억해 냈다.
조사 결과 강씨는 하청을 받아 가스배관공사를 해왔으나 지난해 10월 원청업체의 부도로 돈을 받지 못하자 사회에 불만을 품었으며 방화 전날인 불을 지르기 하루 전인 27일 가정폭력을 못이긴 아내가 가출하자 홧김에 이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해됐을 것이다. 바로 한동안 언론 지상을 뜨겁게 달궜던 북한산 방화사건이다. 가보야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으나 어찌어찌 미루다보니 이제서야 결행하게 된 것이다.

한 달하고도 반이 지났으니 그 흔적이 조금은 지워졌으려나 하는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산에 오르는 길, 중간 중간 만나는 등산객들에게 "진달래능선에서 화재 현장이 보입니까?" 묻기도 하고…. 그런데 희한한 것은 7600평을 태울 정도로 큰 화재였는데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그것도 막 그곳에서 내려오는 하산객들이….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하고 되묻는데는 할말이 없어졌다.


#산 입구의 밭. 상추, 배추 등이 정겹게 자라고 있다.

수유2매표소를 거쳐 올랐다. 매표소 직원은 당연히 화재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다. 매표소에서 정확히 4시에 출발. 평일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등산객들이 적다. 어쩌다 한 두명씩 마주 칠 뿐, 스산한 분위기까지 들 정도다. 등산로 옆에 있는 조그마한 밭들엔 배추며, 상추며, 호박 등이 심어져 있다. 시골 마을에 온 것 같은 정겨움이 물씬 풍겨난다.


#백련사

백련사에 도착하니 4시 10분. 사진 한 장을 찍고 다시 조그마한 계곡길을 따라 진달래능선 방향으로 오른다. 숨이 차오른다. 깔딱고개…. 청바지에 등산화 대신 운동화를 신고, 등에는 등산배낭이 아닌 컴퓨터 가방을 멘 채다. 상황의 절박함과 함께 기자의 강했던 의지, 다시 한번 알아주시길….


다른 때 같으면 단숨에 올랐을 깔딱고개, 다섯 차례나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골라야 했다. 준비가 안된 탓일까. 토고전에 출전하는 우리 태극전사들은 이러지 말아야 할 터인데…. 완벽한 몸 상태와 정신 상태로 임해야 승리를 낚을 수 있을 것이다.
깔딱고개를 다 올라서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상의는 벗어서 짜면 땀이 주르르 흘러내릴 정도. 그래도 기분은 좋다.


#진달래 능선에서 본 정상. 날씨가 흐리다.

여기서부턴 진달래능선. 매표소에서 30분 걸렸다. 진달래나무도, 철쭉도, 개암나무도, 산단풍도…모두 짙은 녹음을 뒤집어 쓴 채 우거져 있다. 화재가 난 곳은 진달래능선 바로 북쪽 계곡이다. 능선에서 보면 훤히 내려다보일 줄 알았는데, 아니올시다이다. 우거진 녹음 때문. 어디가 화재 현장인지 도대체 분간할 수가 없다.

등산객 하나 마주치지 않고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계속 걷는다. 걷다가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 바라본 시내는 온통 매연 투성이다. 시커먼 안개 같은 매연이 서울 시내를 완전히 감싸고 있다. 이마가 찌푸려진다. 땀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내린다. 좋은 현상이다. 하산하면 토고전을 보면서 한 잔 거나하게 마셔줘야 할 테니까…. 술 맛 좀 날 것이다.


#대동문

한 시간 걸려 도착한 대동문. 여전히 한적하다. 단 한 명의 등산객만이 홀로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산딸나무에 흰꽃들이 피어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별 모양의 예쁜 꽃이다. 그런데 꽃이 아니다. 이파리란다. 산딸나무라고 부르는 이유는 9월경 열리는 열매 모양이 산딸기를 닮았기 때문이란다. 지금 북한산은 온통 산딸나무의 별꽃 축제 기간이다.


#산딸나무. 흰이파리가 하얀 별을 닮았다.

어디선가 진하면서도 요상한 내음이 코끝을 찌른다. 가만히 코를 벌름거려 근원지를 찾다보니 밤꽃 향기다. 맞다. 해마다 이맘 때 쯤이면 산에 오르는 처녀들 얼굴 붉어지게 만드는 그 정액 내음. "언놈들이 산에 와서 이렇게 헛지랄들을 해대는 것이여!!" 산신령의 노여움을 살 만한 그 내음.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밤꽃. 요상한 냄새의 발원지다.

취해 있을 시간 없다. 빨리 화재 현장도 가보아야 하고, 또 동네에 가서 최소한 120인치 브라운관 정도는 설치돼 있는 생맥주 집도 예약해야 하고…. 오늘 지인들과 모두 모여 생맥주를 마시며 축구를 보기로 했던 터다.

대동문 앞에서 잠시 묵념한다. 그리고 빌어본다. "제발 오늘 태극전사들이 승리를 거두게 해주십시오."

내려간다. 대동문에서 우이동 가는 방향. 소귀천 계곡 길이다. 미처 갈래길에 이르기 전부터 화재 현장이 목격된다. 위의 나무들은 여전히 울창한데 아래 부분은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 진다. 그래도 땅 위에선 조그만 생명들이 잉태되고 있다. 고사리가 많다. 자연의 힘이다. 인간의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위대한 자연의 힘.


#사진이 흐릿**. 불에 탄 나무다.

소귀천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 화재 현장이 이어진다. 아래 쪽으로 내려갈수록 현장은 참혹하다. 불에 타, 허리가 꺽인 채 나동그라져 있는 나무의 시체들…. 22곳에 불을 질렀다고 하더니 새삼 실감난다. 소귀천 매표소 바로 못미처까지 현장은 계속된다. 가슴이 아리다. 게다가 그곳은 자연생태현장으로 무성한 삼림을 자랑했던 곳인데…. 그나마 복원이 빨리 이뤄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다. 복원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다. 자연 스스로다. 검게 타버린 땅위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뿌린다. 생명은 다시 잉태된다.


#검게 탄 나무. 고사리가 자라고 있다.

할렐루야 기도원 칼국수 집에서 990원짜리 칼국수를 먹는다. 맛있다. 밥까지 덤으로 얹어준다.


#990원짜리 칼국수.

우이동 버스 종점에 도착한 시간 6시 30분. 이제 축구를 보는 일만 남았다. 시원한 생맥주와 함께…. 파이팅 대∼한민국!! 정명은 기자 jungme@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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