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죽어요. 뒷목을 두 번이나 찍었어요. 쓰러졌는데도 또 방패로 찍었어요." 8월9일 밤 10시 포항 형산강 로터리에 있는 등산용품 판매점인 K2산장 앞에서 한 아주머니가 절규하듯이 소리쳤다. 달려가 봤더니 한 노동자가 쓰러져 있었고, 그의 목 뒤에서는 검붉은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피가 계속 흐른다니까. 구급차 빨리 좀 오라고 해." 쓰러진 노동자의 목을 안고 있던 사람이 몇 차례 비명 치듯이 외쳤다. 그러나 경찰은 100여명씩 줄을 지어 걸어갈 뿐 다친 노동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거칠게 항의하며 빨리 구급차를 들여보내라고 하는데도 경찰은 길을 막고 구급차를 보내지 않았다.

고무신을 신고 나온 정원일(56. 남구 대도동) 씨는 "대한민국 민주국가에서 이런 법이 어딨노? 이게 국민의 경찰이야? 이게 깡패새끼들이야?"라고 소리쳤다. 참다못한 시민들이 소대장으로 보이는 경찰간부를 K2산장 앞까지 끌고 와 둘러싸고 멱살을 흔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전경들이 달려와 시민들을 밀치고 그를 데려갔다. 쓰러진 노동자는 15분이 지나서야 겨우 구급차에 실려갔다.

9시50분 경 진압작전에 들어간 경찰은 날카롭게 간 방패로 환갑이 가까운 늙은 노동자들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쓰러진 사람을 다시 방패로 찍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2km를 달려갔다. 건물 지붕 위에서 본 진압 광경은 참으로 끔찍했다. 형산강 로터리 앞 도로는 노동자들이 쏟아낸 피로 곳곳이 검붉게 물들었다. 이성을 잃은 전투경찰이 날카롭게 간 방패를 휘두르며 지나간 자리에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머리와 얼굴을 움켜쥐고 나뒹굴었다.

안면이 나가고, 귀가 찢어지고, 머리가 터진 노동자들이 누워있는 동국대병원은 마치 전쟁병동을 방불케 했다. 이날 중상자만 100명을 넘었다. 경찰은 지난 4일에도 똑같은 폭력을 저질렀고, 2명이 중태에 빠졌다. 3주 전인 7월16일 바로 그 자리에 건설노동자 하중근 열사가 서 있었다. 그의 머리에서 끝도 없이 피가 흘렀고, 그는 8월1일 숨을 거뒀다.

이날 시민들은 "KBS, MBC는 다 어디갔어요?"라고 소리쳤고, 한 건설노동자는 "오늘의 현장을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달라"고 애원했다. 오후 2시부터 밤 10시까지 장장 8시간을 넘게 노동자들의 항의시위가 계속됐지만 방송국 카메라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밤 10시가 넘어서야 MBC 카메라가 나타났다.

전쟁이 벌어진 다음날인 10일 서울의 신문과 방송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했다. 이날의 피 흘리는 전쟁을 국민일보, 세계일보, 한겨레 정도에서만 단신으로 그것도 폭력시위를 중심으로 다뤘다. 조선일보는 시위대가 100명 넘게 다쳤는데도 "노조원과 경찰 등 100여명이 부상했다"고 썼고 문화일보는 "포스코 `파이넥스` 연내준공 무산"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기자들이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포항에 내려가 그 날의 참상에 대해 형산강로터리에 있는 상인들과 주민들에게 물어보라. 경찰의 폭력만행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선 전두환이 두려워 침묵했던 언론이 이젠 포스코라는 거대재벌의 광고중단이 두려워 노동자들의 죽음을 외면하고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는 날이었다.

하루 8시간 일하고 가족과 같이 저녁을 먹고 싶다는 포항 건설노동자들이 서울로 올라와 서울시내를 마비시켜도 한국의 언론들이 끝까지 외면할지 두고 볼 일이다.
 
박점규 전국금속노조 선전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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