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고 윤장호 병장 사망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난달 27일 아프가니스탄에 파견 근무하던 다산 부대의 윤장호 병장 피폭, 사망사건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여전히 이라크 파병 등 기존의 정책을 강행하고 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아프가니스탄에 파병한 모든 한국군을 철수할 것과 함께 이라크 자이툰 부대, 레바논 평화유지군 파병도 즉각 중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회에서도 이런 목소리는 이어지고 있다.
민주노동당 이영순 의원과 열린우리당 정청래 의원, 무소속의 임종인 의원은 "정부는 동의 다산 부대를 아프간에서 즉각 철수시켜야 한다"며 "미군과 동맹군 지원을 위해 국군병사를 희생시킬 명분이 없는 이상 내전중인 이라크는 물론 레바논 파병도 재고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의원들은 "이번 사고는 최근 아프가니스탄 치안이 극도로 불안정해진 가운데 일어난 것"이라며 "연말까지 철군을 머뭇거리다가는 윤 병장과 같은 피해가 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정부는 즉각 아프가니스탄에서 국군부대를 철수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이 밝힌 국방부 자료에 의하면 2001년 1월 10일 개전이래 2006년 11월 20일까지 미군과 동맹군 사망자 수는 350명이었으며 이중 2006년 1월 1일 이후 사망자가 122명에 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가난하고 소외된 지구촌 이웃들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지속하며 국내 최초로 UN경제사회이사회(UN ECOSOC)로부터 NGO 최상위 지위인 포괄적협의지위(General Consultative Status)를 부여받은 국제비영리단체인 굿네이버스가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글을 <위클리서울>에 보내왔다.

▲2001 페샤와르 난민촌
파키스탄 서쪽 국경지역의 페샤와르 난민촌은 21년간의 내전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난민들이 살고 있던 곳이었다. 9.11 세계무역센터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간 공습이 이어지면서 페샤와르 난민촌에는 100만명 이상의 난민이 더 늘어났다.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난민들을 지원하기 위해 우리단체는 긴급구호팀을 파견했고, 나는 이듬해 2월 8진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가게 되었다. 그곳의 아이들은 전쟁을 겪었다고 하기엔 너무도 밝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동양인에 대한 신기함으로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귀여운 소년들이었다.

▲2002 카불 가을운동회
그 해 10월에는 전쟁의 흔적이 가득한 건물들, 여성이 보이지 않는 거리, 학교의 대부분이 파괴된 카불에서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가을운동회를 열었다. 12명의 자원봉사자가 한국에서 파견되었고, 난생 처음으로 참여한 운동회로 아이들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가을운동회 이 후 학교를 재건하기 위한 기금들을 모아 재건축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제 무너진 건물이 아닌 반듯한 학교 건물에서 공부하고 뛰어 놀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최초로 산모들과 결석환자들을 위한 초음파진단센터도 문을 열었다.

▲2003 돌아오는 사람들
난민촌 긴급구호와 카불 가을운동회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그 곳의 사람들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아프가니스탄 지부장을 지원해 다시 그 땅을 밟았다. 아프가니스탄 밖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이 탈레반이 물러난 카불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카불 시내 곳곳에 텐트촌이 세워지고, 조용하던 카불시내에 교통체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또한 무너진 집들이 다시 건축되기 시작했고, 사람이 살지 않던 지역까지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우리단체 아프간 지부는 귀향하는 난민들을 위한 임시 정착촌의 위생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방역을 하고, 임시보건소를 설치했다.

▲2004-2005 변화하는 거리의 아이들과 여성들
자말미나에 학교를 완공했다. 모래바람을 맞으며 수업 받던 아이들은 마음껏 공부하고 뛰놀 수 있는 학교가 생기게 된 것이다. 철저하게 무시당하며 갇혀 사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모습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우리단체는 최초로 여성만의 공간인 여성교육문화센터를 개소했다. 여성들만 입장할 수 있는 이곳에서 배움에 갈증을 느끼던 여성들이 영어, 컴퓨터, 문맹퇴치수업을 받았고 영화관, 식당, 놀이방 등의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카불 시내에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3개 마을에는 마을보건소가 개소되어 여성조산사, 여성간호사, 의료진들을 매일 파견,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여성과 아이들에게 의료지원 서비스를 제공했다. 희망을 잃어버린 그들에게 조금씩 우리는 희망과 용기를 되찾아 주고 있었다.

▲2006 또 다른 위기
2006년 5월 29일 갑자기 건물 밖에서 총소리가 들리고 100여 명의 사람들이 뛰어서 도망가는 모습이 창 너머로 보였다. 곧 이어 무장을 한 사람들 수백 명이 주변 건물들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시위대처럼 빨리 걸어가고 있었다. 폭동이었다. 다시 카불시내에 미사일이 떨어졌고, 외국인들을 향한 정치적 테러가 시작되었다. 사람들도 더이상 외국의 구호기관들을 환영만하지는 않았다. 폭동 이 후 다시 거리에서 여성들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여성교육문화센터의 여학생들도 예전처럼 나오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이란 나라는 혼돈과 어둠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프가니스탄, 그 땅에서 미약하지만 희망을 보았다. 너무도 위험한 곳이지만, 그 곳에서 우리는 한국인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남아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나라, 아프가니스탄
만일 어떤 사람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낸 지난 4년간 가장 소중한 경험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서슴없이 이렇게 말 할 것이다.

"4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에서 더 많은 가족을 얻었습니다. 변함 없이 나를 신뢰하고 믿고 따라준 우리 직원들이 이젠 멀리 떨어져 서로를 걱정해주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2002년 처음 굿네이버스가 아프가니스탄에 사무실을 개소할 때 5명의 직원이 있었다. 그 때 사무실 문지기로 있던 직원은 지금 약 80여명의 직원들이 일하는 8개의 사업장에서 발생하는 기술적 문제를 해결해주고 있다.

또한 지난 4년간 돌발적으로 발생했던 다섯 번의 위험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내 생명을 구해주기도 했다. 이 외에도 차량 운전수로 입사해서 현재는 연 예산 3억이 넘는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로 일하는 직원이 있는가하면 보수적인 집안환경으로 집 밖에서 영어를 배우기 힘들었던 여성 직원은 여성사업 최고 책임자가 되기도 했다. 우리와 함께 일하면서 변화해가는 아프가니스탄 현지 직원들을 통해 내가 아프가니스탄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값진 일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우리 직원들에 대한 자부심이 내가 아프가니스탄 정부 어떤 사람을 만나도 당당할 수 있는 힘이 되었고, 어떤 위험한 순간에서도 믿을 수 있는 힘이 되었다.


이제는 결혼하는 직원의 집에 가서 밤늦은 시간까지 함께 춤을 추며 축하해주고, 장례식이 있는 직원이 있을 때면 장례기간 내내 자리를 지켜주는 가족이 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음 열렸던 `카불의 가을 운동회`때 우리 학교 소녀들이 부르던 노랫말이 내 머리에 맴돈다.
"아프가니스탄은 아름다운 나라예요. 우리는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평화를 지키며 살고 싶어요. 어머니의 가슴에서 느낄 수 있는 평화가 이 땅을 적시게 하소서…."

글/사진=이병희 기자 greatmazinga@goodneighbors.org <이병희님은 굿네이버스 전 아프가니스탄 지부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현 국제개발팀 과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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